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최악이다. 이웃으로서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도 바쁜 걸음을 과거사가 발목 잡고 있다. 지나간 역사를 직시하지 못하는 일본의 트라우마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한·일 두 나라가 나아가 한·중·일 세 나라가 미래를 향한 발전적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야 할까. 일본인들에게 주는 힐링의 글을 오랫동안 써온 재일 정치학자 강상중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송: 처음 뵙습니다만 저에게는 옛 친구처럼 익숙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접하면서 사회학자이자 작가로서의 기질을 느꼈거든요. 문학을 좋아하셨나요?
강: 토마스 만 같은 독일 작가를 좋아했어요. 일본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 재일동포 작가는 김석범·김달수·이회성. 이회성은 제 선배이고요, 이광수도 좋아합니다.
송:『어머니』도 그렇고 몇 작품을 보면 자이니치(재일동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 그걸 사회과학과 소설로 표현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자이니치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강: 그것은 역시 주변성, 즉 마지낼러티(Marginality)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인이기 때문에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또 주변에 있다는 점이 나를 문학과 사회과학으로 안내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국가나 국민, 유럽이나 일본 등 어딘가 중심이 있고 그 중심에서 세계와 시대를 바라보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재일동포인 제 안에서 조금씩 형성되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송: 주변인은 중심에 있는 사람보다도 그 리얼리티를 훨씬 객관적으로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보는 사람은 슬프지요. ‘슬픈 시선의 정확성’이라고 할까요?
강: 굳이 말하자면 중심에 있는 경우 반드시 사각지대가 발생합니다. 사각이란 사(死)의 각(角)이지요. 그 사각 부분이 주변에 있는 덕분에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변에서 자랐다는 것이 저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고 최근에 반성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송: 제가 최근 식민시대를 연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왜 생겨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치학적으로는 설명이 됩니다만, 그 정서적 바탕인 ‘고립’ 개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은 고립과 불안감에 떨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를 품에 넣어야 해소되는 고립감이 곧 일본 제국주의의 정서적 바탕이죠. 이를 강 총장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라는 고립의 역사 속에서 주변인으로 생존하는 것, 말하자면 ‘이중적 고립’이잖아요. 그렇게 보면 너무 가혹한가요?
강: 방금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실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재일동포의 정서를 한국에서 오신 지식인이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아주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희들은 지금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요. 어떤 점에서 보면 한국의 주류 지식인이나 학자, 정치가, 언론인들도 일종의 제국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죠. 학창 시절에는 저 자신과 한국의 주류 또는 한국의 중심적 문화와 동일시하는 것이 일본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엑소더스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어요.
송: 그렇다면 어떤 시점을 구축하고 있으신가요?
강: 저는 일본 안에 존재하는 이 제국주의를 ‘센티멘털한 제국주의’라고 표현한 적도 있는데요. 그것은 제국주의로서 명확한 논리(logic)나 프로파간다 혹은 명확한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감정적 요소가 우선 개입된 유형의 것이죠. 아까 말씀하신 오랫동안 존재해온 고립과 불안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마이너리티인 우리들은 더하죠. 모국과의 관계가 끊겨 있고 또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이중, 삼중의 고립감과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제국주의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거지요. 마이너리티는 그 속에 내재된 폭력성을 간파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조선은 뒤떨어지고 약하니 동정심을 품고 도와야 한다, 스스로 역사를 개척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감정적 제국주의가 원천적으로 폭력적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중심부에는 많습니다. 그것이 과거의 식민지배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좀처럼 파악하지 못하는 내부 장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최근 생각입니다.
송: 전적으로 동의해요.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에 대해 한국은 반주변, 일본은 주변이었어요. 일본이 주변성을 완전히 반전시킬 수 있는 논리는 정서의 비약을 통해서 가능하죠. 뒤집는 것, 아까 부정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부정, 자기 역사적 위치를 반전시켜 고립감을 해소하는 것이죠. 이웃 국가에 고립감을 온전히 이전시키면서 자신의 반전을 꾀하는 정서가 식민주의의 저변을 흐르고 있었어요. 문제는 냉전 이후 1980년대 말부터 일본에 ‘국민국가’적 기류가 새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통제가 끝난 이후 고립과 부정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기류가 그것이죠. 이건 한국·중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 저도 동감입니다. 냉전, 즉 ‘미국의 그늘’을 생각하지 않으면 정서와 감정적 바탕이 이른바 고립에서 공격적인 일종의 제국주의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탈냉전 이후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할 때 한·중·일 중 과거의 뿌리를 부정하려는 힘은 어쩌면 일본 쪽이 한국이나 중국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과거의 식민지 시대를 부정하고 싶어 하죠. 하지만 과거 굴욕적인 식민지 시대를 제아무리 지우려 해도 냉엄한 현실로서 분단, 즉 적대적 분단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식민지 역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현재 이중의 의미에서 역사를 부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전후 역사를 미국이 강요한 역사로서 부정하고 싶어 하죠. 현재 일본 사회 내부에 이런 ‘이중의 부정’이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정서(sentiment)의 전압이 극히 증폭되는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과거사를 좀처럼 정면에서 마주하기 어려운 감정구조가 존재합니다.
