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瑜離), 언어
이기철
한밤내 언어가 기폭처럼 나부끼고
사상이 선박처럼 육체를 출렁일 때
나는 아직도 내 앞에서
노래부를 수 있는 날들이 남아 있음을 찬탄한다
흔들리는 나무는 무언이 그 언어이듯
벌레들과 짐승들은 단음의 울음이 그 언어이듯
침묵의 산, 침묵의 들판은 정적이 그 언어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숲에 들 때 나무의 무언을 듣고
우리가 산에 들 때 그 정적에 귀기울린다
삶을 사랑한 사람들 유리에 닿은 흔적을
일찍 내린 이슬의 투명으로 배울 때
백년 생애를 헝겊처럼 접어 동풍 속에 집어던진 사람의 마음
들을 건너는 바람의 잎새 스치는 소리로 깨닫는다
오늘 저 들판의 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오늘 저 초록들은 얼마나 계절 속으로 깊어졌는지를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인 나무들의 무언 아니면
아무도 말해줄 수 없다
숭엄한 예언들과 금언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일생보다
말없이 삶을 가꾸고 간 사람들의 생애가 거룩함을
무구한 바람의 노래 아니면 아무도 들려줄 수 없다
형용할 수 없는 색신의 옷을 입은
말의 영혼이여
내 못 가본 나라의 뜨락은 편안한가
내 못 만난 사람들의 오늘 아침 식탁은 풍성한가
내 영혼의 열대, 유리 언어여
오늘은 나로 하여 침묵의 산을 찔러 피 흘리게 하라
오늘은 들판의 가슴을 찔러 그 무심을 아우성치게 하라
저 허장성세의 왕릉을 허물고
낮은 곳에 누운 영혼의 무덤들을 끓어 오르게 하라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낙타는 있어도
모래알 하나에 담긴 우주를 꿰뚫어본 사람 어디에도 없다
-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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