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저/박석무 역 | 창비
200여년 전, 척박한 남도 땅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한 외로운 학자의 편지를 통해 그 마음 속을 들여다본다. 그 학자는 다름아닌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이다. 사랑하는 아들과 둘째 형에게, 아끼는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외로이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대학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속깊은 동생이었고, 올바른 스승이었다. 유배지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는 '학자 정약용'이 아닌,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생의 선배로서 아들에게 남기고픈 한마디 한마디를 써내려가는 것은 물론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를 잡아먹는 법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다산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마음을 다해 이들을 사랑했는지 보여준다. 다산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글을 통해 200여 년 전 치열하게 살아간 한 인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 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였다.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 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역자 소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한 외로운 학자 정약용의 편지인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소개한 다산 정약용 전문가다. 다산의 삶과 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다산을 통해 배우는 지혜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전남 무안 출생으로 전남대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구속되는 등 민족·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 1971년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다산 연구에 집중했으나,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 동안 복역하면서 감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때의 결실이 1979년 출간된 명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다.
목차
1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귀양길에 올라서
참다운 공부길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큰 죄
선조의 행적과 일가친척을 알라
진실한 시를 짓는 데 힘쓰거라
올바른 처신에 대하여
먼저 모범을 보이거라
허례허식을 경계하라
『주서여패』라는 책을 만들도록
『제경』을 만드는 법
『거가사본』을 편찬하라
『비어고』를 만드는 법
거짓말을 입밖에 내지 말라
같은 폐족이라도 무리를 짓지 말라
제사상은 법도에 맞게 차려야 한다
사대부가 살아가는 도리
둘째형님을 회상하며
일본과 중국의 학문 경향
시의 근본
인의예지는 실천에서 발현된다
폐족은 백배 더 노력해야 한다
막내아들이 죽다니
열수에 대하여
가난한 친척을 도와라
절조를 지키는 일
사대부의 기상이란
어머니의 치마폭에 눌러쓴 아버지의 사랑과 교훈
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임금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라
저술에 관한 뜻
시는 어떻게 써야 하나
넘어져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정신적인 부적을 물려주마
옛 친구들을 생각하며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된다
생계를 꾸릴 때도 사대부답게
둘째형님께 보낸 편지
중국 요순시대의 고적법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웁니다
『현산어보』에 대하여
형님께서는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수학은 음악과 상극입니다
성인들의 책을 읽고 말씀 올립니다
형제간의 학문 토론
상례에 대하여
조타는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입후의 기준
『시경강의』에 대하여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잊는 법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도 잊고
아우 약횡에게 들려주는 말
4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윤종문에게 당부한다
윤종문에게 또다시 당부한다
윤종억에게 당부한다
다산의 학생들에게 당부한다
영암군수 이종영에게 당부한다
정수칠에게 당부한다
윤종심에게 당부한다
의순에게 당부한다
이인영에게 당부한다
기어자홍에게 당부한다
변지의라는 젊은이에게 권한다
출판사 리뷰
오랜 세월에도 빛바래지 않는 인간 정약용의 가슴 따뜻한 삶의 지침들
초간본 발행 30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출간.
“우리가 연애편지를 쓸 때는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도 좀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산의 이 편지들은 아들에게, 형에게 보낸 것이어서 진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다산의 인간적 면모와 세상 및 학문에 대한 관심사를 볼 수 있죠. 장기 스테디쎌러가 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최근 박석무 원장(한국고전번역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긴 생명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위클리경향》 2009년 10월 15일자).
