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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그늘에 대하여/ 다나자키 준이치로

금동원(琴東媛) 2016. 2. 13. 23:36

 

 

『그늘에 대하여』

-다나자키 준이치로 작/ 고운기 역/ 눌와(2012년초판)

 

 

  책 소개

 

  우리에게 탐미주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일본 문학계의 저명한 대문호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선.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필로 다채로운 찬사를 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는 「그늘에 대하여」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의 문학, 전통극을 비롯하여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보이는 남녀관계의 미묘함을 세심한 필치로 풀어놓은 「연애와 색정」, 그밖에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화들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실려 있다.

  특히 일본 전통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늘에 대하여」는 사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견해 속에 작가 자신의 미학을 감성과 이론과 행동으로 관철시키고 있어 작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으뜸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 다나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郞 1886년 도쿄 니혼바시에서 태어났고,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퇴학을 당했다. 1910년 『신사조(新思潮)』를 재창간하여 「문신」, 「기린」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고, 소설가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5년 열 살 어린 이시카와 치요코와 결혼을 했는데, 시인인 친구 사토 하루오가 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아내를 양도하겠다는 합의문을 써 「아사히신문」에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화 예술 운동에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시나리오를 써 영화화하고 희곡 『오쿠니와 고헤이』를 발표한 뒤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1924년 『치인의 사랑』을 신문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검열로 중단되었다. 1942년에 그는 세 번째 부인이자 희구하던 여성인 마쓰코와 그 자매들을 모델로 『세설』을 쓰기 시작했다. 1943년 『중앙공론』 신년호와 4월호와 7월호에 연재되었던 『세설』은 7월호에도 실릴 예정이었으나 「시국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표가 금지되었다가 전후에야 비로소 작품 전체가 발표되었고, 훗날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아사히 문화상을 받았다. 1949년에는 제8회 문화 훈장을 받았고 1941년 일본 예술원 회원, 196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에 뽑히기도 했다. 1958년 펄 벅에 의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매년 후보에 올랐으며 1965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치인의 사랑』, 『만지』, 『슌킨쇼』, 『세설』, 『열쇠』, 『장님 이야기』, 『미친 노인의 일기』 등이 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역자: 고운기

 

  196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양대 국문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3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하였고,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있다.

 

 

