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2015), 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이준익 감독/ 강하늘, 박정만
서시(序詩)를 찾아서
금동원
그리움을 위하여 남겨둔 눈물이 있다면
거울 속에 비친 사나이를 위해 기다려다오
가슴 속 깊이 감춰 둔 회한이 클수록
발걸음은 자꾸 조급해지고
이미 사라져 버린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의 감옥소,
스물여덟 푸른 청년의 혈기와 비애로 가득한
슬픈 영혼의 통곡만 이국의 하늘을 떠돌고 있네
하늘과 바람과 별처럼 한 점 부끄럼 없는 짧은 일생
교토의 동지사대학에서도
시간을 지나 유유히 흘러가는 압천(押川)에 서서도
치욕을 아는 진정한 지성인 윤동주의 숨결을 느끼며
우물에 비친 그의 자화상에 명복을 비네
조국을 위하여 마련한 뜨거운 열정이 있다면
거울 속에 비친 사나이를 향해 노래해다오
- 『여름낙엽』,( 2008, 월간문학출판부)
<영화 줄거리>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 시대.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갑내기 사촌지간 동주와 몽규.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두 사람.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 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암흑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제작노트
[ About Movie ]
윤동주 시인 서거 71주기, 시보다 더 찬란했던 그의 청춘을 대한민국 최초로 스크린에서 만난다!
영화 <동주>는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시인의 꿈을 품고 살다 간 윤동주의 청년 시절을 정직하게 그리고 있다. <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던 이준익 감독의 의문에서 출발했다. 윤동주의 시가 어떤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온전히 스크린에 담고 싶었던 이준익 감독의 바람은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 <조류인간>, <배우는 배우다> 등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맡으면서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것은 죽어서야 시인이 될 수 있었던 윤동주의 삶, 그 자체였다. 특히 신연식 감독은 "윤동주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시인이 되지 못한 청춘이었다. 동시대에 인정 받지 못하고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시가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며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다수의 시인 중 유독 윤동주의 삶에 이끌렸던 이유를 전했다. 이후 무언가 이루고 싶었지만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젊은이, 청년 윤동주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던 두 사람은 그의 삶을 따라 가며 청년 ‘동주’의 작품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주목했다. 그리고 정들었던 고향을 떠날 때와 창씨 개명을 선택해야만 했던 연희전문학교 시절 등 ‘동주’의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들과 맞물리는 시들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며 그의 작품이 더욱 가슴 깊이 남을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영화사상 최초로 시인 윤동주의 삶을 스크린에 옮겨내며 "윤동주 시인의 시에 부끄럽지 않게 찍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준익 감독의 굳건한 포부처럼 영화 <동주>는 화려한 기교나 과장 없이 진실하고 정직한 이야기로 관객들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왕의 남자>, <사도>에 이어 <동주>까지!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이준익 감독의 빛나는 도전! <왕의 남자>로 대한민국 최초 사극 천만 영화의 신화를 써낸 것은 물론 <황산벌>, <라디오스타>, <님은 먼 곳에>, <소원>, <사도>에 이르기까지 사극과 현대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충무로의 거장 이준익 감독. 어떤 시대의 영화를 그리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과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세심한 연출력을 보여줬던 그가1945년 미완의 청춘으로 남은 두 청년 ‘동주’와 ‘몽규’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사극으로 이미 충무로에서 정평이 나 있는 이준익 감독에게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평생을 함께 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 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이준익 감독은 “28세에 삶을 마감한 신념 가득했던 아름다운 청년의 이야기가 나이 많은 이들에게는 식지 않는 청춘으로 가슴에 남아 있길 바라고,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갔는지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큰 가치를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빛나던 미완의 청춘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강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할 이준익 감독의 열한 번째 연출작 <동주>는 2016년 2월, 오늘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그 어느 영화보다 깊은 울림과 여운을 선사할 예정이다.
2016년 청춘을 대표하는 얼굴, 강하늘X박정민,
1945년 꿈 많았던 스물 여덟, 청년 ‘동주’와 ‘몽규’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나다!
