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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곽재구(사평역에서)

금동원(琴東媛) 2015. 4. 7. 21:50

■만인의 애송시 '사평역에서' … 내겐 축복이자 감옥

 

[요즘 뭐하세요] 시인 곽재구
평생 시 썼지만 다들 이 시만 기억
사평, 지금은 없는 남광주역 모델
히말라야 다니며 순박한 삶 배워

 

 
 

 곽재구 시인은 “세상이 고통스러운 한 시는 읽힌다”고 했다. [프리랜서 오종찬. 중앙포토]

 
올해 예순인 곽재구 시인이 대표작 ‘沙平驛(사평역)에서’를 쓴 건 20대 초반이던 1976년 가을이다. 곽씨는 시를 그해 겨울, 대학 문학동아리 선후배가 마련해준 자신의 군입대 환송회에서 처음 공개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주섬주섬 종이에 받아 적었다고 한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로 시작해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로 끝나는 27줄 시의 감염 효과는 그처럼 즉각적이었다. 군대에서 돌아와 한동안 방황하던 곽씨는 81년 이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83년 ‘창비시선’ 40번으로 출간된 첫 번째 시집 『沙平驛에서』에 수록한 뒤 국민 애송시로 자리 잡았다.

 6일 전화통화에서 곽씨는 “‘사평역에서’는 내게 축복이자 감옥 같은 작품”이라고 했다. 2012년 『와온 바다』까지 시집을 여섯 권이나 더 냈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사평역에서’ 만을 기억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2013년 출간한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는 ‘사평역에서’에 대한 글을 한 꼭지 실었다. 사평역의 실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숱하게 시달린 탓이다. 글에 따르면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진 남광주역이 모델이다. 시의 화자가 눈물을 던져 주었던 톱밥난로는 남광주역에 없었다. 군 생활을 했던 전남 장흥 회진포구의 한 다방에 있던 톱밥난로에서 착안했다. ‘사평’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여러 곳이다. 완행버스 안에서 만난 눈빛 맑은 아가씨의 고향 마을 이름이 사평이라는 데서 따왔다.


 등단 직전인 1980년 말 시인의 모습. [프리랜서 오종찬. 중앙포토]

 

  곽씨는 “실은 ‘사평역에서’를 울면서 썼다”고 했다. 운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고통·절망·궁핍·그리움 같은 것들을 절절하게 느끼는 것이다. “시인이 눈물 100방울을 흘리며 절실하게 시를 써야 독자들은 눈물 한두 방울 흘릴까 말까”라고 했다.

곽씨는 2001년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됐다. 인도와 히말라야 고산지대를 자주 다니며 배의 기름기를 빼고 그곳의 순박한 삶에 대한 글도 쓴다. 올 가을 통일을 주제로 한 연작시가 포함된 여덟 번째 시집을 낸다.

신준봉 기자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시집 『사평역에서』,(1983,창비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