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올곧게 사는 건 고독한 일
예술가의 행복은 보통 사람의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다른 행복
‘사람들의 생각대로 사는 것은 쉽다. 고독한 가운데 내 소신대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로 쉽다. 그렇지만 진정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이 주는 완벽한 달콤함을 느낀다.’-랄프 왈도 애머슨
시속(時俗)을 따라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의 진흙탕에 뒹굴며 제 잇속이나 챙기며 적당히 산다한들 다들 비슷한 삶을 꾸리니 누가 나서서 나무랄 일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과 달리 뾰족하고 올곧게 사는 것은 도드라진다. 옛 문인의 문장을 보면 그들도 시속에 타협하며 편하게 사느냐, 아니면 곤핍하더라도 올곧게 사느냐 하는데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옛 문인의 문장을 보면 그들도 시속에 타협하며 편하게 사느냐, 아니면 궁핍하더라도 올곧게 사느냐 하는데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사진= Courtesy of StocSnap
조선 후기의 선비 송문흠(宋文欽)은 ‘시속과 반대로 사는 일’이란 글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괴(怪)요,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노(勞)다. 시속을 따르면 편하고 출세하는데, 밖으로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안으로 마음에서 지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썼다. 남들 따라 사는 것이 원만한 삶의 방식일 테다. 그렇게 살면 튀지 않을 뿐더러 남들의 질시나 배척을 사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 무리에 묻혀 적당히 살고 싶은 대중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 예술가들
의롭지 않음에 분노하지 않고, 시속의 혼탁에 묻혀 산다. 그렇더라도 소신대로 살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은 남과 달라서 미움을 사고 따돌림 당하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리다.
나쁜 짓도 하지 않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일에 앞장서지도 않는다. 이게 보통 사람의 마음이요, 대개 더러운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돼, 하고 안도하는데, 이렇게 타협하며 사는 이들에게 송문흠은 까칠하게 묻는다.
“천금의 보배가 있으면 반드시 궤짝에 감출 것이요 겹겹이 싸서 숨길 것이지만, 이를 시장에다 내다 버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궤짝을 버린 것일 뿐, 그 안의 보배는 내 정말 지키고 있다’라고 한다 해서 어찌 그 보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삼이사의 마음에 씌워진 위선과 허위의식을 아프게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보통 사람은 별다른 고민없이 다중(多衆)의 생각과 이념을 따르며 산다. 무리에 묻혀 사는 게 편한 까닭이다. 시속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올곧게 사는 건 고독한 일이다. 호랑이는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는 포식자인데, 무리짓지 않고 밀림을 혼자 어슬렁거리며 산다.
무리짓지 않고 단독자의 고고한 고독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호랑이와 예술가는 닮아 있다./사진=Courtesy of Gelinger
한 시인은 호랑이를 두고 이렇게 쓴다. “이름 모를 강둑 진흙 밭에 발자국을 남기고/야만적인 거리를 돌파하며/뒤얽힌 미로에서 코를 킁킁거리며/새벽 내음과 사슴 냄새를 맡네.”(보르헤스, 「또 다른 호랑이」) 무리짓지 않고 단독자의 고고한 고독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호랑이와 예술가는 닮아 있다.
◆ 억지로 그리는 대신 붓대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조선 시대 화가 최북
부귀영화를 좇을 것이냐, 혹은 창조의 고독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예술가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 결과가 가난과 절대 고독이라 할지라도 선택은 안 바뀐다. 가난과 절대 고독이 예술 창작의 조건이라고 통찰하는 까닭이다.
18세기 조선 화가 최북과 우리 시대의 빼어난 조각가 권진규를 보자. 최북은 한 권력가가 신선 그림을 요청하자 보지 못한 것은 그릴 수 없다고 단박에 거절한다. 권력가가 “네 목을 쳐도 그리지 않겠느냐?”고 윽박지르자, 최북은 붓대를 들어 제 눈을 찌르고는 “내 눈이 보지 못 하면 그림도 그릴 수 없겠지요.”라고 대꾸한다.
권진규는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 자리 제안도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한다. 최북은 장님으로 떠돌며 기행을 일삼다가 술 취한 채 얼어죽고, 권진규는 가난과 병고에 실연의 아픔이 더해져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독에 무너졌다.
끝내 제 작업실에서 목매어 죽은 권진규는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라고 끼적인 문구를 남겼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 과연 예술가는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예술가의 행복은 보통 사람의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다른 행복이다.
