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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테극기 휘날리며(2004)

금동원(琴東媛) 2017. 6. 5. 18:07


  태극기 휘날리며(2004)

  (감독) 강제규                                      

  (주연) 장동건, 원빈


  웬만한 영화에는 잘 울지 않던 나를 펑펑 울게 만들었던 영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울지 않을 수 없었던 두 형제의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이면서, 우리 모두가 겪고있는 남북 상전의 끔찍함과 이산가족들의 눈물겹고 슬픈 고통의 이야기이다. 모든게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라는데 더 큰 좌절과 절망감을 느낀다.

  한국 영화 사상 최대인 누적관객 2500만명의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세웠던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화 <쉬리>로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른 강제규 감독이 연출했다. 주연 배우 장동건과 원빈이 출연하여 연기력까지 인정받으며 톱스타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한 작품이다.

  개인의 영웅담이나 이념적인 갈등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시대적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과 가족의 운명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는지,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을 남기는지에 대해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6.25 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고스란히 실감나게 스크린에 담았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웃음과 자유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경의와 명복을 빈다. 모두 감사합니다.(참치)



  ○줄거리


 1950년 6월..
 서울 종로거리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진태는 힘든 생활 속에도 약혼녀 영신과의 결혼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 진석의 대학진학을 위해 언제나 활기차고 밝은 생활을 해나간다.

  6월의 어느 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호외가 배포되면서 평화롭기만 하던 서울은 순식간에 싸이렌 소리와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해진다. 이에 , 남쪽으로 피난을 결정한 진태는 영신과 가족들을 데리고 수많은 피난행렬에 동참하지만,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대구역사에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만 18세로 징집 대상이었던 진석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군용열차에 오르게고 진석을 되 찾기 위해 열차에 뛰어오른 진태 또한 징집이 되어 군용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서 피 튀기는 전쟁터로 내 몰린 진태와 진석은 훈련받을 시간조차 없이 국군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으로 실전 투입이 되고 동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진태는 동생의 징집해제를 위해 대대장을 만난다. 대대장과의 면담후 동생의 제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 진태는 그 무엇보다 동생의 생존을 위해 총을 들며 영웅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진태의 혁혁한 전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데 성공한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북진을 시작한다.

  애국 이념도 민주 사상도 없이 오직, 동생의 생존을 위한다는 이유 하나로 전쟁영웅이 되어가고 있는 진태와 전쟁을 통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진석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 평양으로 향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운명의 덫이 그들 형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https://youtu.be/7psu1717afY(1)


https://youtu.be/hvQCCGaLRV4(2)














  ○한국전쟁( 6.25 전쟁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韓國戰爭,6·25 전쟁, 조선 전쟁/조국해방전쟁, Korean War,朝鲜战争/抗美援朝, 朝鮮戦争,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은  1950년 6월 25일새벽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국과 중국인민지원군등이 참전하여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열전으로 폭발한 대표적 사례다.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다. 이는 국제연합군과 의료진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까지 관여한 제 2차 세계 대전이후 최대의 국제전이다.


  미리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뚱과 소비에트 연방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남로당의 대한민국 내 활동과 우방인 소련의 지지에 고무되어 1950년 6월 25일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38선 이남으로 진격하였다. 이는 때마침 냉전으로 긴장되어 있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쳐 파문은 이 전에 없던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 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 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다.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연합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다. 동시에 남로당의 남한 내부 전복을 위한 활동과 이를 제압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충돌로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3년 간 지속된 전투로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이 사상하였다. 대부분의 산업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측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념적인 이유로 민간인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지주들의 처벌과 그 보복이 반복되면서 남·북 간의 적대적인 골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휴정협정으로 인하여 설정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휴전하였다.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상태로, 협정의 체결 이후에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군사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출처: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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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몽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