조태일 시인이 운영하던 시인사에서 초간본이 출간된 것은 1979년.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이 책은 창비로 판권이 넘어가 창비교양문고로 출간되고(1991년) 다시 개정판으로 출간되면서(2001년) 각기 다른 시간대를 대면하였고, 그 언제든 독자들로부터 부침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2009년, 초간본 발행 30주년을 기념하여 네번째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아우 약횡에게 주는 편지, 기어자홍이라는 젊은 스님과 변지의라는 젊은이에게 주는 글 등이 새롭게 추가되었고, 2006년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던 ‘하피첩(霞?帖)’과 아내가 보내준 치마폭에 그림과 시를 써 외동딸에게 보내준 ‘매조도(梅鳥圖)’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문장 또한 이영진 시인의 교열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읽는 맛을 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과 함께 더욱더 빛을 발하는 편지글들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절실한 삶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200년 전의 가르침
200여년 전, 척박한 남도 땅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한 외로운 학자의 편지가 이렇듯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생명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편역자의 표현대로 다산은 “세상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불세출의 학자”였다. 그가 손대지 않은 학문 분야는 사실상 없었고, 손댔다 하면 그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다. 명실 공히 “당대 최고의 사상가·정치가·행정가였으며, 당대 최고의 의사, 지리학자, 과학기술자”였던 것이다. 그런 다산이 남긴 저서만 해도 500여권. 그렇기에 추사 김정희는 “감히 다산의 세계를 논평할 수 없다”고 했고, 해방 이전 다산 연구의 기초를 닦아놓은 정인보 선생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산도 세상에 다시없는 대학자이기 전에 누군가의 엄한 아버지였고, 속정 깊은 동생이었으며, 올바른 스승이었다. 인간 다산이 유배라는 천신만고의 괴로움 속에서 가족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너무도 진솔한 한 인간의 내면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에 그 어떤 책보다 큰 지혜,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다. 다산 정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이야말로 그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이 책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둘째형님께 보낸 편지?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단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들들에게 주는 편지글이다.
“내가 밤낮으로 애태우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 뼈가 점점 굳어지고 기운이 거칠어져 한두해 더 지나버리면 완전히 내 뜻을 저버리고 보잘것없는 생활로 빠져버리고 말 것만 같은 초조감 때문이다. 작년에는 그런 걱정에 병까지 얻었다. 지난여름은 앓다가 세월을 허송했으며 10월 이후로는 더 말하지 않겠다.”
“폐족(廢族)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겠느냐.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學淵)과 학유(學游)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엄격하게 격려했다. 편지를 읽다보면 선비답게 참다운 길을 가도록 준엄하게 꾸짖는 다산의 음성이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특히 권세가들에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라고 권유하는 아들에게 다산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절조를 잃어버려서야 되겠느냐”며 매섭게 질책한다. 불의와 조금도 타협할 줄 모르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겉으로는 엄하게 채찍질하지만 그 속에는 자상하고 애끊는 부정(父情)이 넘친다. 어두운 유배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고달픔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직 아들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어 더욱 감동적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뿐만 아니라, 가족간 윤리, 친인척과의 인간관계, 양계, 양잠하는 법, 심지어 친구를 사귀고 술을 마시는 법도까지 세세하게 일러주는 편지들을 보면 과연 오늘날에도 이같은 부자(父子)관계가 존재하는지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또한 유배지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고 슬피 울부짖는 글과 “이달 들어서는 공사간에 슬픔이 크고 밤낮으로 가신 이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으니 이 어인 신세인가. 더 말하지 말기로 하자”와 같은 절제된 문장에서는 다산처럼 큰 선비도 어쩌지 못할 극한의 슬픔이 묻어난다.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님 정약전(丁若銓)과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누었다. 스스로 평생지기라 일컬었던 둘째형님에게 보낸 편지들은 서로 불우한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적 깊이에 탄복하며 인생을 토로한 수준 높은 서간문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자신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 잡아먹는 법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편지글에서는 둘째형님에 대한 지극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가난한 제자들의 생계까지 염려해주는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 편지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과거제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과거공부에 힘을 기울이라고 주장하거나 애써 힘든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고 당부하는 현실적인 가르침 등이 그러하다. 지금처럼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지고 교권(敎勸)이 흔들리는 때, 이 글들은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한다.
다산과 박석무
다산과 박석무 원장의 인연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출간함으로써 ‘다산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만큼, 수많은 다산 관련 저서를 낸 지금까지도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박석무 원장은 졸업논문으로 다산의 법사상과 법률관에 대해 쓰면서 다산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이때는 머리로만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이었으며, 가슴으로 다산을 받아들인 것은 그 자신 사회의 격랑에 휩싸이면서부터였다. 네차례나 옥고를 치렀던 그는 어둡고 불안한 감옥생활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손에서 다산을 놓지 않았다. 18년 유배생활 속에서 학문을 성숙시킨 다산처럼 그의 다산 연구도 감옥 안에서 영글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 치열한 시간의 결과물로서, 200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각각 시대의 고뇌와 민중의 아픔을 껴안고 고민해온 두 학자의 소통까지를 오롯이 담아 보여준다.
