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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네루다 (2016)

금동원(琴東媛) 2017. 5. 28. 10:58

   

                         

  네루다 (2016)Neruda

  감독) 파블로 라라인                 

  주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루이스 그네코, 메르세데스 모란   
                

  나의 친애하는 도망자 ‘파블로 네루다’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언어를 사랑하게 되었다

   권력에 저항한 정치인이자 민중을 대변하는 칠레의 전설적인 시인 ‘네루다’.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난한 그를 잡아오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비밀경찰 ‘오스카’는 도피를 위해 아내 ‘델리아’와 함께 은둔생활을 하는 ‘네루다’의 흔적을 밤낮 없이 쫓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은둔생활이 길어질수록 ‘네루다’는 세계적 영웅이 되어가고, 그를 잡아야만 하는 ‘오스카’조차 그가 남긴 책 속 문장들에 매료되고 마는데…


   칠레의 위대한 민중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를 알고 계시거나 그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께 감상을 추천합니다. 단순한 전기영화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네루다와 역사적 관점에서의 네루다, 진짜 민중시인이 되어가는 과정...기대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상영관이 많지는 않네요. 현재 1900명이 관람했다고 하던데... 저는 작은 아들과 함께 새벽 1시(상영시간 118분)에 감상하고 왔습니다.


https://youtu.be/1N50ro7DDcI



 ○[이동진의 어바웃 시네마] '네루다' 시가 된 남자, 시를 꿈꾸는 영화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한 '네루다'의 간략한 줄거리만 읽고 나서는 독일영화 '타인의 삶' 같은 내용인 줄 알았다. 권력의 하수인이 발톱을 세우고 반체제 인사 주변을 맴돌다가 오히려 그 인품에 감화되는 이야기. 하지만 다 보고나니 훨씬 더 야심찬 영화였다. 그 자신이 시(詩)가 된 남자와 그 자체로 시를 꿈꾸는 영화. 게다가 '네루다'는 인간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무척이나 흥미로운 관점을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칠레의 대표적 시인이자 상원의원인 네루다(루이스 그네코)는 1948년 대통령 곤잘레스를 비판한 연설을 한 이후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져 아내 델리아(메르세데스 모란)와 함께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경찰 간부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숨어 있는 네루다를 체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포위망을 좁혀가다가 네루다의 작품을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전기영화들은 다루는 인물의 삶을 하나의 시각으로 명확하게 정리한다. 그런 관점에 따라 그의 삶 곳곳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건들을 하나의 축으로 꿰뚫어내고 정리해서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네루다라는 인물의 거대한 삶 전체를 선명하게 요약하는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라라인의 또다른 전기영화 '재키'에서 기억이란, 혹은 집단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란, 결국 의지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재키'의 화두는 "어떻게 역사를 기억할 것인가"였다.


  '네루다' 역시 마찬가지다. 이건 네루다의 실제 삶에 대한 '객관적 서술'의 총합이 아니다. 어쩌면 라라인은 네루다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네루다라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자신의 의지를 영화에 심어놓았는지도 모른다.


  '네루다'의 첫장면은 자신의 모습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들이 연이어 셔터를 누르는 가운데 국회로 들어서는 네루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직후엔 그를 힐난하는 정적(政敵)의 보이스 오버(화면 밖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네루다라는 널리 알려진 인물의 이른바 핵심을 세상의 시각과 청각으로 포박하려는 시도는 그 직후 뒷모습을 보인 채 소변을 보는 네루다의 도발적 행동에 의해 거부되고 조롱된다. 그러니까 그런 통념 속, 네루다는 거기 없었다.

 

  '재키'에서처럼 라라인은 이 작품에서도 하나의 대화 장면이 길게 이어질 때 시간이나 대화 주제의 연속성은 유지하면서 공간의 연속성은 파괴하는 점프컷 편집 방식을 통해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단일하고도 명확한 이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동시에 이런 방식은 특정 사건의 시공간 내 위치를 교란시킴으로써 신화적인 뉘앙스를 이야기에 부여한다.


  이 영화는 네루다의 일생 전체를 다루지 않고 1948년의 상황에 집중한다. 그 해는 네루다 인생의 정점이 아니었다. 그때는 시집 '스무 편의 사랑 노래와 한 편의 절망 노래'를 내놓은 후 단번에 거대한 명성을 얻었던 스무살 무렵 같은 광휘도 없었고, 대통령 출마와 노벨문학상 수상과 피노체트 독재 하에서의 고초와 암으로 인한 사망이 숨가쁘게 이어졌던 말년의 파란만장한 굴곡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저 고단하기만 한 도피 시절에 착목했을까. 그건 그 시기에 칠레 역사가 특히 격랑을 겪었고 네루다 개인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터져나왔으며, 그의 창작력이 극에 달했고 민중에 대한 사랑을 그가 가장 절실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네루다는 방대한 서사시를 담은 대표작 '모두의 노래'를 썼다.



