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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책 이야기

키치((Kitsch)

금동원(琴東媛) 2016. 2. 24. 23:55

 

 

  패션 색채 - 키치((Kitsch)

  키치(kitsch)는 독일어로 저속, 또는 질이 낮은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상하고 품위있는 것에 대한 반대, 격식에 대한 반대로 보편적인 디자인에서 보면 굿 디자인의 반대되는 것이다. 자극적이면서 저속한 색채, 지나치게 산만한 장식, 싸구려 소재 등 일상적인 용품에서 의상, 건축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전 근대적인 감각의 추구와 간결한 세련미를 배격하는 것이 특징이다. 키치 감각의 패션은 주로 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맞은 나라에서 갑자기 물질적 풍요로움에 권태를 느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1971년 처음으로 파리에서 유행하여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다음 백과 사전 참조)

 

 

  키치((Kitsch)- 현대의 예술과 미학

 

  영한사전에서 키치(Kitsch)를 찾아보면 “저속한 작품” 혹은 “공예품”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형용사 ‘키치적’은 “천박한, 야한, 대중취미의”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겉으로 봐서는 예술품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싸구려 상품이 바로 키치이다. 우리나라에서 키치는 처음에 ‘이발소그림’과 동의어였다. 허름한 이발소의 벽면을 차지한 싸구려 액자 속에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돼지나 가을 추수가 끝난 전원풍경, 밥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뿜어나오는 해질녘 시골집의 풍경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염원하는 행복의 이미지들이 들어 있었다. 이발소그림과 같은 키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서나 내용을 담고 있는, 미적 수준에서는 한없이 저급한 그림들을 지칭한다.

  이제 키치는 단지 이발소그림과 같이 미적으로 저급하거나 조악한, 그러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장 밀착된 특수한 장르화뿐 아니라 자본주의 문화 일반, 나아가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가리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영욱이 드는 키치의 사례는 다음과 같이 포괄적이다.

  “이발소그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둘러싸인 졸부, 초등학교 화단의 이순신 장군상과 이승복 어린이상, 사기로 만들어진 테일러 종의 눈이 큰 강아지 공예품, 거실에 걸린 액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식의 어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집이나 에세이들, TV드라마, 광고 속의 소설가의 포즈, 총학생회 후보들의 전신이 찍힌 대형사진 팸플릿, TV 음악 프로그램, 달콤한 영화와 대중음악, 갈비집 마당의 물레방아 혹은 비단잉어가 유영하는 연못, 강남의 국적을 알 수 없는 건물들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 등등.”

  심지어 키치는 미학적인 퀄리티를 갖는 데 실패한 저급한 예술품이나 문화뿐 아니라 미학적으로 “우수한” 특정 작품들의 어떤 경향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고급예술의 맥락 안에서 “키치적”은 어떤 작품들의 성향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미적 개념이다. 키치를 지향하는 작품들은 팝아트 이후 고급예술 전반을 장악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기존의 예술이 간과한 삶의 실체로서의 가벼움, 무의미, 통속성을 미적 형식과 내용으로 받아들인 작가들에 의해 키치적 예술은 오늘날 진정한 예술이 표방하는 방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키치는 대단히 모호해졌고 복잡해졌다. 오늘날 키치 아닌 것이 없다라는 지적은 키치의 영향력, 키치에 대한 앞서의 사전적 정의와는 다른 어떤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처음 키치는 고급문화 혹은 예술로서의 아방가르드와 대립적인 의미로사용되었다.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대립적인 미학적 개념으로 규정한 본격 논문인 1939년의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당시의 대중문화형식 전반을 키치로 명명하면서, 그 사례를 “상업적인 예술이나 원색화보가 있는 문학지, 잡지의 표지, 삽화, 광고, 호화판 잡지나 선정적인 싸구려 잡지, 만화, 유행가, 탭댄스, 할리우드의 영화”에서 찾았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키치는 더욱 더 그 외연이 확장된다.

  이제 키치는 그린버그가 거론한 대중예술이나 대중문화 외에도 대상에 대한 주관의 특수한 심리적 태도마저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이른바 “키치맨”이란 신조어는 “무분별하고 무비판적이며 조화와 총합을 선호하는 사람으로 예술이 오로지 유쾌하고 달콤한 느낌만을 산출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노력 없이 향유하는 사람, 미적 대상을 지위 상징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가령 렘브란트의 그림 자체는 키치가 아니지만 그 그림을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키치맨의 수중에 들어가면 키치가 된다.

