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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송호근 묻고 고은 답하다

금동원(琴東媛) 2014. 11. 19. 12:37

[직격 인터뷰] 송호근 묻고 고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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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 지구상 전체에 시가 필요하다, 시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함석헌 같은 사람은 시인이에요. 가령 조로아스터도, 마호메트도, 예수도 시인이에요. 소크라테스는 이론으로 설득을 했는데 예수는 느끼게 했어요. 시인이에요. 이런 시인이 앞으로는 세계 도처에 있어야 되겠다, 문학 장르로서의 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지금은 다 잊힌 시를 꺼내야 되겠다는 것이죠. 말씀처럼 시인이 필요합니다.

 송 : 이성적으로 분석하는 건 한계가 있고, 진실을 붙잡고 가기에는 너무 허전하고, 한국 사회가 지금 그런 것 아닌가 싶은데요. 더 많은 시인과 소설가, 더 많은 예술가가 필요한데, 우리는 감성과 감정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께 기대하고 사랑을 보내는 이유 아닐까요?

 고 : 사실은 감정이 말라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감정과 함께 태어나죠. 우리가 젖 먹고, 옹알이하고, 우는 거 이게 전부 감정의 행위 아닙니까. 감정은 영원합니다. 오히려 이성은 우리가 감정의 골짜기에서 이따금 찾아내는 보물 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성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감정과 이성은 둘이 갈라져 있는 대립 개념이 아니라 같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죠. 브로멜리아라는 식물은 잎사귀가 파란데, 끝은 붉어서 꽃이야. 어, 잎의 그 파란 녹색의 최고의 형식이 빨간 꽃이더라고. 상사화, 진달래, 개나리는 꽃과 잎이 이별인데 브로멜리아는 꽃과 잎의 미분별, 이게 좋더라고. 이성과 감성을 우리가 근대적인 개념으로 분류시키기보다 동양에, 동아시아에 와서 불명료한 원형성, 여기에 와서 그냥 섞어서 놀다가 이름을 다 포기하라고 하고 싶어요. 그럼 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댈 곳이 생기지 않을까 해요.

 

송 : 올해 동학 120주년입니다. 시인의 『만인보』는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위무일 수도 있고 초월의 시그널일 수도 있는데, 어떠세요? 동학 120주년에 감회는 없으세요?

 고 : 그것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동학의 숙제는 아직도 이게 미결이겠죠. 당시에는 농민이 실체였는데요, 지금은 시민이 실체가 되거든요. 시민 자체가 동학을 전혀 모르기에 자체적으로 동학적인 원소를 찾아내야 되지 않겠는가 여겨지네요. 그걸 기념하고, 그걸 잊히지 않게 하는 애도의 축제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산 자는 늘 죽은 자에 대해 강력한 중생의 의무가 있으니까요. 나 자신이 벌써 근대 문학의 먼저 간 선배들, 만해·김소월 또는 이육사, 나는 이육사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합니다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늘 가슴에 담고 있습니다. 애도의 심정을 가지고 있죠. 이제 우리 시민 속에서 새로운 동학적인 어떤 역사 조건 이런 것을 찾아야 하지요.

 송 : 전적으로 동감하는데, 120주년이면 두 갑자를 지낸 것 아니겠어요. 환갑 두 번인데, 1960년대가 한 번이고, 지금쯤 변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땐 농민이었지만 지금은 시민이다, 저는 그 말씀이 정말 귀중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에 대해 그게 정의가 됐건, 뭐가 됐건 목숨을 걸고 얘기를 한 거죠. 지금은 시민으로서 뭔가 말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게 계승하는 거 아닌가요?

 

고 : 그런데요, 시민은 여러 가지 색깔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여기 인터넷에서 떠드는 것 보면 여러 가지의 발언을 하지 않습니까. 참 놀라운데, 또 무서운 것은 그것에 반응하는 댓글입니다. 그게 정말 품질이 낮은 악질적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것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주 깨끗하고 창조적인 언어들이, 정말 자발적이고 봉선화 같은 언어들이 이런 무서운, 음흉한, 정말 더러운, 추악한, 범죄적인 언어들을 스스로 정화시키는 사회 기반이 필요합니다. 시민의 힘, 역사 동력 이런 것, 새로운 동학의 시민화, 이런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참 좋은 지적입니다.