  출판사 서평

   우리에게 탐미주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일본 문학계의 저명한 대문호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선이 《그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산문선에는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수필로 다채로운 찬사를 받으며 널리 읽히고 있는〈그늘에 대하여〉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의 문학, 전통극을 비롯하여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보이는 남녀관계의 미묘함을 세심한 필치로 풀어놓은 〈연애와 색정〉도 실려 있다. 또한 화장실 문학(?)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는〈뒷간〉 외에도〈게으름을 말한다〉,〈손님을 싫어함〉,〈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화들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동안 쉽게 읽을 수 없었던 다니자키의 문학 중에서도 엄선된 산문을 접할 수 있으며, 특히 그 속에서 근대의 일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게다가 일본 전통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그늘에 대하여〉는 사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견해 속에 작가 자신의 미학을 감성과 이론과 행동으로 관철시키고 있어 작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으뜸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이 씌어진 시기는 주로 1930년대이다. 이때의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근대의 변화가 이루어지던 때로, 한지를 바른 장지문에 유리창이 끼워지고 전통 의상에서 양복으로 갈아입었으며, 호롱불에서 전등으로 바꾸어 달고, 서양식 건물이 속속 들어서던 시대이다. 그래서인지 다니자키는 글 전반에 걸쳐 당시 일본의 풍토와 문화를 외면한 채 물밀 듯이 들어오는 서구의 외래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결과를 이중생활이라 칭하며 담담하게 그러나 아주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공사할 때의 발생하는 문제들,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종이의 효용성, 일본의 건축과 다다미방, 어둠 속에 있는 황금박과 금빛이 발산하는 아름다움, 노 무대의 어두움과 옛 여인의 생활상 그리고 그늘(음예陰?)의 세계……이러한 것들은 일본을 이해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로 알기 쉽게 서술함과 동시에 변화의 과정에서 전통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데, 이것은 단지 일본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서구문물의 실용성과 합리성에 짓눌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는 이미 1996년에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 산문이다. 원래 제목은 ‘음예예찬陰?禮讚’이지만 당시에는《음예공간예찬》(발언)으로 번역되었었다. 일반인보다는 주로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주요 독자층이었으며, 심지어는 서지분류도 건축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그늘에 대하여〉가 산문이기도 하지만 오래전부터 미국의 콜롬비아 대학 건축대학원에서 설계 및 일본 건축사의 교재로 사용되고, 동양학부의 일본사와 일본문학사 과목의 필독서로 선정되어 읽히고 있으며, 영국 대학에서도 읽히고 있어 산문 그 자체보다는 건축에서의 공간 개념을 익히기 위한 교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그늘에 대하여〉가 단순히 동양 건축의 공간 개념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늘’ 즉 ‘음예’를 설명하는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소하고 낯선 단어인 ‘음예’란 무엇인가? 책에서는 음예를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다’라고 옮긴이는 설명하고 있다. 말로써는 애매모호하지만 책을 몇 장만 넘겨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음예의 공간은 어느 특정한 한 부분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의 삶과 함께하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서양식 좌변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재래식 화장실이라면 보통 불결함을 떠울리겠지만, 다니자키는 “어느 정도의 옆은 어두움과 철저히 청결한 것과 모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런 변소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며, 변소 벽면 맨 밑바닥에 길고 가는 창문이 붙어 있어 처마 끝이나 나뭇잎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석등의 지붕을 씻고 징검돌의 이끼를 적시면서 땅에 스며드는 소리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는, 달밤에 어울리는 벌레 소리 새소리에 어울리는, 사계절의 사물이 드러내는 것을 맛볼 수 있는” ‘단아한 풍취’가 담긴 ‘화조풍월’을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어둠을 조건으로 한 칠기 그릇의 아름다움을 금은박을 입힌 마키에 공예와 함께 예찬하고 있다. 옛날 금은박을 사용하였던 것은 “반드시 그런 어두운 방을 염두에 두고, 빛이 적은 속에서의 효과를 겨냥한 것이 틀림없고, 금색을 호화롭게 사용한 것도, 그것이 어둠에 떠오르는 상태나, 등불을 반사하는 정도를 고려한 것으로, 금박 장식은 밝은 곳에서 한번에 퍼뜩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서 여러 부분이 그때그때 조금씩 빛을 드러내는 것을 보도록 만들어진 것이어서, 호화 현란한 모양을 어둠에 숨겨 버리는 것이 말로 할 수 없는 여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저 반짝반짝 빛나는 칠기 그릇 표면의 광채도 어두운 곳에 놓고 보면 그것이 등불 끝의 어름거림을 비추고, 조용한 방에도 때때로 바람이 찾아온다고 알려 주어, 어느덧 사람을 명상에 빠지게 한다”고 하여, 칠기 그릇과 촛불과 등불이 어둠 속에서 자아내는 묘한 빛과 그림자의 세계를 명상에 이르게 하여 신비와 선미를 맛보는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지은이의 음예에 대한 예찬은 일본 건축과 다다미방, 그 속의 도코노마와 가부키와 인형극인 노에 이르며 끝이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백색 인종과 황색 인종의 피부색에서도 또 얼굴에 하얗게 분을 바르고 이를 검게 물들인 일본의 옛날 여자의 화장법에서도 그늘이면서 그늘이 아닌 그림자이면서 그림자가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을 찾아내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도시는 네온사인에 장식 전구에 일정한 간격의 가로등에 의해 진정한 밤의 어둠을 알기 어려우며, 어둠 속의 아련한 빛이 자아내는 푸근함과 따뜻함을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그늘에 대하여〉는 ‘밝음’만을 좇는 현대의 경직 속에서 아련하니 손때 묻은 옛것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제목부터가 눈길을 끄는〈연애와 색정〉은 지은이의 일본 전통문화와 근대문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남녀관계에 관한 철학을 담고 있다. 젊은 시절 여성숭배와 관능주의를 기치를 올렸던 다니자키에게 여성은 “바꿔 말하면 여성숭배의 정신으로, 여자를 자신 이하로 보고 애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이상으로 우러러보고 그 앞에서 쭈그리는 마음이다. 여자가 남자 위에 군림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남자와 비슷하게 자유스럽고,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가 지금처럼 폭군적이지 않고, 다분히 정중하여 무척 부드럽게, 때로는 이 세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 귀한 것으로 다루어졌다고” “그 시절의 일기나 이야기나 와카 따위를 읽자면, 여자는 많은 남자로부터 존경받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남자로부터 애원하는 태도가 나온다든지 하여, 결코 지금처럼 남자의 의지에 유린당하고 있지 않다”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밤은 예나 이제나 붙은 말이다. 그러나 현대의 밤이 태양광선 이상의 현혹과 광채를 가지고 여자의 나체를 샅샅이 비춰내는 데 반해, 옛날은 밤은 암흑의 장막을 가지고 발을 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더욱 그 상으로 감싼 것이다. 옛날의 남자는 어떤 특정한 여자의 얼굴을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달은 항상 달인 것처럼 여자도 단 하나의 여자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를 듣고, 옷 냄새를 맡고 머리카락을 대고, 요염한 촉감을 손으로 더듬어 느끼고, 그래도 밤이 밝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바의 그런 것들을 여자라고 생각하였으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색기란 무엇일까? “그늘에서 남편에 안겨 애무해 주도록 바라는 그 모습에 많은 남자는 말하기 어려운 매혹을 느낀다. 방종하여 노골적인 것보다도, 내부로 억제된 애정을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아서, 때로 무의식적으로 말씨나 몸짓 끝에 드러나는 것이 한층 남자의 마음을 이끈다. 색기라는 것은 대게 그런 애정의 뉘앙스이다.”

