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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질 들뢰즈(1925-1995)

금동원(琴東媛) 2015. 4. 1. 10:04

 

 

현대사상의 뿌리들 : 질 들뢰즈

_유충현(대안연구공동체 연구위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2043215&code=960205&s_code=ac137

 

존재와 접속하라, 그리고 창조하라

기억나는 콩트 하나. 1980년대 초 올리비아 뉴턴 존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미팅으로 만난 남녀. 서로의 취향과 교양에 대해 묻고 있는 중이다. 여자가 올리비아 뉴턴 존을 좋아한다고 하자 남자가 답한다. “전 올리비아는 좋은데 뉴턴 존은 별로더군요.” 이 남자 한술 더 떠서 듀엣보다는 사이먼 가펑클 같은 솔로가 더 좋지 않으냐고 묻는다. 무식한 것인가, 아니면 나름의 유머인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는 불편한 진실. 오늘 소개하려는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는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1930-92)와 함께 네 권의 책을 냈다. 두 사람이 배터리를 이루어 수많은 창조적 개념들을 생산했고 정신분석에 대놓고 돌직구를 던져댔다. 그렇게 둘은 하나로 접속했고 망치/모루 기계가 되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상 들뢰즈라고 표기하겠지만 독자들은 들뢰즈 가타리라는 제3의 저자 혹은 다양체로서의 저자로 읽어야 할 것이다.

차이로서의 생성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주류 학문이 추구해 온 것은 동일자였다. 고대의 철학자, 중세의 신학자, 근대의 과학자들은 모두 현실 세계가 변화무쌍한 다양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며 현실 세계 외부에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어 이것이 모든 사물의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라고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시대와 사상가에 따라 이데아, 보편자, 제1원인, 로고스 등으로 불렸지만 사실 동일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들뢰즈는 불변의 상수가 아니라 변수를, 존재(-임)being가 아니라 생성(-됨)becoming을 사유하려고 하며 변화의 원인이 사물 자체에 있다는 내재성을 취한다.

생성이란 무엇인가? 차이, 운동, 변화. 시뮬라크르 등. 사실 동일자에 대립하는 모든 것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들뢰즈가 말하려는 생성은 무엇보다 생산과 창조다. 그것은 접속을 통해 가능한데 접속하는 것들이 반드시 동질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들뢰즈와 가타리처럼 이질적인 것(철학자/의사)들끼리 접속할 때 창조적 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연결될 수 있으려면 연결항들 간의 위계가 사라져야 한다. 계급장을 떼지 않으면 그 연결은 힘 있는 것에 포섭되는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 그래서 들뢰즈가 창안한 개념이 기계다. 흐름을 절단하고 이어주며 다른 것과 접속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이든 기계다. 이제 모든 것들이 대등하게 연결될 수 있고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산은 단순히 동일한 것의 반복(재생산)이어서는 곤란하다. 차이나는 것으로서의 생산, 즉 창조라야 한다. 생성은 결코 재현/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그리고 삶 자체를 창조적 생산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들뢰즈에게 재현은 악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언제나 대상, 주체 그리고 시공간적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현은 생성과 대립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록 뮤지션들의 긴 머리, 메이크업, 하이힐은 진정한 여성-되기라기보다는 모방이지만 소프라노의 음역을 넘보는 하이 톤과 동물처럼 울부짖는 창법은 가사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분절되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는 탈코드화된 흐름 자체를 겨냥한다. 이것은 여성-되기, 식별 불가능하게-되기, 동물-되기의 훌륭한 예가 아닐까? 이처럼 순수한 차이로서의 생성을 강조한 들뢰즈가 동일성/재현에 보이는 혐오감은 당연해 보인다. 동일성에서 벗어나려는 들뢰즈의 사유가 무의식/욕망을 사이에 두고 동일성의 현대적 판본인 정신분석과 벌이는 결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욕망, 혁명의 정치학으로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들뢰즈는 정신분석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라는 동일한 부제가 붙은 두 권의 책 <안티 오이디푸스>(1972)와 <천개의 고원>(1980)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정신분석이 다루는 무의식과 욕망이다. 먼저 욕망에 대한 정의부터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라고 정의한 반면, 들뢰즈는 욕망/무의식을 생산이라고 정의했다. 기계들이 접속하는 이유가 생산을 위해서이고 욕망이 생산이라면 욕망은 기계, 생산과 상동 관계에 놓인다. 이제 욕망은 ‘욕망하는 기계’ ‘욕망하는 생산’으로 존재한다. 들뢰즈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생산으로서의 욕망을 재현으로 대체하고 오이디푸스를 통해 억압을 고취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이미지로 혹은 말실수나 농담을 통해 기표로 등장하는 무의식은 재현에 묶여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금지하는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고 나서야 구성되는 주체는 체제순응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을 가족사적 맥락에서 구출해내서 거리, 광장 위에 세우고 혁명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것이 68혁명의 교훈을 계승하려는 들뢰즈의 욕망이었다. 들뢰즈의 욕망 개념은 순수한 ‘하고자 함’이며 스스로 원해서 즐기는 실천이다.