추천평
30년 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이 책은 ‘국민교양서’이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방대한 사상세계로 일반독자를 이끄는 맞춤한 안내서 역할을 해왔다. 이제 그 30주년을 기념하는 새 판을 대하면서 나는 책을 통해 엿보는 다산 선생의 모습은 물론이고 그동안 다산의 시대 못지않게 험난한 세월을 살며 기회 있을 때마다 개역을 거듭하고 다산학 보급에 앞장서온 편역자의 모습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 백낙청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다산 선생에게 묻다
도토리 | 2017-01-11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을 꼽으면 빠지지 않는 이가 있으니,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그의 저술의 방대함과 깊이는 가히 초인적이라고 해야 하나. (음.. 쓰다 보니.. 이 고답적인 문장들은 다 뭐지..) 정조의 총애를 받고 왕성하게 일하던 시기와, 유배를 가서 학문 연구에 힘쓰던 20여년의 세월 중 그에게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 임금의 총애를 받고 왕성하게 일하던 시기일 것이다. 하지만 후세에 그의 이름을 남긴 것은 유배생활 중 그가 이룩한 연구와 저술활동이니.. 참 아이러니컬하고 묘하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 처절하게 저술한 [사기]가 필생의 역작이 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할지. 이래서 Nirvana의 보컬 Kurt Cobain은 'Thank you for the tragedy. I need it for my art.'라고 했던가. (물론 정약용 선생님이 예술을 한 건 아니지만.)
거의 멸문지화에 가깝게 화를 입고 폐족이 된 상황에서, 정약용 선생님은 더 마음을 단단히 붙들고 특히 아들을을 많이 다그치는 모습을 보인다. 선생에 비해 당연히 많이 부족했을 아들들에게 올바른 마음가짐과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내용의 편지가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연구와 저술활동을 이어가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채근하는 모습을 보면 정약용 선생님은 확실히 요즘 말로 멘탈갑(?)이 맞는 것 같다. 영욕의 세월을 모두 견뎌내며 초월한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만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나쁜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61)
"임금을 섬기는 데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또 임금의 신뢰를 받아야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p.145)
"꽉 쥐면 쥘수록 더욱 미끄러운 게 재물이니 재물이야말로 메기같은 물고기라고나 할까?" (p.167)
"요컨대 아침에 햇볕을 환하게 받는 위치는 저녁 때 그늘이 빨리 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시는 법이어서 바람이 거세게 불면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p.189)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190)
이렇게 초탈하기까지 선생님이 겪은 고통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주군을 잃고, 형제를 잃고, 자식과 아내와 헤어지고, 그 와중에 자녀들은 죽는 상황. 더구나 자신의 몸도 많이 상했다면 나는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무언가에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학문에 매달리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이 훈계하는 내용만 담은 것은 아니다. 형 약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형제간의 끈끈한 정이 느껴지고, 아내와 딸 그리고 죽은 아이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와 그림을 보면 선생님도 한 명의 사람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들이 유배지에 와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저술과 관련한 안내를 담은 내용도 꽤 많은 걸로 보면 선생의 저술은 혼자 연구하고 쓴 것이 아니라 집단 연구 및 저술 체제를 갖추셨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훌륭한 신하였던 정약용 선생님의 철학과 삶의 자세, 독서와 저술에 관한 열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군자가 이처럼 궁지에 빠져도 되는 겁니까?" 라는 자로의 물음에 "군자는 원래 궁하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라고 공자는 대답했다.
"학자란 궁한 후에야 비로소 저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p119) 라고 하는 대목에서 나는 그런 군자의 모습을 보았다. 다산의 철학과 탐구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산선생이 쉼없이 아들을 꾸짖었던 말들이 자꾸 맴돌아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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