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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금동원(琴東媛) 2015. 12. 25. 20:23

헤세로 가는 길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저/이승원 사진

책속으로

 

* 외적인 필요에 조종당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이끄는 충동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초인의 삶. 일상과 예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 곧 예술이 되는 삶. 때로는 정열에 몸을 던져도 보고 때로는 방황에 몸을 던져도 보지만 결국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은둔하며 ‘세상의 시계’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시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 이것이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다.
아마도 이런 삶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작가가 바로 헤르만 헤세일 것이다. 헤세는 글을 쓰고 싶을 때는 글을 쓰고, 꽃과 나무가 그리울 때는 정원을 가꾸고, 날씨 좋은 날에는 산야를 헤매며 그림을 그리고, 방랑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때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억지로 떠나야 하는 ‘작가 낭독회’와 같은 의무적인 여행을 매우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 비자발적인 여행 속에서조차 방랑자의 꿈을 충족시켰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사물이 구름임을 알았다. 어떤 모양으로도 정형화될 수 없는 구름, 어떤 자리에서도 머물 수 없는 구름, 누구의 뜻대로도 조종당하지 않는 구름. 그런 구름이야말로 헤세의 영혼을 가장 닮은 자연의 천사였다.
----「프롤로그 나도 모르게 나의 치유자가 되어준 헤세를 그리며」중에서

* 미치기 직전인 사람, 미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미쳐보고 싶었던 사람, 미친 사람의 옆에 사느라 온전한 정신을 보전하기 힘든 사람, 모두 헤세로 가는 길로 오세요. 가끔은 미쳐도 괜찮습니다. 한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 때문에 제대로 미쳐보았던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쳐버리는 것이 예술의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던 바로 그 사람, 헤세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조국을 떠나 낯선 땅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40년 동안 칩거하다시피 하며 사랑과 예술과 참회와 희망을 노래했던 이 아름다운 영혼이 여러분을 향해 손짓합니다. 여러분을 이 상상의 공간, 문학의 공간, 치유의 공간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쓰고, 산책을 하고, 정원을 가꾸는 소박한 일상 속에서 위대한 예술의 가치를 창조한 한 작가의 삶이 우리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바로 그곳으로.
----「프롤로그 나도 모르게 나의 치유자가 되어준 헤세를 그리며」중에서

* 기차로 칼프 역에 가려면 ‘문화기차’라는 앙증맞은 두 량짜리 기차를 타야 한다. 이 기차 안 풍경은 우리네 옛 기차처럼 무척 정겹다. 오순도순 도시락을 까먹는 연인들, 담배를 꺼내려다가 승무원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집어넣는 아저씨, 그 작은 기차 안을 숨바꼭질 정글로 활용하는 장난꾸러기 꼬맹이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저마다의 소풍 장소를 향해 달려간다. 문화기차가 스쳐가는 역들은 하나같이 아담하고 예스럽다. 나는 내 마음속 오랜 그리움의 뿌리, 헤세를 만나러 간다.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중에서

* 어떤 도시는 아무리 ‘환영합니다!’라는 표현이 곳곳에 도배되어 있을지라도 왠지 살갑게 안기지 않는다. 반면 ‘환영합니다!’ 같은 의례적인 포스터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수줍고 무뚝뚝한 느낌으로 ‘자네, 왔나?’ 하고 넌지시 묻는 듯한 다정한 도시도 있다. 내게는 칼프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헤르만 헤세를 똑같이 닮지는 않았지만, 정겹고 곰살궂은 느낌을 주는 헤세의 동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네, 이제야 왔는가. 10년 전부터 ‘와야지, 와야지’ 하더니 이제야 왔구먼.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중에서

* 헤르만 헤세는 여행광이자 독서광이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책 속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책 자체가 궁극의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책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에 가깝다. 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는 다정한 질문 기계, 그것이 책이다.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어떤 책도 당신에게 곧바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책은 살며시 당신을 자기 내면으로 되돌아가게 한다고.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책은 그런 우리 마음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중에서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내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여러 번 읽은 작품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던 이 작품 속에는 해맑은 위로를 담은 문장이 가득하다. “세상은 죽음과 공포로 가득하니 나는 이 지옥 한가운데에서 자라는 꽃들을 집어 계속해서 내 마음을 위로하겠습니다.” 이 지옥 한가운데서 자라는 꽃, 희망과 사랑의 흔적을 찾아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중에서