  나아가 키치는 작품의 미적 의도를 가리키는 데 적용되기도 한다. 즉 “의도적으로” 저질인 형식이나 태도를 전유함으로써 미학적 성취를 의도하는 경우까지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키치는 미적으로 결핍인 작품뿐 아니라 미적으로 완성에 이른 특수한 작품들 및 심리적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도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키치는 예술과 문화를 미학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를 나쁜 관습으로 규정짓고 예술과 문화를 삶과 일상성의 맥락에서 평가하려는 이들에 의해 그 자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그린버그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키치는 부단한 변화를 거치며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져 갔고 그런 점에서 키치를 단일한 범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이 키치와 연관되어 있다는 일각의 지적은 키치에 붙어다니는 부정적인 함의들, 즉 “나쁜”, “쓰레기”, “저질”과 같은 단어들에 대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이르렀다는 자각을 요한다.

  즉 그린버그처럼 좋은 예술로서의 아방가르드와 나쁜 예술로서의 키치라는 이분법이 선명히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문화와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키치를 공정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면 키치에 대한 태도 역시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키치 개념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치 (현대의 예술과 미학, 2007. 5. 18., 서울대학교출판부)

 

 

  1.키치의 시작

 

 

  키치 개념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어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단어가 1870년대 뮌헨의 예술시장에서 처음 만들어져 값싸고 시장성이 높은 그림들이나 조각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그 무렵 독일을 여행한 영국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기념품으로 사간 시골 풍경 “스케치”를 독일인들이 잘못 발음한 데서 연유했거나, 싸게 만들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동사 verkitchen이 축약된 것이라는 것이다.

  헐값에 팔리는 조악한 그림을 뜻하던 키치는 그 당시 진지하고 난해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뮌헨의 신흥 부르주아들, 즉 문화적 엘리트들의 습관이나 교양을 서투르게라도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이 선망하는 전통적인 엘리트 계급의 위신(status)을 획득하려는 부르주아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었다. 구() 귀족계급의 문화를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한 신흥부르주아에 의한 키치의 생산 · 소비는 이후 키치를 부르주아 산업사회의 계층문화 서열 안에서 중간계급에 의한 상층계급에 대한 모방적 취미로서 해석하려는 진영에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키치 개념의 역사적 등장이 부르주아의 등장과 일치하고, 키치가 부르주아의 조악한 문화의 범주와 동일시된다는 것에서 우리는 키치가 오로지 (서구) 산업사회의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엽 본격화한 산업화, 도시화는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일반 대중을 등장시켰다. 도시로 이주해 변두리 하층민 집단을 형성한 소작농들은 보통교육을 통해 문해성(literacy)을 획득한 뒤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나 소부르주아로서 도시에 이주한 농부들은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는 했으나 시골에서 향유하던 전통적인 민속문화에 대한 취미를 잃어버렸고 동시에 산업화된 노동과 도시적 삶에 권태를 느끼게 되면서 소비문화로서의 대중문화에 몰입하게 된다.

  키치는 이렇게 특정한 문화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오락으로서의 대용 문화로서 등장하게 된다. 키치를 도시 하층민이나 프롤레타리아의 문화로 설명하는 것은 키치를 부르주아 중간계급의 문화로 설명하는 이들의 입장과는 일면 모순되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키치를 전문적인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부르주아 중산층이나 프롤레타리아 하층민 모두의 문화 향유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2.키치에 대한 비판

 

  이렇듯 저급한 대중의 예술적 · 문화적 취향을 가리키는 키치의 출신 성분은 당연히 “엘리트” 비평가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키치는 예술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상품이다. 키치를 필요로 하고 소비하는 이들은 앞서 지적했듯이 진정한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취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며, 판매에 혈안이 된 키치의 생산자들은 미적 기준이 아닌 구매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은 상투적인 미적 포장과 일정한 규칙을 적용해서 예측 가능한 메시지들을 평균적인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상인들이다.

