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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유리(瑜離), 언어/ 이기철

금동원(琴東媛) 2015. 10. 16. 06:11

 

 

 

유리(瑜離), 언어

 

이기철

 

 

한밤내 언어가 기폭처럼 나부끼고

사상이 선박처럼 육체를 출렁일 때

나는 아직도 내 앞에서

노래부를 수 있는 날들이 남아 있음을 찬탄한다

 

흔들리는 나무는 무언이 그 언어이듯

벌레들과 짐승들은 단음의 울음이 그 언어이듯

침묵의 산, 침묵의 들판은 정적이 그 언어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숲에 들 때 나무의 무언을 듣고

우리가 산에 들 때 그 정적에 귀기울린다

 

삶을 사랑한 사람들 유리에 닿은 흔적을

일찍 내린 이슬의 투명으로 배울 때

백년 생애를 헝겊처럼 접어 동풍 속에 집어던진 사람의 마음

들을 건너는 바람의 잎새 스치는 소리로 깨닫는다

 

오늘 저 들판의 꽃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오늘 저 초록들은 얼마나 계절 속으로 깊어졌는지를

이 세상 가장 청정한 언어인 나무들의 무언 아니면

아무도 말해줄 수 없다

숭엄한 예언들과 금언을 남기고 간 사람들의 일생보다

말없이 삶을 가꾸고 간 사람들의 생애가 거룩함을

무구한 바람의 노래 아니면 아무도 들려줄 수 없다

 

형용할 수 없는 색신의 옷을 입은

말의 영혼이여

내 못 가본 나라의 뜨락은 편안한가

내 못 만난 사람들의 오늘 아침 식탁은 풍성한가

 

내 영혼의 열대, 유리 언어여

오늘은 나로 하여 침묵의 산을 찔러 피 흘리게 하라

오늘은 들판의 가슴을 찔러 그 무심을 아우성치게 하라

저 허장성세의 왕릉을 허물고

낮은 곳에 누운 영혼의 무덤들을 끓어 오르게 하라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낙타는 있어도

모래알 하나에 담긴 우주를 꿰뚫어본 사람 어디에도 없다

 

 

-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시인선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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