* 우울증에 시달리던 헤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만은 온갖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헤세는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수채화를 제일 예쁘게 그린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자부심에 넘쳤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에는 슬픔과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을 때가 많지만, 그의 그림에는 늘 명랑하면서도 해맑은 기운, 삶을 사랑하는 자의 여유 같은 것이 묻어 있다.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중에서

* 헤세의 고향을 찾아 칼프로 떠나도 좋을 것이다. 헤세의 묘지와 헤세의 정원을 찾아 몬타뇰라로 떠나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헤세로 가는 길’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열려 있다. 당신이 헤세의 책을 읽는다면, 당신이 헤세의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산문을 읽는다면, 헤세는 항상 당신 곁에 있어줄 것이다. 우리가 책갈피를 소중히 넘기는 순간, 헤세로 가는 길은 우리의 마음속에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헤세가 태어난 곳, 칼프로] 중에서

* 내 마음속의 아주 은밀한 보물들을 헤아려보는 몽상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밤이 있다. 나 역시 나의 글쓰기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를 지켜주는 것들’의 목록을 떠올리면 엄청난 마음의 부자처럼 느껴진다. 조금 부족해도, 조금 엉뚱한 짓을 해도, 언제나 내 숨겨진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결코 두렵지 않다.
헤세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작품들 중 몇몇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혹평을 받으면 오히려 ‘은밀한 기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작품 중 몇몇이 혹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헤세 스스로에게는 은밀한 자랑, 숨은 기쁨이었다고. 헤세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은 ‘나만의 정원’이지 모두가 산책할 수 있는 공공의 정원은 아니라고. 그는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그 소수의 작품들을 자기만의 정원처럼 홀로 산책하고 싶어 했다.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중에서

* 헤르만 헤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재’의 정의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천재란 사랑할 줄 아는 힘이고, 온몸을 바치고 싶다고 갈망하는 마음이라고. 그에게 천재와 영웅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이 된다. 헤세는 말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정말로 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이라고.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중에서

* 나는 서울에서 뮌헨으로, 뮌헨에서 칼프로, 취리히에서 루가노로, 루가노에서 몬타뇰라에 이르는 헤세 루트를 마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힘겨운 여행일수록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것을. 아름다운 여행의 이미지는 여행이 끝난 후에도, 영화필름처럼 마음속에서 언제든 돌려 볼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내 마음의 헤세 루트’를 더욱 꼼꼼히 완성한다며 『싯다르타』의
영감이 된 인도까지 다녀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또 헤세냐?’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헤세를 읽을수록 헤세의 작품 속 공간들은 더욱 해맑은 설렘의 빛깔로 나를 유혹한다. 지극히 사적인 나만의 헤세 루트가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내 마음의 방랑이 끝나지 않는 한, 나는 별별 핑계를 갖다 붙이며 또 다른 헤세 루트를 창안해낼 것이다.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중에서

* 헤세의 세 번째 아내 니논은 뛰어난 미술사학자이자 여행광이었다. 헤세를 몬타뇰라에 남겨둔 채 홀로 몇 달씩 여행을 떠나 그를 시무룩하게 만들었던 그녀는 커다란 박물관과 도서관이 즐비한 런던이나 비엔나 같은 대도시에서 살고 싶어 했다. 니논은 파리의 샹젤리제를 거닐며 헤세와 쇼핑도 하고 오페라도 구경하고 싶어 했지만 헤세는 떠들썩한 여행을 싫어했다. 젊었을 때 걸핏하면 가족을 버리고 혼자 여행을 떠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베르누이를 힘들게 하더니, 만년에 자기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부인의 방랑벽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것이다. 헤세가 세상을 떠나자 니논은 그토록 도망치고 싶어 했던 몬타뇰라가 제2의 고향이 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골목길 구석구석, 산자락 하나하나, 나뭇가지들과 꽃들까지도 모두 헤세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몬타뇰라를 그녀는 결코 떠날 수 없었다.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중에서

