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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미셸 푸코(1926-1984)

금동원(琴東媛) 2015. 4. 1. 23:13

 

 

현대사상의 뿌리들 : 미셸 푸코

_임상훈(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271947125&code=900308&s_code=ac137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지적 폭력’ 통찰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이 세상에 있는 동물을 종류별로 분류해 보자. 세상에는 ①황제의 동물 ②방부 처리된 동물 ③길들여진 동물 ④젖이 나오는 돼지 ⑤인어 ⑥전설상의 동물 ⑦주인 없는 개 ⑧이 분류법에 포함되는 동물 ⑨미친 듯 돌아다니는 동물 ⑩셀 수 없는 동물 ⑪낙타털로 된 가는 붓으로 그려진 동물 ⑫기타 등등 ⑬장독을 깨버린 동물 ⑭저기 저 모기같이 생긴 동물 등 14가지 종류의 동물이 있다.

지금 제시한 이 분류법에서 빠진 동물이 있는가? 없다. 그런데 이 동물 분류법으로 결론을 맺고 나면 틀림없이 신문에 항의 전화가 빗발칠 것이다. 동물을 빠뜨리지 않았는데도 왜 이런 분류법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지금 우리는 내용이 부족하거나 뭔가를 빠뜨려서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담는 방법이, 세계를 재단하는 방법이 낯설어서 불편한 것이다. 이렇게 내용물이 아니라 그것을 재단하는 틀에 관심을 가지는 것, 틀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사고를 구조주의적 사고라고 한다.

위의 분류법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구조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조와 다르다는 점이다. 주어진 내용은 달라지는 게 없지만 그 내용을 분류하는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 다른 구조는 바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각자의 틀이다. 이러한 구조, 즉 틀을 벗어나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적어도 관념화된 인식을 이야기한다면…. 그런데 그 틀을 조금만 흔들어놓으면 우리는 이렇게 문화충격을 겪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저 틀이 이상하고 야만스러운데 우리의 틀은 정상적이고 문화적이라는 사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틀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보장은 있기나 한 것일까? 누군가가 우리의 틀을 보면서 비웃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는가? 결국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보편적 인간’의 틀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의 것이 정상이라는 그 거만함이야말로 진정으로 야만스러운 사고다. 푸코는 자신의 주저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위의 분류법을 예로 들면서 ‘우리’와 ‘남’, 또는 다른 표현으로 ‘동일성’과 ‘타자’를 나누고 있는 질서의 폭력을 꿰뚫어본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픽션으로 알려진 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세상을 보는 법은 오히려 거꾸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해본 서구인들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이런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라는 보편성의 개념은 한낱 허구일 뿐이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합리주의는 특정 문화를 대변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아중심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이라는 것은 특정 문화가 다른 문화, 즉 타자에 가하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푸코가 인간주의, 즉 휴머니즘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눈이, ‘나’의 틀이 보편적 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모든 다른 가능성들을 제거할 때만 가능할 뿐이다.

우리는 한민족인가? 우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수많은 다른 타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하나를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해온 역사, 아니 본질이든 그 무엇이 됐든, 어떤 특정 하나의 개념을 중심으로 놓기 위해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애써 무시해온 역사가 바로 지식의 역사이고, 더 넓게 보면 모든 것의 역사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중세 이후에 나타난 휴머니즘은 ‘본질주의’라는 보다 근원적인 범주 안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는 일탈이라고 한다. 변태, 혹은 광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광기’는 따라서 휴머니즘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휴머니즘을 지키기 위해서 광기를 배척하고 격리하고 감시한다. 하지만 중세 때도 그랬을까? 푸코는 그의 첫 번째 주저인 <광기의 역사>에서 정신병자를 감금하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부터라고 증언한다. 그 이전에는 광인도 어엿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달리 보이는 것뿐이지 격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돈키호테를 생각해 보자. 돈키호테는 기사도들의 무용담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기사 복장으로 세상에 나아간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좌충우돌하면서도 늘 ‘우리’ 안에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교화 기능을 수행하는 사회 구성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돈키호테 이후 “반세기도 안 되어 (고전주의 탄생과 함께, 합리주의의 탄생과 함께) 광기는 갇히고 고립되었으며 수용소에, 이성에, 도덕규범에, 그리고 도덕규범의 획일적 어둠에 묻혀버리게 된다”. 이성의 무대, 합리주의의 무대였던 17세기 유럽에서는 ‘표준’ 인간에 어울리지 않은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격리되기 시작한다. 정신병자, 기형인, 부랑아, 빈민들은 모두 ‘표준’ 사회에서 격리되고 배제되었으며 본질적인 인간상, 표준적인 인간상을 위해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를 말살당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표준’ 인간이 합리의 이름으로 자신도 모르게 ‘타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야만성을 발견한 푸코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푸코에 따르면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타자’를 재단하기 전까지 광인은 초자연적인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이었을 뿐이다. 중세에서 광인의 위치를 보라! 격리될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환대도 받았다. 하지만 이성의 이름으로, 합리의 이름으로 보편적 인간상을 구축하려는 순간, 광인이 우리와 같은 ‘동일성’을 요구하는 순간, 어느새 그들을 배제하려고 움츠러드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과 같은 야만적 행태를 보노라면 푸코의 진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소름이 돋는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가 그들을 밀어내려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다.