송: 그 말씀에 전율을 느낍니다. 시선을 한국으로 옮기면 많은 내부 문제가 보입니다. 오늘날 세력 구도에서 일본·중국에 비해 한국이 주변국(marginal state)인 셈이죠. 그러면 한국이야말로 역사의 모순을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또 가야 할 방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식민지와 여러 가지 고난을 함께 겪었던 한국이야말로 광복 70년, 종전 70년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한·중·일 3국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강: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아마도 유럽의 경우에 그런 주변화된 나라의 국민이나 지식인들이 분단과 대립을 초월하는 다양한 시선을 제시해 왔습니다. 한국은 이른바 주변화된 상황 속에서 중국과 일본에 동아시아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해야 하는데요, 한편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일제의 역사적 청산이 부족했다는 점이죠. 일제의 최대 협력자가 전후 해방된 풍요로운 한국의 기반을 형성했다는 겁니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미진했던 친일 청산이 일종의 걸림돌이 되었고, 그것이 정당과 지역 대립 등 다양한 내부 분절의 큰 리트머스지가 되었다는 거죠.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이 광복 70년을 맞이해 한·일 관계 개선과 자국의 내적 문제를 고민할 때 해방 후 역사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죠.
송: 탈냉전 시대에 동아시아에 다시 강한 국민국가가 등장하는 것은 국민을 키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시민 창출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본도 사실은 메이지 유신 때 시민이 아니라 신민(臣民)을 만들었고, 곧장 국민이 되었죠. 한국도 민주화 이후 시민을 만들었지만 아직도 국민시대에 갇혀 있고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층의 결핍은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기에 국가가 질주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죠. 아까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삼국 정치권에 대해 뭔가 견제하는 시민층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강: 중국은 지금도 시민이 국민 안에서 싹트는 단계인데 그 국민이 조금씩 내셔널리즘에서 벗어나는 방향을 향하지는 않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화가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신민(subject)에서 과연 전후 어디까지 시민이라는 것이 탄생했는가를 생각하면 비관적이죠. 국민주권은 강력하게 양성되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이란 개념이 일본에 정착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했다는 점에서 예외였고, 이는 상대적으로 대만과 유사한데요. 하지만 현 상황을 보면 국민주의, 국민이라는 이름의 내셔널리즘이 시민주의를 압도하고 있기는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이곳 동아시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민주의라는 것이 희박한 상태에서 국가와의 일체화를 진전시키려는 움직임이 보다 강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송: 일본은 지금 우경화 일로에 있고 혐한 감정이 확산되었습니다. 앞으로 한·일 관계는 어떻게 가야 하고, 어떻게 이걸 풀어 나가야 한다고 보시는지.
강: 앞에서 언급하신 ‘이중의 부정’과 관련해 말해 보죠. 일본에서 전후 시대는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간주됩니다만 이는 미국에 의해 강요된 타율의 역사였다는 자아분열증 같은 것이 대중심리 속에 존재합니다. 이 분열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데 이 분열을 제거하려면 전전(戰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한국·중국으로부터 비판의 목소리에 직면하게 됩니다. 일본은 백 수십 년간 경제적·군사적으로 선진국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만 아직 자국의 정체성에 대해선 확신을 갖지 못했어요. 저는 이 문제가 계속해서 한·중·일 삼국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과 비교되는 점이죠. 독일은 종전 이후 아데나워가 곧바로 프랑스와 주변국들에 화해의 길로 나섰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서유럽이었지요. 그럼 일본은 돌아갈 곳이 있었느냐 하면, 없었죠. (아시아에서 받을 수 없었으니까). 이 점이 미국에 대한 실질적·정신적 예속을 파생시켰으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피해자 의식과 고립감이 강하게 저변에 흐르는 이유입니다. 과거의 부정을 통해 더욱 공격적인 내셔널리즘이 등장하는 사회심리적 배경이죠.
송: (그는 분명한 답을 내리지 않았다. 필자가 그의 뜻을 해석하면 이럴 것이다) 결국 일본이 ‘그러하므로’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용서해야 하지 않을까…용서하기에는 기억이 너무 선명한데. 이런 뜻인가요?
[인터뷰 후기 …] 그의 눈은 맑았다
그가 총장으로 있던 세이가쿠인 대학으로 찾아가는 길엔 눈이 내렸다. 도쿄에서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기독교 계통의 재단이 설립한 그 대학엔 한국인 2세가 많이 눈에 띄었다. 학생들의 눈은 맑았다. 강상중 총장의 눈도 나이답지 않게 맑았지만 애수가 비쳤다. 재일동포인 그는 23세 때 ‘나가노 데쓰오’란 일본 이름을 버리고 청춘과 결별했다. 그러곤 민족이산(디아스포라)의 주변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지난 40년을 바쳤다. 도쿄대 정교수직을 미련 없이 떠나 작은 대학으로 이직한 데에는 중심보다 주변의 지혜를 터득하고자 했던 그의 삶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사회과학자이면서 작가다. 운명의 탯줄을 끊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서 그에게 진해 태생 어머니는 존재의 오마주였고 구원의 우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썼고, 후쿠시마 쓰나미와 세월호 참사가 겹쳐 소설 『마음』을 썼다. 『고민하는 힘』은 일본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그의 화두는 동아시아에 맞춰 있다. 일본·중국·한국을 감싸 안는 인식지평을 개척해야 그의 잠들지 못하는 마음에 잠시라도 평화의 은빛 눈이 내릴 듯하다.
강상중은 …
1950년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출생. 독일 뉘른베르크대에서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뒤 98년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정교수가 됐다. 지난해 4월 세이가쿠인대 총장으로 취임했으나 최근 사임했다. 교포 2세로서 정체성에 대한 오랜 고민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을 격려하는 『고민하는 힘』,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아들의 죽음 등을 계기로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일본 방송사 메인 뉴스의 해설자와 신문 칼럼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강연 때마다 수백 명의 청중이 몰릴 만큼 열성 팬이 많다. 지난해 3월 도쿄대에서 열린 고별강연에는 200여 명의 학생과 외부인사가 참석했다.
* 인터뷰(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중앙일보 (2015.3.25) 오피니언 직격인터뷰에서 발췌-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430310&c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