* 헤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니논이 혼자 여행을 떠날 때마다 헤세는 외로움과 섭섭함을 느꼈지만, 두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도 늘 두 사람을 이어주던 ‘편지’가 있었다. 헤세는 아들 마르틴에게 니논이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니논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고. 정말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무리 멀리 떠나도 괜찮다. 언젠가, 당신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헤세가 잠든 곳, 몬타뇰라로] 중에서



 책 소개 

  헤세가 기다리는 문학의 공간, 치유의 공간으로의 초대,
  세상의 시계가 아닌, ‘내 마음의 시계’로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는 첫 경험의 이름이다. 인생의 첫 사랑과 방황과 슬픔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이다. 헤세의 ‘데미안’은 지금도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의 멘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 문장을 낳은『데미안』(1917)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독일 소설로 꼽히며 더 크고 깊어진 사랑을 받고 있다. 시인, 소설가, 화가로 구도자적 삶을 살았던 헤르만 헤세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걸었던 길 위의 깨달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자연의 고요한 치유력에 대한 예찬은 매순간 점점 더 다급한 일상의 쫓김을 견디고 버텨야 하는 우리에게 지금 더욱 절실해진 메시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서재』『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의 베스트셀러로 독자들과 문학을 통한 마음여행을 함께해온 작가 정여울이 헤르만 헤세를 다시 찾아가는 특별한 여행을 떠난다.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신기하게도 내 손에는 헤르만 헤세의 책들이 쥐어져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헤맬 때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있었고,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때는 『데미안』을 읽고 있었으며, 내게는 도무지 창조적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가슴앓이를 할 때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있었다. 의미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아 가슴이 시려올 때는 『싯다르타』를 읽고 있었으며, 내 안의 깊은 허무와 맞서 싸워야 할 때는 『황야의 이리』를 읽고 있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지만, 내가 살아온 ‘무의식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어쩌면 아름다운 필연이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상처 입은 자만이 진실로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르만 헤세는 스스로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였기에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고 따스한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었다. 이제 내가 헤르만 헤세에게 받은 치유의 에너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헤세로 가는 길』은 정여울이 오랜 시간, 깊이 읽어온 헤르만 헤세의 작품과 세계로 독자들을 새롭게 초대하는 책이다. 헤르만 헤세가 태어난 도시 칼프와 그가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며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마침내 구원을 찾고 잠든 도시 몬타뇰라로 떠났던 여행에서 발견한 ‘진리여행자’헤세의 깨우침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의 기술, 행복의 기술로 읽어주는 문학기행이다. ‘진리여행자’ 헤세와 ‘마음여행자’ 정여울이 시공을 초월해 나누는 문학적 대화 속에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헤세의 얼굴,“한때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 때문에 제대로 미쳐보았던 사람” 헤르만 헤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내면이 이끄는 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삶, 일상이 예술이 되는 삶, 세상의 시계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시계로 살아가는 삶, 아마도 이런 삶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던 작가가 바로 헤르만 헤세일 것이다. 헤세는 글을 쓰고 싶을 때는 글을 쓰고, 꽃과 나무가 그리울 때는 정원을 가꾸고, 날씨 좋은 날에는 산야를 헤매며 그림을 그리고, 방랑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때면 여행을 떠났다.”(정여울)

  자신의 삶을 이야기의 장작불로 피워 우리 곁에서 영원한 빛이 되어주는 작가 헤르만 헤세가 지독한 인간적 번민과 갈등을, 자연을 벗 삼은 초월의지로 극복하고 도달한 마음의 안식, ‘나’다운 나로 살아갈 때 얻게 되는 치유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모든 사람은 단순히 한 사람 이상의 존재다. 유일하고 매우 특별하며 언제나 의미 있는 존재, 세상의 여러 현상이 교차하는, 단 한 번뿐이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지점이다.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며, 신성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살아가며 자연의 뜻을 이루는 한 모든 사람은 경이로운 존재이며 깊이 사고해야 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다.”(『데미안』 중에서)

[책 속으로] 왜 헤르만 헤세인가, 그의 자취를 찾아서

  중앙일보 | 중앙일보의 백성호 기자 | 2015-05-16

  저자는 고백한다.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신기하게도 그의 손에는 책이 쥐어져 있었다고. 입시 지옥에선 『수레바퀴 아래서』,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는 『데미안』, 창조적 재능이 없는 것 같아 가슴앓이 할 때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의미 없이 나이만 먹는 것 같을 때는 『싯다르타』, 내 안의 깊은 허무와 싸워야 할 때는 『황야의 이리』를 읽었다.