젊은 패기와 열정을 가진 두 배우 강하늘, 박정민이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속 청춘의 자화상을 그려내기 위해 71년 전으로 뛰어 들었다.
영화 <쎄씨봉>, <스물>부터 드라마 [미생], [상속자들]에 이어 최근에는 tvN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뜨거운 청춘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강하늘. “세대와 시대를 아우르는 윤동주 시인의 감성에 어떤 힘이 있는지 보고 싶었고 그 부분을 배우로서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는 강하늘은 촬영 전부터 윤동주의 시집과 관련 서적을 읽은 것은 물론, 익숙지 않은 일본어와 북간도 사투리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사에 감정을 담기 위해서 외우는 게 먼저였다. 냉장고 앞에 대사를 붙여 놓고 일본어와 사투리 대사를 외웠다”고 할 정도로 치열한 연습 과정을 거쳤으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점점 수척해지는 ‘동주’를 표현하고자 혹독한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또한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강제로 머리카락이 잘리는 장면에서 실제로 삭발을 자처한 것은 물론, 극중 시를 쓰는 모든 장면에서도 실제 본인이 직접 글씨를 쓰는 등 내면과 외면까지 ‘동주’에 완벽하게 빠져들었다. “매 순간 강하늘은 ‘동주’였다”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강하늘의 연기는 영화 <동주>를 통해 가슴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영화 <파수꾼>, <오피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해온 박정민은 윤동주 시인의 고종사촌이며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몽규’로 변신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작품에 매료된 박정민은 홀로 중국 용정에 있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가를 찾아갈 정도로 캐릭터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의를 보였고, 덕분에 더욱 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박정민은 “나 역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주변을 개의치 않고 하는 편이다. 그런 점이 시대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자신의 뜻을 이뤄나가려는 ‘몽규’와 닮았다”며 그가 보여줄 인물 송몽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고향에서의 연설 씬과 일본에서 유학생을 모아놓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은 박정민의 피나는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물. 입에 붙지 않는 북간도 사투리로 긴 연설을 해야 했던 박정민은 감정의 결까지 살려낸 대사로 씬의 완성도를 높인 것은 물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부모님을 만나는 장면을 앞두고는 이틀 전부터 밥과 물을 전혀 먹지 않으며 기력이 쇠해진 ‘몽규’로 완벽히 몰입해 그의 연기를 본 이준익 감독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청춘을 살고 있는 배우 강하늘과 박정민, 온 몸으로 1945년과 교감한 두 청년이 빚어 낼 환상의 시너지에 벌써부터 영화계 안팎의 기대가 쏟아지고 있다.
시 하나에 추억과, 시 하나에 사랑과, 하나에 쓸쓸함을 녹여내다!
강하늘의 담백한 목소리로 만나는 윤동주 시인의 아름다운 작품들!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스크린에 옮겨오는 작업에 있어 그의 시를 온전하게 담아내는 것 또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준익 감독은 시와 영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들려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강하늘의 담백한 목소리가 덧입혀진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은 영화 속 ‘동주’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과 맞물린다.
‘동주’가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길]은 그들의 앞날을 예견케 하며, ‘동주’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여진’과 나란히 밤길을 걸을 때는 [별 헤는 밤]으로 두 사람 사이의 풋풋한 감성을 더한다.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한 후 읊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참회록]의 구절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던 청년 ‘동주’의 고뇌와 시대적인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어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점점 피폐해지는 ‘동주’의 모습과 강하늘의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서시]는 그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하며 아픔을 전한다.
시를 낭송하는 데 있어 고민이 많았던 강하늘은 특별한 기교보다 장면에 시가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최대한 담담하고 진실된 감정으로 낭독에 임했고, 이에 이준익 감독은 “강하늘은 시를 정확하게 소리로 입혀냈다"며 높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윤동주 시인의 삶의 전환기마다 작품 세계의 변화들이 있었다”라는 각본을 맡은 신연식 감독의 말처럼, 강하늘의 목소리와 만난 윤동주 시인의 작품들은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동주’의 안타까운 삶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내며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을 진한 여운을 남길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들은 괴로워했다!
