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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금동원(琴東媛) 2017. 4. 2. 22:17



선불교의 철학』

  한병철 저/한충수 역 | 이학사



  선불교의 철학, 서양과 동양 사상을 넘나드는 대화를 펼치다

  이 책은 『피로사회』로 잘 알려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가 선불교의 세계를 철학적으로 탐구, 소개하는 철학 저술이다. 선불교(禪佛敎)는 일반적으로 ‘말과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달으며(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좌선에 의해 직접 인간의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고자 한다(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고 정의된다. 그래서 선불교는 언어를 의심하고 개념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신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선불교의 근본 태도는 이론과 담론에 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선불교에 대해 논리적,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니 선 수행을 하지 않는 일반인이 선(선불교)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선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보면 ‘선불교’에 ‘철학’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모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좁은 의미의 철학에 속하지 않는 대상에 관해서도 철학적으로 반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선불교에 ‘관해서’ 그리고 선불교와 ‘함께’ 철학함으로써 “선불교의 철학”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선불교에 들어 있는 ‘철학적 힘’을 ‘개념’을 가지고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이 무엇인지를 논리적, 개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서양철학자들 ― 플라톤, 라이프니츠, 피히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 ― 의 철학과 선불교 선사들 ― 임제(臨濟), 도오(道吾), 동산(洞山), 위산(?山), 앙산(仰山), 조산(曹山), 운문(雲門), 원오(?悟), 도겐(道元) 등 ― 의 통찰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선불교의 사유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아무것도 아님(무無), 비어 있음(공空), 아무도 아님(무아無我),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무주無住), 죽음, 자비(친절)라는 6가지 주제 각각에 대해 서양철학자들의 개념을 소개하고, 이러한 서양철학의 개념과는 다른 선불교의 통찰을 고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 공, 무아, 무주, 죽음, 친절이라는 개념에 대해 서양철학과 선불교의 철학적 사유가 대결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 대결은 어느 한쪽의 철학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다른 종류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직관적 사유 전통을 가진 동양과 논리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서양은 그 사유 전통이 다르다. 따라서 이 책은 두 사유를 비교 연구를 통해 고찰함으로써 ― 특히 서양철학과 비교하여 선불교의 통찰을 해명함으로써 ― 동서양 사유의 다름을 드러내 보이고,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선불교의 철학적 사유에 독자가 조금 더 쉽게 한 발 다가서게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제 6가지 주제를 통해 선불교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작가 소개


  한병철(Han Byung-Chul )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2010), 『투명사회』(2012) 등의 저작이 독일에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특히 『피로사회』는 2012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주요 언론 매체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 사회를 꿰뚫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그 밖에도 『권력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향기』 『심리정치』 『에로스의 종말』 『죽음과 타자성』 『폭력의 위상학』 『하이데거 입문』 『헤겔과 권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아무것도 아님(무無)

  헤겔은 종교의 대상이 “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 기독교를 불교에 투사하여 ― 불교의 중심 개념인 “무”를 신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이 “실체”이자 “주체”이지만 불교의 “무”에는 “배타적 주체성” 혹은 “의식적 의지”가 없다. 그래서 무는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무”는 중심적 주체가 아니라 비어 있는 중심이다. 그래서 선불교의 무는 신적인 “저기”를 향하지 않고, 내재성으로, 즉 “여기”로 향한다. 지배하는 중앙이 없기 때문에 주변도 없고, 존재자 모두가 중심을 이룬다. 선불교는 모두와 모든 것에 똑같이 친절하다. 따라서 중심이 없는 선불교에는 일상 세계를 지배하는 초월적 세계가 없다. 선불교에는 다른 세계가 없기 때문에 일상 세계에 머문다. 깨달음은 거기에서, 그 평범한 세계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깨어난 사람들은 특별한 “저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된 여기”에, 깊은 내재성에 도달한다. 선불교는 세계를 근원적으로 신뢰하는 세계 종교다.