  키치의 소비자들은 키치의 거짓말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이비 예술과 인스턴트적인 미에 자신의 삶의 조건을 꿰어 맞추는 데 익숙하다. 그들은 심지어 진정한 예술작품마저도 키치로 감각 · 소비하는 이들이다. 진정한 예술작품마저 키치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자본주의 자체가 갖는 힘이다. 즉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상품으로 팔릴 수 있는 소비재로 화한다. 토크빌은 문화의 민주주의를 문화의 저급화로 해석하면서 민주주의 시대의 평균적인 독자들을 비판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그들은 문학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짧기에 그 시간 전체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한다. 쉽게 구할 수 있고 빨리 읽히고 이해하는 데 학구적인 자세가 필요 없는 책을 선호한다. 그들은 자족적이며 쉽게 즐길 수 있는 미를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도 예기치 못한 새로운 속성을 가져야 한다. 투쟁, 시련, 실생활의 단조로움에 익숙해진 그들은 급속한 정서 변화, 놀라운 추이들을 요구하며 작가들은 완성보다는 빠른 실행을 목표로 할 것이다. 소규모의 작품들이 두터운 책보다도 더 흔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목적은 즐겁게 하는 것이기보다 놀라게 하는 것이며 취미를 만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열정을 자극하는 것이리라.”

  토크빌처럼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등장이 문화와 예술의 저급화를 초래했다고 판단한 엘리트 비평가들은 가짜 예술로서의 키치와 진짜 예술로서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비교를 통해 예술의 반부르주아적이고 엘리트적이며 초월적인 가치를 옹호하려 했다. 키치는 대중문화, 나쁜 예술, 쓰레기 예술과 동류이며 진짜 예술인 아방가르드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예술, 소수를 위한 예술, 진지한 예술 등등으로도 불리면서 이분화된다.

  산업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탄생한 아방가르드 예술과 키치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 자본주의에 반응했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심미적 귀족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의 평균화된 저속한 취미에 저항하려 했다면, 키치는 대중의 호소에 순응하는 태도를 통해 자본과 예술이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즉 모든 것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팔려야 하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의 면전에서 키치는 예술과 상품의 거리를 지우고 문화산업의 위치를 선택한 것이라면 아방가르드로서의 현대예술은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물러나 예술의 상아탑으로 은둔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성, 즉 귀족적이고 엘리트적 위상을 보호하려 한 예술이다.

  반상업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예술인 아방가르드와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예술의 대립이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현대 미술이 형식이나 평면성에 천착함으로써 예술의 자율적인 고유한 가치를 보존하려 한 예술이라면 키치란 아방가르드 예술을 제외한 모든 예술, 고급예술 내부의 아카데믹한 예술까지도 포함하는 나쁜 예술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순수예술을 옹호하고, 그 타자로서의 키치를 문화와 예술의 타락이란 관점에서 비판하는 일은 특히 1930년대 유럽을 파시즘이 잠식하고 있었을 때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린버그 외에도 헤르만 브로흐,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이 그 대표적인 이들인데 이들은 파시즘의 발흥, 파시즘에 의한 예술의 프로파간다화, 순수예술에 대한 대중의 반감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좌파로서이건 우파로서이건 모두 한결같이 예술의 독자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역설함으로써 예술의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옹호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사회적 가치로부터 독립한 순수한 것이며, 천재의 산물이며,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선한 것의 상징이다. 예술은 상품이 아닌 순수한 천재 예술가의 소산이며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가치의 담지자인 것이다.

  키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키치의 미학적 저급함의 현실적 기능과 용도, 즉 그것이 갖는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비판한다. 키치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판에 박은 듯한 공식을 갖고 있고 거짓말로 이루어진 악이다. 키치는 삶의 무의미함과 진부함을 벗어나 환상적인 도피처를 찾으려는 도시 대중의 정서에 호소한다. 키치는 시간 때우기에 적합하다. 간결하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 키치가 갖고 있는 덕목이다. 키치는 감각적인 느낌과 정서에 호소한다.

  브로흐는 “키치 소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으로, 혹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세상의 모습으로 기술한다”며 전자를 달콤한 키치(sweet kitsch), 후자를 시큼한 키치(sour kitsch)로 나눈다.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을 반영하는 달콤한 키치는 달빛 아래의 다정한 연인, 사랑스러운 강아지와 어린아이, 행복한 가정과 같은 이미지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세상을 반영한 시큼한 키치는 전쟁영화나 공포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위험, 죽음, 절망을 제시하지만 고통이나 절망의 실체가 부재하는 이른바 “멸균된 슬픔”을 제공한다.

  키치에 대한 본격 해부서라 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그러한 키치의 성격을 “똥의 절대적 부정(absolute denial of shit)”이라 표현한 바 있다. 즉 키치는 현실을 다룰 때에도 현실의 더러움, 어려움, 실체는 절대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치의 미적 기만성이나 비도덕성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지배 계급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으로 규정한 아도르노와 같은 좌파사상가들이 보기에 문화산업으로서의 예술은 시장의 필요에 의해 통제되고 정식화되며 대중들은 그러한 상업적인 예술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키치는 전체주의 사회에 걸맞는 예술 형식이다.