 송 : 네. 우리가 주목했던 거는 농민으로서 세상에 대해 어떤 대적 의식을 갖고 나타났는가, 어떻게 역사에 접속했는가 이 점 아니겠어요. 지금 시민들은 역사에 접속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사의 그 여러 가지 단점을 정말 예민하게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될 것 같아요. 그거야말로 계승하는 거겠죠. 말씀하신 대로 시민 언어, 시민 의식을 우리가 깊이 새기고 있는가, 세월호 사태가 묻는 게 이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 : 사실 농민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농민에게는 논리가 없죠. 다만 자연이 있죠.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키워내고, 가을에 걷는 이런 천기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았는데 그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은 정말 비논리적인 어떤 경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경륜이 하나의 종합을 이룰 때 하나의 정치 행위로서 동학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역사 행위보다 자연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시민은 자연 행위가 아닙니다. 시민은 근대라고 하는, 아파트라고 하는 기반에서 살고 있고, 또 거리와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전화를 하고 이런 시설이 있죠. 이런 데서 산 사람들이 그 자연의 햇빛이나 별빛이나 이런 것에서 얻는 강한 경륜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그 부르주아가 갖는 자기들 사유의 관성, 이 관성이 내가 볼 때는 매우 피지배적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혁명은 쉽지 않습니다. 시민, 우리가, 이 지식인들이 말하는 이 부르주아나 시민들 속에서 뭔가 새로운 역사 동력이 나온다는 것, 이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농민의 그 비논리적인 데서 비약할 때 나오는 것이지요. 무차별적으로 이기주의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역사라고 하는 공적인 임무, 쉽지 않죠. 그래서 시민사회가 오히려 농민보다 역사 행위는 더 쉽지 않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다만 인터넷에서 서로 만납니다. 조우하지요. 하, 내 고백, 네 고백, 이것이 앞으로 정치 행위로 될 때는 정말 창조적인 폭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송 : 농민의 인식이란 생태적인 거죠. 시민 의식은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거죠. 이 차이가 있겠네요. 이 차이에서 어떻게 역사와 선사와 접속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로 풀어야 될 것 같은데요.

 고 : 잃어버릴 거 잃어버리고, 정말 이 내 가슴의 심장도 잃어버리고, 췌장도 잃어버리고, 그냥 무슨 해골처럼 이렇게 형해화돼 있다가 정말 여기에 필요하면 태양이나 달이, 별이 나에게 꿈도 주고, 나에게 어떤 이데아도 주고, 그거예요. 나는 그렇게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살고 싶어요. 뭘 가둡니까. 역사 속에 무슨 가치를.

 송 : 그게 그 기쁨에 사는 건지요?

 고 : 슬픔이라는 것은 항시 기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 언어를 만든 게요, 슬픔기쁨, 또 기쁨과 슬픔 그래서 깁슬픔, 그렇게 언어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두 개는 하나예요. 정말 황홀한 경치가 앞에 있을 때는 슬프거든요. 내가 옛날에 ‘아름다움은 슬픔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설교하고 미사하실 때 인용하고 그랬었죠.

 송 : 지금 한국 사회의 그 결핍증을 깁슬픔 속에서 승화해낼 수 있다 이건가요?

 고 : 조지훈 선생이 왜 우리 문화사를 정리할 때 최초는 힘의 예술, 나중에는 슬픔의 예술이라 했는데, 이게 근대까지 온 것이죠. 우리가 한(恨)이 많지요. 이후 우리 한국은 이 한을 넘어서 흥(興), 흥(興), 신명이 나가지고 했는데 그런 것이 경제적으로는 현대, 삼성으로 나타나고, 또 저기 울산에선 큰 배 만들고 그랬다가 이제 조금 꺾여가지 않습니까, 중국에 의해서. 이럴 때 우리가 흥을, 지났던 흥을 어떻게 다시 붙잡아서 이 한 번으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이게 아마 역사 행위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송 : 아, 그거야말로 현재의 위기감과 안절부절 상태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에게 줘야 될 시인의 말씀 같아요.

 고 : 주어진 조건은 우리가 다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조선 후기에 타자와 자기, 이 두 원인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왜놈의 위협이 절대 조건으로만 된 게 아닙니다. 내외 조건이 하나의 조건을 완성하는 것인데, 우리가 앞으로 이런 조건을 생각할 때, 아, 정말 우리는 신나게 나갔는데, 달리기할 때는 지치지 않습니까. 쉴 때 와서 감기 들지 않습니까. 그때는 병을 앓아야죠. 다른 약을 해가지고 병을 무시하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병을 앓고 다시 또 달려야죠. 우리 시대로써 우리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 않고, 그냥 우리는 도상에 있는 과객, 이백의 말대로 과객입니다. 그전에는 한(恨), 지금은 흥(興)이었는데, 이 위기의 시대에 한과 흥을 종합해가지고 한 번 나가보자는 거죠.

* 인터뷰(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중앙일보 (2014.11.19) 오피니언 직격인터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