  비어 있음(공空)

  선불교의 공 개념은 서양의 “실체” 개념과 대비된다. 변함없이 지속하는 실체는 동일성과 정체성이란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불교의 중심 개념 순야타(비어 있음[공空])는 실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실체는 가득 차 있으나 순야타는 존재를 비워 제거한다. “비어 있음의 들(빈터)”에는 견고하게 현존하는 것이 없다. 비어 있음은 바라보는 사람을 비워서 보아지는 것이 되게 한다. 비어 있음은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방적인 것이다. 하나의 존재자에 전체가 비치고, 전체는 하나의 존재자에 거주한다. 물러서서 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는 어찌 보면 동일성에 갇힌 것처럼도 보인다. 그에 반해 빈터에서는 모든 사물이 “동일성의 독방”으로부터 벗어나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 그때 만물은 파괴되지 않는다. 더 이상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워질 뿐이다. 모든 사물은 서로에게 친절하다. 만물은 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빛난다. 빈터에서는 존재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 일어난다.

  아무도 아님(무아無我)

  무아는 거울과 유사하다. 거울은 아무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얼굴이 비칠 수 있다. 이는 거울의 친절이다. 거울 같은 무아는 내면성, 영혼 및 자기를 가지지 않는다. 무아에 이르기 위한 선불교 수행의 핵심은 자기를 던져버리는 것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늘 자기의 미래를 걱정하는 데 반해, 무아는 현재에 그때그때마다 머무른다. 자기를 버린 무아는 걱정이 없다. 무아는 자기의 정체성 혹은 동일성을 고수하지 않고, 만물의 운행에 따른다. 무아가 경치를 볼 때, 경치는 그에 대립하여 서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에게 흘러든다. 경치가 경치를 보게 된다. 무아가 그린 그림이나 무아가 쓴 하이쿠는 세계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빛나게 한다. 무아가 내면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림과 하이쿠에 심오한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음(무주無住)

  무주는 거주와 대립하는 개념이다. 거주지가 없는 사람은 방랑자이다. 방랑길은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이별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별의 슬픔은 무겁지 않고, 명랑하다. 모든 형태의 집착에서 벗어난 방랑자는 자유롭다. 만물의 변화에 자기를 맞추고, 오고 가는 모든 것에 친절하다. 방랑은 세계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 무주는 거주를 긍정한다. 방랑 후의 세계는 기존의 세계와 내용적으로 같다. 하지만 비어 있음만큼 더 가볍게 된 것처럼 느껴진다. 가뿐한 거주는 방랑이 된다. 이제 거주지는 개방되고, 친절한 분위기를 풍긴다. 누구나 무료로 묵을 수 있는 객정(客亭) 같은 집이 된다.

  죽음

  선불교의 죽음 개념은 서양철학의 죽음 개념과 다르다. 플라톤은 철학을 죽음의 연습으로 본다. 헤겔에게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인간 현존재의 삶을 본래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에 영웅적으로 맞선다. 그에 반해 선불교는 죽음에 대해 태연한 태도를 취한다. 덧없는 세상의 너머를 보지 않고, 덧없이 지나가는 사물들 곁에 머무른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큰 죽음은 자아 없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때 자아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트여서 개방된다. 이제 아무도 죽지 않는다. 무아가 죽는 것이다.

  자비(친절)

  친절(자비)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선불교의 중심에는 무가 있기 때문에, 즉 중심이 없기 때문에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친절하다. 빈터에서 부드러워진 만물은 서로에게 친절하다. 자아가 없는 무아에게는 모든 사람이 스며든다. 친절한 무아는 방랑하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과 함께 간다. 방랑자가 거주하는 곳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열려 있다. 큰 죽음을 맞은 사람은 초월적 세계를 동경하지 않고, 덧없이 지나가는 사물들 곁에 친절하게 머무른다. 선불교의 친절은 자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무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자비는 사람이 베푸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음의 몸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