시인과 화가들은 가난과 고독으로 얼룩진 형극의 길을 지복의 조건으로 바꾼다. 최북과 권진규가 그랬듯이, 그리고 고흐나 랭보가 보여주었듯이 예술가는 불행과 고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행과 고독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이 주는 완벽한 달콤함을 느끼며 사는 이상한 종족들인 것이다. (출처:조선비즈)
◆장석주는 스무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서른 해쯤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여름, 서울 살림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일요일의 인문학’ 등 다수의 저작물을 냈다. 최근 40년 시력을 모아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 시인 박연준과 결혼 식 대신 쓴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냈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장석주 저/ 푸르메
○책 속으로
열자의 인격은 청신하고 기는 고요했으며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거지는 소탈하였다. 열자가 뜻은 약하게 갖고 뼈는 굳게 하니 세속의 일에 연연하는 법이 없고, 남에게 가혹하게 군 적이 없고, 뭇 사람의 마음을 거스를 줄도 몰랐다. 열자는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제 본성을 흐린 적이 없다. 홀로 제 몸을 우뚝 세워 한결같음으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이것이 진짜 비움이 아닐까? ---p.97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다. 일체의 욕망을 비우고 나면 삶도 죽음도 하나의 흐름일 따름이다. 흐름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나 기쁨도 둘이 아니다. 슬픔이 기쁨이고 기쁨이 슬픔이다. 자래가 말하듯 삶을 기뻐한다면 죽음도 기뻐해야 마땅하다.---p.116
오면 가고 간 것은 되돌아온다는 늑골 아래가 서늘해지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물들도 사람도 흘러간다. 간 뒤에 반드시 새로 온다. 간 것은 망각 속에서 그리움으로 싹트고 온 것은 생짜의 마주침으로 기쁨을 준다. 오면 가고 가면 새로 오는 것들이 날줄과 씨줄로 운명이라는 피륙을 짜는 것이다. ---pp.119-120
앎의 지극함에 이른 사람은 구태여 재물을 쌓아두고 감추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명예와 이익이 요즘 사람들의 배와 그물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감출 수 없는 것을 감추려고 하지 마라. 재물의 울타리 속에 갇히면 마음에 족쇄를 채운 꼴이다 ---p.125
장자는 "도라는 것은 실질이 있고 미더움이 있지만 무위하고 무형이다. 그것은 전해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대종사」)고 했다. 도는 사람과 그 소유를 어떤 경계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계 없이 툭 터져 있는 까닭에 도와 하나가 되면 찾음과 잃음이 없어진다.---p.126
본성을 지켜라! 인의가 아니라 본성을 따라서 살라! 어떻게? "자기의 본성과 천명대로 방임하는 것"(변무), 그것이 본성을 따라 사는 방법이다. ---p.169
"무엇을 참된 본성이라고 합니까?" "참된 본성이란 가장 진실한 '마음속 마음'이오. 진정 깊은 마음이 없으면 남을 감동시킬 수가 없소." ---p.171
죽음에서 나온 삶이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니 죽음이란 편안한 것이다.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밤과 낮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은 서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은 우주 안에서 기가 순환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무릇 주검 앞에서 곡을 멈춰라, 차라리 노래하라! ---p.192
쓸모없음이란 그 대상의 쓸모가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 그래서 쓸모가 확정되지 않음을 말한다.---p.211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쓸모있음의 쓸모는 잘 알지만, 쓸모없음의 참다운 쓸모를 아는 자는 드물다고 탄식한다. 마음이 번잡하고 두루 매여 있는 탓이다. 사물을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만 보고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p.212
일에 바쁜 자는 고달프고, 하지 않음에 바쁜 자는 한가롭다. 하지 않음의 도에 들면 크고자 하지 않음으로 크게 되고, 이루고자 하지 않음으로 이룬다. 하지 않음의 도는 우주 만물 그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까닭이다. ---pp.231-232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과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됨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됨에 이르면 좋다 싫다 하는 경계가 없어지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되지. 마침내 그대가 어진 사람이 되었구...나. 청컨대 나도 그대를 따르게 해다오."(대종사)---pp.235-236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거스르지 않음이며, 운명 안에 그대로 놓아둠이다.---p.254
진인은 제 마음을 무위에 두어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게 한다. 진인은 바람을 타고 노니는 대붕이다.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고, 세상이 욕망하는 것에서 초연함으로써 마침내 참된 나로 돌아간다. ---p. 271
물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를 딸 삼고, 저 너른 금광호수를 아내로 삼고, 서운산 계곡의 오솔길들을 조카처럼 어여삐 여기며 꿋꿋하게 생계를 꾸렸다. 그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며 나는 마음의 상처들이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고요해졌다. ---p.273
삶은 긴 꿈이다. 이 긴 꿈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끝은 꿈에서 깨어남, 그리하여 화엄 세상,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장자는 그 종착역에 이른 사람을 '진인'이라고 부른다. 삶과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다.
---p.283
○출판사 리뷰
못 말리는 '독서광' 장석주 시인이 『장자』에서 읽어낸 '존재의 기술'
존재함에도 기술이 필요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