  이 모두가 헤르만 헤세의 책이다. 자기 삶의 궤도가 헤세의 작품과 겹치는 게 저자는 전적인 우연임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필연’이라 믿는다. 그래서 떠났다. 헤세가 태어난 도시 칼프와 그가 잠든 도시 몬타뇰라, 그 사이에 찍혀 있는 헤세의 숱한 발자국을 ‘문학 기행’이란 이름으로 좇아간다.

  조그만 도시 칼프에서 만난 헤세의 정겹고 곰살궂은 동상. 저자는 그 앞에서 헤세의 속삭임을 침묵으로 듣는다. “자네, 이제야 왔는가. 10년 전부터 ‘와야지, 와야지’하더니 이제야 왔구먼.” 오랜 그리움과 오랜 기다림. 그 끝에 묻어나는 저자의 간절함이 독자와 헤세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책의 중간중간 매복한 헤세의 명언과 현지에서 찍은 사진이 독자에게 여행감을 선사한다. 저자는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헤세는 현자였다며, 그런 무심함을 닮고 싶다고 말한다.

정여울과 함께 헤세에게 가는 길

  한겨레 | 한겨레의 신승근 기자 | 2015-05-07

 “미치기 직전인 사람, 미쳐보고 싶었던 사람, 모두 헤세로 가는 길로 오세요.”
  [마음의 서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등의 책으로 문학을 통한 마음여행을 지속해온 작가 정여울이 ‘삶이 힘겹다고 느껴질 때마다’ 손에 쥐고 읽었다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로 치유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가끔 미쳐도 괜찮습니다”라고 외치는 정 작가는 퇴학과 자살 시도, 오랜 방황 끝에 대문호가 됐지만 조국 독일에 버림받고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 40년 동안 칩거하다시피 살다 간 헤세의 삶을 그의 소설과 시에서 ‘추출’한 글과 함께 풀어낸다.
“헤세는 ‘홀로’라는 시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인생의 길은 말을 타고 갈 수도, 자동차로 갈 수도, 둘이서나 셋이서 갈 수도 있지만 마지막 한 걸음만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아무리 힘겨운 일이라도 혼자서 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지혜라고. 내가 헤세에게 배운 것도 바로 ‘홀로 있을 때 가장 용감해지는 길’이었다.” 헤세가 태어난 독일의 칼프, 젊은 시절 여행한 이탈리아의 아시시,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의탁한 스위스 몬타뇰라의 풍경을 담은 100장의 사진과 함께 속삭이듯 들려주는 이런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영혼에 잔잔한 울림과 위안이 전해진다.
또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싯다르타] 등 그의 대표작 속 주인공의 삶을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과 버무려 맛깔나게 분석한다.

 

 

정여울 작가, ‘헤세 씨,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YES24X민음사 세계문학 고전학교 9월 강연

 

 『헤세로 가는 길』의 정여울 작가가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을 공개했다. 헤세가 작품 속에 감춰놓은 깨달음을 발견하려면 세 개의 열쇠가 필요했다. 아니마와 그림자, 로고스와 에로스가 그것이다.

글ㆍ사진 | 임나리

 

『데미안』의 에바 부인은 ‘해탈의 존재’