  ''네루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오스카만큼은 예외다. (추적의 플롯을 가지고 있지만 극중에서 오스카는 단 한 번도 뛰지 않고 수사 과정에서 자신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싫은 내색 한 번 내지 않는다. 그리고 오스카는 네루다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우선 오스카는 네루다의 또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오스카가 극중에서 첫 등장하는 장면은 네루다가 처음 나타나는 장면과 같은 형식으로 담겼다. 이 영화가 추적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추적극에서 쫓는 자는 쫓기는 자가 갔던 길을 같은 방향으로 고스란히 되밟아간다.


  네루다가 주로 빛 속에서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비해, 명암이 명확히 대조되는 필름누아르적 조명 속에서 빛을 등지고 있는 오스카의 얼굴은 상당 부분 역광 속에서 어둡게 표현된다. 그런 오스카는 마지막에 이르러 태양 쪽을 바라보면서 선명하게 얼굴을 드러낸 채 죽는다. 오스카는 결국 네루다의 어두운 저편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이 이야기는 그런 오스카의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여정을 다룬 정신적 로드무비이다. 극중 오스카가 등장하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의 명암 대조는 그와 같은 여정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를 또렷하게 요약한다. 등장 첫 장면에서 오스카는 밖이 환한 대낮이지만 실내의 어둠 속에서 닫힌 창을 등지고 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어두운 밤이지만 실내에서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바로 옆 호텔 네온사인 불빛을 똑바로 응시하기에 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오스카를 유사부자관계에서 볼 수도 있다. 오스카는 매춘부의 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데, 영화는 그 매춘장소를 드나드는 네루다를 보여줌으로써 오스카 아버지 후보의 자리에 상징적으로 네루다를 위치시킨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오스카는 네루다를 넘겨다보며 "예전에 당신 딸을 안아주었듯 이젠 나를 안아줘"라고 읊조린다. 오스카는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네루다의 죄책감이 낳은 인물로도 보인다.


  아울러 네루다와 오스카의 관계는 창작자와 창작품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네루다가 오스카의 존재를 시종 목소리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오스카는 화자로서 내레이션을 통해 시종 자신을 드러낸다. 또한 네루다는 살아 있는 오스카의 얼굴을 직접 보진 못하지만, 자신의 첫번째 부인이 증언을 거부한 후 대신 라디오에 나온 오스카나 눈 덮인 산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쳐부르는 오스카의 목소리는 듣는다. 시인에게 목소리는 곧 시(詩)다.


  극의 말미에 이르러 오스카는 사실상 시가 된다. 오스카가 하얀 눈밭에 피를 흘리고 쓰러질 때 그건 하얀 종이 위에 붉게 쓰여진 글씨(시)를 시각적으로 표상한다. 마침내 오스카의 시신 앞에 당도한 네루다는 무릎을 꿇고 시신을 거둬 말에 싣고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詩作)을 완성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카는 민중을 대변한다. 네루다는 도피 기간 중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두 사람과 결별하게 되는데, 결별을 낳은 각각의 마지막 대화에서 모두 네루다는 민중을 이끄는 영웅적 자아상에 사로잡혀 있는 스스로의 견해를 고집해 상대에게 실망을 안긴다. 일평생 민중을 위한 시를 썼지만 다른 한편 영웅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던 네루다는 눈 덮인 산에서 가던 방향으로부터 최초로 돌아선 채 멀리 오스카가 있는 쪽을 향해 크게 늑대 소리를 낸다. (네루다의 작품세계에서 자연은 종종 민중과 고스란히 겹친다), 그 소리를 들은 오스카 역시 네루다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한다. 그러니까 앞장 선 지식인의 뒤만 따라다니던 민중은 그 순간 처음으로 대등하게 호명하고, 앞장서서 민중을 이끌려고만 했던 지식인은 그 순간 처음으로 돌아서서 민중을 바라본다. 극중에서 그때까지 '조연'으로 지칭됐던 오스카는 또는 민중은 처음으로 주연이 되고, 네루다는 "실은 네가 나를 만든 거야"라고 고백한다. (네루다의 시집 '모두의 노래'에는 "나는 민초, 셀 수도 없는 민초이다/.../우리는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다"라는 싯귀가 있다.)


  영화 '네루다'의 짧은 에필로그에서 오스카는 마지막 대사로 네루다가 스무살 시절에 썼던 그 유명한 시 구절을 읊는다.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것이다." 이 문장에 담긴 것은 그런 행동을 하겠다는 의지다. 아울러 그 행동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에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전제되어 있다. 네루다의 과거로 돌아간 오스카가 미래 시제로 이 문장을 말할 때 두 사람은 하나가 된 채 시간 앞에서 다짐한다. 그러니 다시 또 한번. 기억이란 그리고 역사란 의지다. 거기엔 파블로 라라인의 의지도 함께 담겨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4D0E5ZV0yQk


시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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