1945년 스물 여덟 살의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가 2016년의 청춘에게 전하는 위로와 공감!
지금으로부터 71년 전,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동주’와 ‘몽규’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던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동주’와 ‘몽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청춘들에게 <동주>는 그래서 더욱 가슴 저린 영화다.
그저 시가 쓰고 싶었던 ‘동주’는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와 갈등하고 친구인 ‘몽규’가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열등감을 삭힌다. 문예지를 함께 만들던 동갑내기 여학생 ‘여진’에게 설렘을 느끼고,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시를 계속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는 ‘동주’의 모습과,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감시로 뼈저린 좌절을 맛보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몽규’의 모습은 현재 우리네 평범한 청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처럼 시대가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각자가 처한 현실 앞에서 저항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뜨겁게 청춘을 보냈던 두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주’를 연기한 배우 강하늘은 “영화를 찍으면서 윤동주 시인 역시 질투, 사랑, 미움, 행복을 느끼는 인간적인 면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는 말을 전했고, ‘몽규’를 연기한 배우 박정민 역시 “독립운동가 송몽규를 연기하면서 청년하면 떠오르는 꿈, 도전 등이 떠올랐다. 그만큼 그 시대를 정말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둠의 시대에서 가장 빛나는 청춘을 살다 간 ‘동주’와 ‘몽규’의 이야기로 현재의 청춘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 줄 영화 <동주>. 두 청년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그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감동을 전할 것이다.
○ [ Production Note ]
동주와 몽규의 청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 생생하고 리얼하다!
스탭들의 땀과 노력이 빚어낸 2016년판 응답하라 1945!
영화 <동주>의 모든 스탭들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청춘을 진실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기 위해 각종 문헌과 자료들을 모두 섭렵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화면이 흑백으로 촬영되는 만큼 연출, 촬영, 조명, 의상, 미술 할 것 없이 각 분야의 소통과 합이 보통의 영화보다 훨씬 중요했다. 이처럼 모든 스탭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쳐 힘을 모은 끝에 71년 전의 두 청년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정중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흑백의 詩. 화려한 색채를 뺀 흑백의 영상으로 청춘을 정직하게 그려내다.
<동주>는 흑백의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동주>가 열한 번째 작품인 이준익 감독에게도 흑백 영화는 첫 도전이기에 더욱 특별했다. 그는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독립 운동가의 모습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 청춘의 시절을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낸 이분들의 영혼을 흑백의 화면에 정중히 모시고 싶었다”며 흑백 영화를 고집한 이유를 밝혔다. 흑백 촬영은 각 색상이 지닌 밝기가 같거나 비슷할 경우 피사체의 구분이 또렷하게 되지 않기 때문에 빛의 강약, 공간의 배치, 인물의 움직임 등 꼼꼼하게 확인하는 준비과정이 필요했던 이준익 감독과 스탭들은 사전에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 촬영에 임하였다. 또한 흑백은 컬러에 비해 배우에게만 오롯이 집중해 캐릭터의 심리나 상황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어, 시대에 아파하는 청춘 ‘동주’와 ‘몽규’의 감정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카메라에 과도한 움직임을 주지 않고 촛불이나 호롱불 같은 빛만으로 공간의 흔들림을 일으켜 생각할 수 있는 정서적인 여백까지 고려하는 등 두 청년의 감정이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도 와 닿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인 제작진의 노력 덕분에 <동주>의 흑백 영상이 더욱 깊이 있게 완성될 수 있었다.
공간의 詩.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공간에 녹여내다.