  지난 22일, 헤르만 헤세가 한국의 독자들과 만났다. 예스24와 민음사가 함께하는 ‘2015 세계문학 고전학교’의 주인공으로 초대된 것. 그의 곁에는 최근 『헤세로 가는 길』을 집필한 정여울 작가가 있었다. 독일의 칼프에서 스위스의 몬타뇰라까지, 헤세를 만나기 위해 떠났던 그녀가 자신의 여정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한 목소리로 헤세에게 물었다. ‘헤세 씨,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정여울 작가는 『헤세로 가는 길』이 기억하고 있는 헤세의 시간들을 되짚었다. 그가 태어난 작은 마을 칼프로 가는 길목, 작품의 영감을 얻었던 이탈리아의 아시시 지역, 생가와 친필 편지… 『헤세로 가는 길』 위를 거닐며 독자들도 한층 헤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여울 작가가 들려주는 깨달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헤세의 깨달음으로 가는 첫 번째 키워드로, 융이 이야기한 ‘아니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마는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이에요. 남성이 꿈꾸는 이상형인데, 연애의 대상으로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이상향으로써의 여성상이에요. 이 아니마는 문학작품에서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나오는데, 이브처럼 유혹적인 팜므파탈로 등장하기도 해요. 『황양의 이리』에서 마리아나 헤르미네 같은 인물이 그런 역할을 하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리즈베트와 『수레바퀴 아래서』의 엠마 같은 경우도 새로운 세계로 유혹하는 이브로서의 아니마를 상징하고요. 여성에게는 반대로 아니무스라고 하는데요. 상대적으로 아니무스는 지배와 권력에 관계된 욕망이라면, 아니마의 핵심은 공감이에요. 배려와 존중을 기반으로 한 통합과 연대를 의미하죠. 아니마라는 것은 헤세와 융 모두에게 핵심적인 주제인 것 같아요.”

 

  『데미안』의 에바 부인 역시 싱클레어를 세상 너머로 인도하는 아니마다. 동시에 그녀는 “깨달음의 궁극적인 해탈의 경지를 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등 헤세의 소설에서는 대부분 아니마로서의 여성상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정여울 작가는 “헤세의 작품에는 항상 깨달음의 매개체로써의 여성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많은 독자 분들이 싱클레어가 에바 부인을 연인으로서 좋아한 건지 궁금해 하시는데요. 싱클레어의 감정은 그걸 뛰어넘는 거죠. 에바 부인은 이 세계 너머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싱클레어가 깨달음의 경계를 뛰어넘기를 바란 것 같아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어머니를 계속 강조하잖아요. 영원한 어머니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거든요. 이것도 생물학적인 어머니를 뜻하는 게 아니죠. 그걸 넘어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의미하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다가가야 할 해탈의 차원으로써의 근원이죠. 대부분 헤세의 소설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과 깨달음을 주는 철학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함께 등장해요. 때로는 한 인물이 두 가지 역할을 모두 할 때가 있는데 『황야의 이리』의 헤르미네 같은 인물이 그렇죠.”

 
  나 자신이 되는 길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헤세의 작품에서 깨달음을 발견하는 두 번째 열쇠는 ‘로고스와 에로스의 대립’이다. 특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두 주인공은 상반된 두 가치가 대극의 통합을 이루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르치스는 깨달음의 표상이죠. 항상 골드문트에게 도움을 주는 구원자 같은 존재예요. 그런데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 관계가 역전돼요. 그게 바로 이 소설의 묘미인데요. 로고스가 계속 우위에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에로스를 상징하는 골드문트가 자신도 모르게 나르치스에게 깨달음을 주는 거예요. 골드문트의 임종을 지키면서 나르치스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내가 만약 사랑이란 걸 안다면 그건 바로 너 때문일 거야’라고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의 결핍이거든요. 나르치스는 감성적인 부분이 부족하고 골드문트는 철학적인 부분이나 절제가 부족한 사람이죠. 골드문트가 없었다면 나르치스는 평생 에로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걸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항상 자신은 골드문트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골드문트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는 걸, 골드문트가 없었다면 자신은 사랑의 가치를 전혀 몰랐을 거라는 걸 깨닫는 거죠. 그 순간이 굉장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 같아요. 이런 걸 융 심리학에서는 ‘대극의 통합’이라고 하잖아요. 가장 반대되는 것이 서로 통한다는 거죠.”

 

  실제로 헤세는 융의 연구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융의 제자로부터 정신 분석을 받았고, 융의 조언으로 우울증 치료를 위해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헤세가 융의 관점을 전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융에게서 시작된 개념들이 헤세의 작품 속에 녹아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여울 작가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그녀에게 그림자는 외면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화해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화해에서 깨달음은 시작된다.