  1937년 히틀러 정권이 뮌헨에서 현대예술을 퇴폐예술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예술을 위대한 독일 예술로 명명해서 나란히 전시하고 전시 후 현대예술 전시회에 걸렸던 작품들을 불태운 일화는 1930년대 엘리트 비평가들이 보기에 키치가 어떻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는가를 입증한 역사적 사실이다. 키치는 사전에 모든 대답이 미리 주어져 있고 따라서 어떤 질문도 배제하게 만드는 멸균된 세계관, 이른바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건강한 민주사회라면 다양한 집단적 관심들이 경쟁하고 서로 협상하면서 합의를 도출해 내려 노력할 것이지만 개인주의, 의심, 아이러니와 같이 현대예술이나 아방가르드 예술에 중요한 용어들은 키치를 침해하는 것으로 이들은 키치의 생존을 위해 모두 삶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딱 하나의 정치적 움직임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는 언제이건 우리는 전체주의적 키치의 영역 안에서 살게 된다”고 지적한다. 키치로서의 대중예술, 혹은 문화산업은 지배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중의 여가조작과 연관되어 있다.

  예술을 감상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한 노동자 대중은 자신들의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해 정형화되어 있고 소화되기 쉬우며 이미 다 조리되어 있는 문화경험을 요구하는 것이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물화를 심화시키면서도 그 물화를 오히려 충족, 행복, 성취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물화 상태로부터 탈출을 좌절시키는 여러 장치, 기술,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 소비사회에서 욕망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사회적으로 모방된다. 욕망은 결핍감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그 결핍감 자체를 사회적으로 대량생산하고 그 결핍감을 메우려는 것이 후기산업사회이다.

  그러나 칼리니스쿠와 같은 이론가는 아도르노와 같은 좌파 이론가들이 키치의 등장을 노동자 대중의 여가와 연관짓는 것은 너무 협소한 이해 방식이라 지적하면서 부르주아지와 중산계급 나아가 부유한 상층계급의 사람들에게도 키치에 대한 애호가 존재함을 역설한다. 키치는 상층계급이나 하층계급을 모두 만족시키는 근대 사회 전체의 생활양식이라는 것이다.

  20세기 초 파시즘의 시대를 살았던 아도르노가 키치를 특수한 계급의 문화로 봄으로써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려 했다면 20세기 후반 키치가 자본주의 문화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시대에 칼리니스쿠는 키치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의 불가능성을 짐짓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키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밖”을 이야기하는 것의 어려움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키치는 현대예술의 전사로서의 낭만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불행, 반복, 권태로서의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키치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키치의 주된 매력이다. 브로흐는 낭만주의 이전에 미적 이상은 절대적이고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것이었지만 낭만주의 시기에 미적 이상은 초월성의 흔적을 상실하고 작품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키치가 노스탤지어에 경도되어 있다는 점 역시 낭만주의와의 친화성을 보여 준다. 즉 키치는 역사적 현실이나 동시대적 현상을 몇몇 상투어로 대치하면서 낭만주의적 세계관과 연관을 맺고 있는 정서적 욕구들에 근거하여 번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키치는 낭만주의의 진부한 형태라 할 수 있으며 키치적 정서를 낭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3.키치의 정치학

  키치의 역사적 전개 과정, 부르주아 대중사회에서 키치의 미적 · 도덕적 ·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규명은 키치의 타자로서의 예술의 순수성, 도덕성을 옹호하는 데 적극 이용되었다. 그러나 아방가르드 예술을 절대화하고 신화화하는 과정에 대한 반발이나 반작용이 등장하면서 현대예술 역시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간 예술이었다는 지적이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모더니즘 이론의 지나친 득세가 모더니즘의 제도화, 보수주의화를 초래하게 되면서, 그러한 모더니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순수성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20세기 후반 다양한 진영의 다양한 관점─탈식민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페미니즘 등등의─에 의해 비판되었는데 키치와 연관해서 살펴볼 것은 우선 모더니즘의 시대에 현대예술 또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는 상호 배타적인 예술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하면서 작용한 예술이었다는 사실이다.