머리가 노력을 못 이기고 노력은 즐기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운빨이 제일 윗길이긴 하지만) 혁명이 축제이고 잔치일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촛불집회에서 확인되었다. 정권 입장에서는 삭발 투혼 노조위원장의 굳게 다문 입보다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의 수다스러운 입이 두려워졌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는 욕망이 갖는 무리적 속성에 주목한다. 촛불집회 참여자들의 욕망이 과연 하나로 환원될 수 있겠는가? 참여자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그것은 결코 먹거리에 대한 걱정 하나로 귀속될 수 없는 다양체로서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땡땡이치려는 학생의 욕망, 공연을 보려는 욕망. 심지어 초를 팔러 나온 상혼 등 이질적 욕망들이 밀도 있게 응집된 배치였다. 평화적 집회라는 배치에서 촛불은 상징적 항의였지만 살수차가 물대포라는 진압기계가 되는 순간 언제든 화염병을 대신할 수 있는 대항무기가 될 수도 있다. 배치 속의 모든 요소들은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언제든 변화 가능한 것들이다. 변화의 요인이 내재적인 것과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배치 개념은 <천개의 고원>에서 핵심적이다.

소수어 : 창조의 원천

가타리를 통해 마르크스와 접속한 들뢰즈에게 언어는 정치적 실천의 문제다. 그가 보기에 언어는 불변의 랑가주(문법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변이의 파롤(개별 발화)이며 정치학이다. 언어는 무엇보다 명령이라는 것이다. 언어에는 두 가지 용법이 있는데 다수적 용법과 소수자 용법이다. 여기서 다수냐 소수냐의 차이는 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표준어보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표준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소수로 분류된다. 들뢰즈는 <카프카>에서 소수자를 창조의 원천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사투리도 표준어만큼이나 변하지 않고 머문다면 동일한 것의 반복에 불과하므로 창조와 무관하다.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문학을 했던 카프카의 경우처럼 지배어와 만나 그것을 변화시킬 때만이 창조다. 외래어와의 조합인 ‘멘붕(멘털 붕괴)’이라든가 성적 의미에서 벗어나 보편적 부사가 되어버린 ‘졸라’는 탈코드화(규칙/형식에서 벗어나기)와 코드화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외부 환경이 볼펜에서 키보드, 터치스크린으로 거듭 ‘탈영토화’함에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언어도 함께 변한다. 이모티콘과 도상이 문자를 대체하는 일은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언어는 불변의 구조라기보다는 외부 환경과의 접속에 열려 있고 변이의 선을 타고 흐르는 연속체다. 변이라고 해서 무조건 창조일 수는 없다. 미시 정치로서의 언어적 실천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생산물”로 정의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선행 조건으로서의 본원적 축적 과정과 같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이나 미국의 노예 해방의 목적은 토지로부터 노예를 떼어내 자유로운 임금노동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탈영토화 과정이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인 변이의 운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재영토화하는 포획장치를 가지고 있다. 자본은 탈영토화하는 욕망의 흐름을 막지 않는다. 다만 일정한 경로로 흐르게 만든다. 그래서 도처에 노스페이스와 루이뷔통이다. 이처럼 자본의 욕망과 변이는 이윤을 위한 혁신에 머문다. 절대적 운동, 즉 혁명에 이르기 위해서 들뢰즈가 제시하는 것은 분열증자/노마드(nomad)가 되는 것이다. 분열증자는 결코 정신줄 놓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미치지 않은(no-mad) 자다. 그는 흐름을 가속화시켜 주어진 경로를 이탈하여 범람하게 만든다. 어떻게 소수자가 될 수 있느냐고? 소수적인 것과 접속하라. 서점으로 달려가 카프카의 문학 기계와 접속하거나 홍대 클럽에서 노이즈 록밴드 ‘적적해서 그런지’의 공연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들뢰즈를 더 알고 싶다면

여기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들뢰즈의 주저를 꼽으라면 <차이와 반복>(김상환 역, 민음사, 2004)을 들 수 있겠다. 번역이나 주석도 꼼꼼한 데다 역자의 내공도 신뢰할 만하다. 쉽지 않으니 해설서 격인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 해설과 비판>(제임스 윌리엄스 저, 신지영 역, 라움, 2010)을 참조하면서 읽어볼 것을 권한다. 가타리와의 공저 <천개의 고원>과 <앙띠 오이디푸스>는 여러모로 추천하기 망설여진다. <의미의 논리>를 읽기에 앞서 <시뮬라크르의 시대>(이정우 저, 거름, 1999)를 읽고 <천개의 고원>과 <안티 오이디푸스>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이진경 저, 휴머니스트, 2002)으로 대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두 책 모두 강의록이어서 비교적 읽기 수월한 데다 들뢰즈 전문가답게 설명이 깔끔하다. 개괄을 위한 입문서로는 네그리와의 공저로 명성을 쌓고 있는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마이클 하트 저, 김상운·양창렬 역, 갈무리, 2004)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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