 

  “융은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의식의 친구로 만들어야 된다고 봤어요. 헤세도 융을 알기 전에는 그림자를 억압하고 있었거든요. 마치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요. 싱클레어는 크로머가 자기 안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만드니까 자꾸만 피하잖아요. 끊임없이 내 안의 어둠을 억압하고 회피하려고 하죠. 물론 이러한 방어기제는 일차적인 충동이에요. 하지만 융은 그걸 뛰어넘어서 그림자와 소통해야 진정한 의미의 개성화가 가능하다고 말했어요. 개성화는 정신적인 완성이에요. 『데미안』에 그런 구절이 있죠. ‘나는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로 나다워지고 싶었는데, 그 길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라는 구절이요. 그게 바로 개성화예요. 진정한 나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이죠.”

 

  융은 이야기했다. 개성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를 해야 한다고. 그러나 자신의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자를 끌어안기란 쉽지 않다. 융이 말했듯 그림자와 소통하려면, 그 결과 궁극적으로 함께 춤을 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헤세 역시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융은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해야 된다고 말했어요. 그래야만 궁극적인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림자와 소통하고 마침내 그림자와 춤을 출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그림자를 이해해야 하잖아요. 헤세의 작품도 끊임없이 그림자를 탐구하거든요. 『황야의 이리』에서는 전쟁의 폭력을 탐구했고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끊임없이 자기 안의 어둠과 싸우는 인물들을 보여줬어요. 그림자를 깨닫는 것 자체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실 그림자라는 것은 욕망의 대가거든요. 그림자는 욕망이라는 빛이 드리우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욕망 자체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한다면 내가 누구인지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결국 개성화는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깨달음으로써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거죠. 그게 깨달음의 궁극적인 길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관련 도서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저/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헤르만 헤세’는 첫 경험의 이름이다. 인생의 첫 사랑과 방황과 슬픔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이다. 헤세의 ‘데미안’은 지금도 우리가 가장 먼저 만나는 삶의 멘토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 문장을 낳은『데미안』(1917)은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독일 소설로 꼽히며 더 크고 깊어진 사랑을 받고 있다. 시인, 소설가, 화가로 구도자적 삶을 살았던 헤르만 헤세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걸었던 길 위의 깨달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와 자연의 고요한 치유력에 대한 예찬은 매순간 점점 더 다급한 일상의 쫓김을 견디고 버텨야 하는 우리에게 지금 더욱 절실해진 메시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저/전영애 역 | 민음사 | 원서 : Demian

데미안을 통해 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이야기.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쳐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세밀하고 지적인 문장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진저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깊이 있는 이야기.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역 | 민음사 | 원제 : Unterm Rad

헤세 자신의 자전적 소설. 민감한 정신의 소유자이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어린 신학도 한스 기벤라트는 헤세의 분신이다. 그가 엄격한 신학교의 규율을 이겨내지 못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학교에서 쫓겨난 점, 작은 고향 도시로 돌아와 공장의 견습공으로 새로운 삶을 열어보려 했던 시도 등은 헤세의 우울한 청소년기와 겹치는 장면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헤세가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하여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예술로 승화시킨 반면 한스는 엄격하고 딱딱한 집안 분위기, 그에 버금가는 학교 교육 및 사회의 전통과 권위에 눌려 파멸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랬을 때 "수레바퀴 아래서"란 비유적 표현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세계의 톱니에 짓눌린 여린 영혼을 떠올릴 수 있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저/박병덕 역 | 민음사 | 원서 : Siddhartha

이 소설은 행동을 전환시킬 만한 강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고, 긴장이나 자극이 거의 없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자서전적이며 세계관과 삶에 대한 철학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싯다르타》는 세계와의 평화를 찾고자 하는 헤세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즉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헤세의 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단계에 해당된다. 특히 동양철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 문학에 있어서도 독특한 작품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저/임홍배 역 | 민음사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로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눈 사랑과 우정, 이상과 갈등, 방황과 동경 등 인간의 성장기 체험을 아름답고 순순하게 그려낸 소설로, 『데미안』과 더불어 헤세의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작가 자신의 삶의 체험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젊은 시절 그의 영혼을 뒤흔들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헤세는 불완전한 인간이자 방황과 방랑, 예술에 대한 동경, 여성적인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끊임없이 낯선 세계에 부딪히는 청년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의 성장기 체험을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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