  랭보에서 시작해서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거치면서 혁명적 아방가르드들은 자신들의 전복적인 목표를 위해 키치에서 직접 차용한 다양한 요소와 기술을 사용했다. 키치는 아방가르드가 일종의 유행이 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가장 섬세한 시인과 지식인 집단 내에서 “부정적” 명성을 향유하게 된다. 역으로 키치는 성공한 아방가르드를 모방하고 차용함으로써 이득을 취해 왔다.

  키치 예술가는 아방가르드의 비관례성─새로움─이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나 널리 수용되거나 심지어 상투형이 될 정도에 이르렀을 때에만 아방가르드를 모방하고 복제했다. 이런 점에서 키치는 지속적으로 아방가르드 안에서 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키치를 사용하고 키치가 아방가르드의 장치를 이용했음은 키치와 아방가르드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전통으로 보는 엘리트들과 달리 명료한 이분법을 통해 설명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또한 1960년대 등장한 팝 아트로 인해 이제 20세기 후반의 예술은 모더니즘 예술과의 급진적인 단절 속에서 이해되게 된다. 미국의 “저급한”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고급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팝 아트─광고전단, 수프 깡통, 영화 스타와 같은 대량 소비문화의 요소들을 이미지화─이래 “키치”의 부정적인 함의는 재고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은 코카콜라 병, 캠벨 수프 깡통,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대중문화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냄으로써 “천박함, 반복과 단조로움, 권태감을 자아내는 세상의 시시한 것들에 축복의 세례를 내린다.” 저급예술, 혹은 대중문화의 고급예술의 진영으로의 진입을 알린 팝 아트의 국제적인 성공은 미학적 양식으로 전유된 키치의 영향력이나 의의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사실이다

 

  4.“캠프”를 통해서 본 오늘날 키치의 의의

 

  팝 아트가 등장하던 1960년대에 수잔 손탁은 “캠프(camp)”라는 용어를 통해서 대중문화나 팝 아트를 기존의 진지한 아방가르드 예술과는 다른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려고 했다. 손탁에 의하면 아방가르드로서의 현대예술 혹은 고급예술은 진리, 아름다움, 진지함에 천착하면서 예술을 도덕적 교훈이나 도덕적 판단에 종속시킨 예술이다.

  그와 달리 경박한 것, 과장된 것, 탐미적인 것, 미학적으로 부적절한 것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 경향으로서의 캠프 혹은 캠프 취향은 내용에 대한 스타일의, 도덕에 대한 미적인 것의 승리를 알리는 사건이다. 즉 아방가르드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진지함과 도덕에의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예술의 탐미적이고 유희적인 특성을 손탁은 캠프를 이론화하면서 정식화하려 했다.

  캠프로서의 예술은 기존의 도덕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도덕을 제시하려 한 현대예술의 진지함을 넘어선다. 캠프족은 진지하게 굴지 말고 놀 것을 제안한다. 삶의 무의미함이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어떤 믿음도 포기한 캠프족은 예술의 가치를 유희에서 찾는다. 가벼움, 경박함,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한 거부, 스타일에의 탐닉이 캠프의 특징이다.

  손탁이 말하는 캠프가 고급예술 진영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새로운 예술인지, 대중문화를 포괄한 후기 자본주의 시대 문화 전체를 말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손탁은 캠프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 풍요로움이라는 정신병리를 견뎌낼 수 있는 사회의 문화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캠프는 아도르노가 말한 문화산업에 의한 자본주의 내 문화 전체의 잠식과 일면 유사하다. 손탁은 단순히 캠프로서의 자본주의 문화 전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캠프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을 통해 캠프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문헌

해태음료 콤비콜라(1999)해태음료 콤비콜라(1999)
 
키치(kitsch)  
'저속한 작품'이라는 뜻. 일반적으로 모방된 감각, 사이비 예술을 뜻한다.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1939년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논문에서 "키치는 간접 경험이며 모방된 감각이다. 키치는 양식에 따라 변화하지만 본질은 똑같다. 키치는 이 시대의 삶에 나타난 모든 가짜의 요약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키치를 광범위하게 규정하여 재즈와 할리우드 영화, 광고도 키치로 보았으나 현재 이런 것들은 키치라기보다는 대중문화로 간주된다. 오늘날 이 용어는 조악한 감각으로 여겨지는 대상을 다소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종종 키치는 진지하고 고상한 취향에 반하는 이단적인 감각, 품위나 기품과는 거리가 먼 반지성적인 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광고를 비롯하여 그래픽 디자인 및 뮤직비디오 등에 이런 흐름의 표현이 간혹 나타난다.
(다음 백과 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