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瑜璃)에 닿는 길 1
이기철
오척 단구를 용광로에 담그고
모발이 타고 살이 불붙는 소리를 들어라
물의 몸이 사라지고 뼈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어라
아무리 번쩍이는 날빛이라도
그것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면
광휘일 수 없다
아무리 고혹의 향기일지라도
그것이 매운 바람과 모진 추위를 이기고 온 것이 아니면
향기일 수 없다
저 염열(炎熱)과 갈증의 날들을 지나서 공허 뒤에 세우는
과육의 나라처럼
끓는 쇳물 뒤에 고요로 눕는 장검의 서슬처럼
찬란한 것은 모두 어둠 뒤에 있다
몸이 아는 불의 뜨거움, 몸이 아는 얼음의 차가움도 벗어놓고
가시에 찢기고 바늘에 찔려도 아프지 않은 마음으로
세상의 벼랑길 걸어갈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상처마저도 사랑한 삶을 살았다고 하리
수천의 기왓장으로 무성한 잎새들
땅으로 내려놓고
혼자 겨울을 버티는 나무처럼
모든 죄질들이 몸밖으로 빠져나가고 나면 그 때
내 생은 유리의 문전에 들었다고 하리
내 생애 단 한 번 불러보고 싶은 순수에게 신앙으로 바칠
내 마음의 유리,
정신의 보석
- 『유리의 나날』, (1998,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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