이준익 감독이 “가장 애로사항이 많았던 부분이자 가장 칭찬을 받아야 할 부분이 바로 미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미술팀에게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거리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특히 ‘동주’와 ‘몽규’가 자란 용정 마을과 가장 흡사한 장소를 찾기 위해 사극 세트장부터 한옥촌, 민속 마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만 용정만이 갖고 있는 정서를 표현하는데 난관을 겪었던 미술팀은 기적처럼 자연 형성된 북방식 한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고성 왕곡마을을 만나면서 난제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하나의 지붕 아래 부엌, 마루, 방들이 존재하는 독특한 가옥 구조는 ‘동주’와 ‘몽규’를 둘러 싼 가족들의 관계성 및 시대상, 지역적 특색까지 한눈에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성 왕곡마을에 이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로케이션 장소는 바로 소록도다. 저녁 6시 이후에는 촬영이 제한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풍광과 그 당시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소록도는 ‘동주’와 ‘몽규’의 학창 시절 정취를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동주’가 시를 습작하고 많은 상념을 떠올리는 방 역시 곳곳에 미술팀의 디테일이 살아 있다. 미술팀은 ‘동주’가 시를 쓰는 원고지나 노트를 실제 고증을 통해 제작했고, 노트 표지 위에 낙서 하나하나까지도 그대로 재현했으며, 책상 위에 놓인 책들까지도 윤동주 시인이 즐겨봤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그때 당시의 책들로 배치해 리얼함을 살렸다.
한편 ‘동주’가 고등 형사에게 심문을 받는 취조실은 <동주>의 공간 중 가장 영화의 색깔이 잘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을 담아내기 위해 고등 형사는 어떤 동선에서도 창을 등지고, ‘동주’는 계속 순광을 받을 수 있는 포지션을 설정하여 두 인물의 관계는 더욱 극명하게 대비될 수 있었다. 시대적 고증과 더불어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의 결이 공간에서 묻어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은 영화 속 공간들은 관객들에게 마치 ‘동주’와 ‘몽규’가 살았던 71년 전 그 때 그 시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깊은 몰입감을 선사할 것이다.
의상의 詩. ‘동주’와 ‘몽규’의 숨결을 의상에 품어내다.
‘동주’와 ‘몽규’가 실존 인물인 만큼 의상 역시 고증에 맞게 제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동주>의 의상은 사복과 교복, 형무소 수감복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기 전 어린 시절을 보내는 용정 시절의 사복은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닌 순수한 청년들의 모습을 담아 내고자 했다. 시인을 꿈꾸는 수줍음 많은 ‘동주’는 순수하고 따뜻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니트류를, 신념을 위해 거침 없이 행동하는 ‘몽규’는 진취적인 성향이 의상에서도 묻어 나오도록 활동적인 셔츠를 입혀 차별화를 뒀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인 이미지에서 그가 교복을 착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 의상팀은 교복을 제작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 동안 시대극이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모자는 물론, 실제 윤동주 시인의 사진 속 교복 옷깃에 있는 문과 대학 마크인 ‘L’ 문양까지 섬세하게 재현해냈다.
또한 의상팀은 ‘동주’와 ‘몽규’가 수감된 형무소의 복장을 제작하는데 있어 고증을 바탕으로 하되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유도복 스타일로 허리에 띠를 묶는 본래의 디자인은 일본 느낌이 강해 거부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기본적인 디자인은 유지하되, 띠 대신 단추식 디자인으로 전면 수정하여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줄 요소를 제거했다. ‘동주’와 ‘몽규’의 수감복 죄수 번호는 이준익 감독이 직접 쓴 한자로 특별함을 더했다는 후문. 또한 의상의 디테일이 더욱 도드라지는 흑백 화면의 특성을 고려하여 모든 원단은 스마트폰의 흑백 필터 어플을 통해 일일이 사전 확인 작업을 거친 후에야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캐릭터의 특성, 현 시대의 정서 등 작은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동주>의 의상들은 ‘동주’와 ‘몽규’를 더욱 진실되게 그려내는데 힘을 더했다.
윤동주(尹東柱, 일본식 이름: 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슈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 생애 초반 -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 소년 시절 -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 중학 시절 -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 연희전문 시절 -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일본 유학 -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친구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송몽규, 뒷줄 오른쪽 맨 끝이 윤동주
■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 사후 -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새 명동》
- 《서시(序詩)》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 경향 및 평가 -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 북한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출처]ko.wikipedia.org/wiki/윤동주/ 작성자 idrea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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