다시 푸코의 광기로 돌아가 보자. 푸코에 따르면 ‘미친 사람’이 분류되어 가는 과정에 따라 그 분류자도 변해 간다. 17세기에 광인을 결정하는 것은 사법관이었다. 17세기에 광인은 부랑아, 빈민과 같은 여타 소외계층과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분류법이 새로워진다. 소외 계층은 더욱 세분화되어 분류되고, 광인은 의학적인 ‘치료의 대상’이 된다. 이제는 사법관이 아니라 의사가 광인을 알려 하고, 분류하고, 배제할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회가 더 세련됐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바꿔 쓰는 것도 가능하다. 더 세련되게 타자를 격리시키고 있다. 지식이 권력 구축에 철저하게 동조하고 있다.

의학은 이제 표준화된 사회를 위한 홍위병 역할을 한다. 인간의 바람직한 몸을 제시한다. 바람직한 몸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점점 격리될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이야말로 바로 21세기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은가!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의 몸은 표준화되어 가고 있다. 남성도 마찬가지, 뚱뚱하면 지는 거다. 체중은 그렇다 치고 키까지 표준화에서 벗어나면 격리될 위기에 처해 있으니! 요즈음 인터넷이나 신문을 보면 온갖 첨단의학이 총동원돼 늘리고, 줄이고, 키우고, 덧붙이며 표준화를 위해 정신없이 달린다.

20세기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모든 저작과 강의, 사회참여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지식권력들이 사회의 마이너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격리가 얼마나 암암리에 사회 안에 깊이 침투해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어쩌면 푸코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가지지 않을 방법이 없다) 써내려 온 이 글도 어떤 의미에서 지적인 폭력이 아닐까? 푸코가 말년에 긴 침묵을 계속한 것도 이런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푸코를 더 알고 싶다면

푸코의 주저는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초기의 대작 <광기의 역사>(이규현 역, 나남, 2003)는 푸코 입문자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말과 사물>(이광래 역, 민음사, 1997)은 말할 나위 없는 푸코의 주저다. 1966년 프랑스에서 바게트만큼이나 많이 팔렸다는 책이다.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프랑스인들의 인문학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의 고고학>(이정우 역, 민음사, 2000)은 푸코 이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저서다. <담론의 질서>(이정우 역, 새길, 2011)는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 교수로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을 엮은 것으로 <지식의 고고학>과 함께 푸코를 이해하는 길잡이다.

그 외에도 <임상의학의 탄생>(홍성민, 인간사랑, 1996), <감시와 처벌>(오생근 역, 나남, 2003), <성의 역사1>(이규현 역 나남, 2004), <성의 역사2>(문경자·신은영 역, 나남, 2004), <성의 역사3>(이영목 역, 나남, 2004)가 있고 해설서로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박정자 역, 그린비, 2012), 이광래의 <미셸 푸코>(민음사, 1989)가 있다. 또한 이정우의 <객관적 선험철학 시론>(그린비, 2011) 중에서 1부 ‘담론의 공간’을 읽어보는 것도 푸코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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