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저/김종길 역 | 민음사
『폭풍의 언덕』은 서른 살의 나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기 일 년 전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무대로 벌어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를 그린 이 작품은 작가가 ‘엘리스 벨’이라는 가명으로 발표했을 당시에는 그 음산한 힘과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야만성 때문에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그녀의 언니 샬럿마저도 1850년에 출판된 소설의 서문에서 "어줍잖은 작업장에서 간단한 연장으로 하찮은 재료를 다듬어 만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에밀리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이 한 편의 소설과 완성되지 않은 단편적인 문장을 포함한 193편의 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불후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작품 『폭풍의 언덕』에서 보이는 빛나는 감수성과 시적이고 강렬한 필치, 그리고 새로운 문학사적 의의 때문이다. 백 년이 지난 오늘 이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멜빌의 『백경』과도 곧잘 비교될 만큼 깊은 비극성과 시성(詩性)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작가 소개
1818년 영국 요크셔 주의 손턴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잠시 자매들과 함께 기숙학교에 다녔으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황량한 황야의 사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보냈다. 1835년 언니 샬럿이 미스 울러 학교에 교사 자리를 구하자 에밀리는 학생으로 따라갔다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3개월 만에 돌아왔다. 1838년에는 에밀리 자신이 미스 패칫 학교에서 6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샬럿과 에밀리는 가족들이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호어스에 여학교를 열 계획을 세우고, 외국어와 학교 운영을 배우기 위해 1842년 2월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나 10월에 이모가 죽자 에밀리는 호어스로 아주 돌아왔다. 샬럿과 에밀리, 앤 세 자매는 1846년 필명을 써서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을 함께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에밀리의 시 21편이 실렸는데, 후대의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에밀리에게서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재능이 엿보인다고 평가했다.
1847년에는 샬럿의 『제인 에어Jane Eyre』와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가 차례대로 출간되었다.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 뒤 에밀리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하여 결국 1848년 12월 19일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1847년 출간된 『폭풍의 언덕』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허먼 멜빌의 《백경》에 필적하는 명작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출판 당시에는 소설에서 느껴지는 음산함과 등장인물들의 야만성, 사랑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반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나온 이듬해 폐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저자가 후대인들에게 이렇게 사랑받을 줄 알았더라면 마지막 떠나는 길이 조금은 덜 쓸쓸하지 않았을까.
역자: 김종길
에밀리 브론테가 남긴 단 한 편의 소설
그러나 영문학 3대 비극, 세계 10대 소설에 꼽히는 작품
요크셔의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거칠고 악마적인 격정과 증오
현실을 초월한 폭풍 같은 사랑
시골 언덕 위의 저택 '워더링 하이츠'에 들어와 살게 된 고아 히스클리프와 그 집 딸 캐서린 언쇼의 운명적이고 불운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언쇼 가와 린튼 가에 몰고 온 비극은 1939년 W. 와일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두 집안을 파멸시킬 만큼 강한 애증과, 격정에 못 이겨 죽은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치는 히스클리프의 섬뜩한 광기는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는 죽은 캐서린의 유령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현실을 초월해 초자연계와 영원의 세계까지 이르는 사랑이 그려진다. 비이성적이고 가공할 이 사랑은 그러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념이다.
육체와 영혼을 불태운 증오와 사랑은 요크셔의 자연과 닮아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모습’을 지칭하는 ‘워더링(wuthering)'이라는 형용사가 암시하듯 이 황야에는 거친 폭풍이 그칠 날이 없으며, 때문에 그 거센 북풍에 나무나 풀들이―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풀 히스도 역시―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을 정도다. 이 혹독하고 강한 바람 속에서 그곳은 순수하고 청정할 수밖에 없으며, 인위적인 것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는 곧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계와 초자연계가 융합하는 영혼의 세계
인간성의 심연을 파고드는 강렬한 필치
궁벽한 시골구석에 묻혀 무명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여성에 의해 기적적으로 탄생한 『폭풍의 언덕』은 교훈적이고 도덕적이었던 당시 빅토리아 왕조의 이상적인 풍토에서 나온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개인의 실존에, 정열과 의지에,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진실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당대에는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모두 흉칙하고 음산하다.”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현대의 우리는 히스클리프에게서 교양이라는 울에 속박되지 않은, 애증(愛憎)이 진하고 적나라한 인간상을 볼 수 있다.
본능적이며 야만적이기까지 한 히스클리프와 오만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그에게 끌리는 캐서린. 에밀리 브론테는 이렇게 이상화되지 않은 현실의 인간을 창조해, 선(善)이냐 악(惡)이냐 판가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한데 어울려 몸부림치는 인간 실존의 심연을 강렬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는 소설 문학상 하나의 놀라움이었으며 또한 하나의 헌신적인 암시였다.