 

  책 속으로

 

  나는 교토 나라의 사원에 가서, 고풍스럽게 어둑어둑한 그러면서도 깨끗이 청소된 변소로 안내될 때마다, 정말로 일본 건축의 고마움을 느낀다. 다실도 좋기는 하지만, 일본의 변소는 참으로 정신이 편안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것들은 반드시 안채에서 떨어져, 신록의 냄새나 이끼 냄새가 나는 듯한 정원의 나무와 수풀 뒤에 마련되어 있고, 복도를 지나서 가게 되는데, 그 어둑어둑한 광선 속에 웅크리고 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장지의 반사를 받으면서 명상에 잠기고, 또는 창밖 정원의 경치를 바라보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다. 나쓰메 소세키 선생은 매일 아침 변을 보러 가는 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꼽고, 그것은 차라리 생물학적 쾌감이라 말했다는데, 그 쾌감을 맛보는 이외에도 한적한 벽과 청초한 나뭇결에 둘러싸여, 푸른 하늘이나 신록의 색을 볼 수 있는 곳은 일본의 변소만큼 알맞은 장소가 없다.--- pp.11~12

 

 

 

  (독자리뷰)다나자키 준이치로와 최순우 선생

햇뜨락 |2010-08-23 : http://blog.yes24.com/document/2519067

 

 

  그의 글을 읽으면서 최순우 선생이 자꾸 떠올랐다.

  최순우 선생의 산문집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에서 읽었던 달빛 노니는 창살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최순우 선생이 길이 잘 들고 은은한 밀장판과 장지문에 비치는 달빛 등 우리 고유의 것을 예찬했듯이 글쓴이는 일본 고유의 그늘에 대하여 예찬하고 있다.

 

  역자는 '그늘에 대하여'의 원제는 '음예예찬(陰翳禮讚)'으로 글의 서두에 '음예는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다. 그러나 글을 옮기면서 '그늘'이라 하기로 한다.' 이렇게 제목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초반부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 문단의 최고봉을 걸어간 다니자키는 일본적인 전통미에 경도된 대표적 작가로서 나쓰메 소세키와 동시대인이다.

  다다미 방의 어두운 채광과 깊은 그늘, 싸늘한 바깥 변소의 풍취, 세월의 때가 묻어 적당히 녹슨 은그릇, 옻칠한 짙은 칠기 주발 속에 담긴 내용물을 구별할 수 없는 국물의 선미(仙味)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시선은 온통 그늘에 집중되어 있다.

 

  반짝반짝 빛나고 드러내는 걸 좋아하는 서양의 미감과 달리 '사이'를 중시하고 드러나지 않고 가리워진 은근한 아취(雅趣)를 즐기는 동양의 미감은 일본과 한국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아는 분의 홍천 시골 집에서 겨울 눈이 발목까지 푹푹 쌓이던 날, 마당의 눈을 헤치고 달빛과 싸락눈이 나무의 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재래식 변소에서 느꼈던 그런 분위기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말하는 풍취일 터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광선의 아름다움과 여자들 사이에서 이를 검게 칠하는 화장법이 유행했던 것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서양인과 일본인의 피부색을 대비하여 묘사한 부분은 솔직히 좀 꺼림찍했다.


  맑고 투명한 서양인의 깨끗한 피부 속에 동양인이 섞여 있을 때를 불순물, 오물, 또는 얼룩이 진것 같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그는 한술 더 떠 백색 인종이 유색인종을 배척한 심리가 이해된다고도 썼다. 서양의 발달한 문물이 일본으로 넘쳐 들어오고, 일본적인 것이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을 역설하면서도 그 또한 유색인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을 다 읽고 나니 나는 그에게 '일본의 최순우'란 별명을 붙여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