■『폭풍의 언덕』, 자기 마음을 죽이지 마세요
- 『폭풍의 언덕』
글 | 임재청(서평가)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 『폭풍의 언덕』中
달빛과 번개
사랑을 하는 많은 방법 중에 영혼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사랑하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울 때 이러한 갈망을 나타내는 것이 영혼입니다. 달빛이 더 밝게 보인다거나 불이 더 아름답게 타오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한다는 것을 풍부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영혼이 달빛이거나 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한번쯤 고민하게 됩니다.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서로가 사랑한다면 서로의 영혼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영혼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는 버려진 아이였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데려왔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녀만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 힌들리는 그를 학대했습니다.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 수 있는 것. 그는 그녀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 같은 두 눈을 천사 같은 눈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힘든 일과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멸시를 받으면서 점차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게 하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며 오만해졌습니다. 그녀는 이런 현재만을 생각해서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그를 천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면 에드거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죽인 거야
그런데 이런 결혼 즉, 어떤 의무감이나 인정에 끌려 하는 결혼은 몸과 마음이 따로 일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라거나 영혼이라는 것은 감히 만지지 못합니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가 소중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에드거를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그를 천 번이나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의 감정 또한 폭풍 같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잃어버린 뒤의 삶은 지옥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에드거가 팔십 년 동안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하루 동안 사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는지 물으며 다음과 같이 격정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인거야
사랑할 줄 아는 건 자신의 권리와는 다릅니다. 사랑이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권리는 자기 마음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자기희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죽이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도 죽고 맙니다. 흔히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연인 사이를 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연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은 사랑을 권리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며 영혼
자기 마음을 죽인 상처로 인해 그녀의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주 이상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녀가 편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하자 그는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격정적인 상황에서 그는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게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었던 지난 18년 동안 밤낮으로 그녀가 자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이유인즉 그녀는 그의 생명이며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녀 없이 산다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죽음과 지옥 밖에 없었습니다. 뭔가 다른 게 있다면 유령과 사랑에 빠지는 절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죽은 뒤 그는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유령이라는 게 있을 있다면 그런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유령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정도로 유령의 존재를 믿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땅 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교회 묘지의 머슴에게 부탁하여 그녀의 관 뚜껑을 열고는 조금 느슨하게 하고는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 옆에 묻힐 때 자신의 관도 한쪽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넘나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궤도
히스클리프의 삶과 사랑은 성경에 나오는 천국에는 갈 자격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남들이 원하는 천국을 전혀 바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바라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했습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괴상하다고요? 어쩌면 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초월한 폭풍 같은 사랑은 행복인 동시에 고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랑의 궤도는 사랑의 유령을 불러낼 정도로 영혼을 넘나들었습니다.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궤도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폭풍의 언덕, 사랑의 고통과 황홀 그리고 잔인함에 대하여
-그들만의 폭풍같은 사랑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중 하나이며,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멜빌의 <모비 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폭풍의 언덕>은 열다섯 차례나 영화화되었고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작가가 죽은 지 백오십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글 | 김정희
<폭풍의 언덕> 초판 표지
작품 상세 소개
<폭풍의 언덕>은 영국 요크셔의 거친 벌판에 사는 두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로, 히드클리프라는 악마적인 정열을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엮어지고 있다. 히드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라는 저택의 주인이 주워다 기른 부랑아로, 양부(養父)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나 양부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힌들리에게 모욕과 푸대접을 받은데다가 끔찍이 사랑하던 양부의 딸 캐더린에게 배반을 당하자 집을 뛰쳐나가 3년 후에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캐더린은 이미 지주(地主) 린튼에게 시집을 간 뒤였다. 여기서부터 그의 냉혹하고 처참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는 린튼의 누이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하여 아내로 삼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또한 힌들리와 도박을 하여 그의 재산을 빼앗아, 옛날에 받았던 학대와 수모를 되돌려준다. 그리고 캐더린이 낳은 딸과, 자기와 이사벨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강제로 결혼시켜 린튼의 집안까지 빼앗는다. 그러나 그는 결국 복수심을 모두 불태워버린 나머지 애인 캐더린의 망령(亡靈)과 다시 만날 것을 꿈꾸면서 죽어간다.
에밀리 브론테가 그리는 작품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영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죽음까지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개방(開放)으로 묘사되고 있다. 작자가 이 소설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현실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전도(傳道)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일종의 비극적인 산문시라 할 수도 있다.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하지만 운명을 걸고 사랑할 줄 아는 인물 히드클리프의 이야기는, 일과적(一過的)이고 타산적인 현대적 사랑에 마음 아파하는 이들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작가 소개
19세기 영국 문학사를 장식한 여류 작가로는 브론테 세 자매를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제인 에어>의 저자인 샬롯 브론테(1816~1855)와 <폭풍의 언덕>의 저자인 에밀리 브론테(1818~1848) 그리고 <애그니스 그레이>의 저자인 막내 앤 브론테(1820~49)가 이들 세 자매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로, 병약한 체질을 타고나서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짧은 생애를 문학에 바쳤다.
그녀는 영국 국교파 목사인 패트릭 브론테의 1남 5녀 중 4녀로 태어나 아버지의 부임지인 영국 북부 요크셔의 목사관에서 살면서, 주변의 거칠 들판에서 고독하게 자랐다.
브론테 자매들은 위로 두 언니가 일찍 죽는 바람에 샬롯과 에밀리, 앤만이 살게 되었다. 이들 세 자매는 감수성이 뛰어나 그들이 써온 시를 묶어서 공동으로 시집을 펴냈으나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세 자매는 시집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 없이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후에 각자 두각을 나타냈다.
영화 <폭풍의 언덕>
2012.06.28 개봉
안드리아 아놀드(감독) 카야 스코델라리오(캐서린 언쇼), 제임스 호손(히스클리프)
영국 TV 영화
코키 지드로익(감독) 톰 하디, 샤롯 라일리
1993.01.22 개봉
피터 코스민스키(감독) 줄리엣 비노쉬(케이시 린턴/캐서린 언쇼), 레이프 파인즈(히스클리프), 자넷 맥티어(엘렌 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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