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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모저모

예술가는 왜 불행과 고독을 자처하는가

금동원(琴東媛) 2017. 9. 23. 22:14

  ■[장석주의 일요일의 문장] 예술가는 왜 불행과 고독을 자처하는가   

 

  시속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올곧게 사는 건 고독한 일

  예술가의 행복은 보통 사람의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다른 행복

 

  ‘사람들의 생각대로 사는 것은 쉽다. 고독한 가운데 내 소신대로 사는 일도 마찬가지로 쉽다. 그렇지만 진정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이 주는 완벽한 달콤함을 느낀다.’-랄프 왈도 애머슨

 

  시속(時俗)을 따라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타락한 세상의 진흙탕에 뒹굴며 제 잇속이나 챙기며 적당히 산다한들 다들 비슷한 삶을 꾸리니 누가 나서서 나무랄 일도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과 달리 뾰족하고 올곧게 사는 것은 도드라진다. 옛 문인의 문장을 보면 그들도 시속에 타협하며 편하게 사느냐, 아니면 곤핍하더라도 올곧게 사느냐 하는데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옛 문인의 문장을 보면 그들도 시속에 타협하며 편하게 사느냐, 아니면 궁핍하더라도 올곧게 사느냐 하는데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사진= Courtesy of StocSnap

 

  조선 후기의 선비 송문흠(宋文欽)은 ‘시속과 반대로 사는 일’이란 글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괴(怪)요, 남들이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노(勞)다. 시속을 따르면 편하고 출세하는데, 밖으로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안으로 마음에서 지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썼다. 남들 따라 사는 것이 원만한 삶의 방식일 테다. 그렇게 살면 튀지 않을 뿐더러 남들의 질시나 배척을 사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 무리에 묻혀 적당히 살고 싶은 대중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 예술가들

 

  의롭지 않음에 분노하지 않고, 시속의 혼탁에 묻혀 산다. 그렇더라도 소신대로 살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은 남과 달라서 미움을 사고 따돌림 당하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심리다.

 

  나쁜 짓도 하지 않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일에 앞장서지도 않는다. 이게 보통 사람의 마음이요, 대개 더러운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돼, 하고 안도하는데, 이렇게 타협하며 사는 이들에게 송문흠은 까칠하게 묻는다.

  “천금의 보배가 있으면 반드시 궤짝에 감출 것이요 겹겹이 싸서 숨길 것이지만, 이를 시장에다 내다 버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궤짝을 버린 것일 뿐, 그 안의 보배는 내 정말 지키고 있다’라고 한다 해서 어찌 그 보배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삼이사의 마음에 씌워진 위선과 허위의식을 아프게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네 보통 사람은 별다른 고민없이 다중(多衆)의 생각과 이념을 따르며 산다. 무리에 묻혀 사는 게 편한 까닭이다. 시속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올곧게 사는 건 고독한 일이다. 호랑이는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는 포식자인데, 무리짓지 않고 밀림을 혼자 어슬렁거리며 산다.

 

 

무리짓지 않고 단독자의 고고한 고독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호랑이와 예술가는 닮아 있다./사진=Courtesy of Gelinger

 

 

  한 시인은 호랑이를 두고 이렇게 쓴다. “이름 모를 강둑 진흙 밭에 발자국을 남기고/야만적인 거리를 돌파하며/뒤얽힌 미로에서 코를 킁킁거리며/새벽 내음과 사슴 냄새를 맡네.”(보르헤스, 「또 다른 호랑이」) 무리짓지 않고 단독자의 고고한 고독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호랑이와 예술가는 닮아 있다.

 

  ◆ 억지로 그리는 대신 붓대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조선 시대 화가 최북

 

  부귀영화를 좇을 것이냐, 혹은 창조의 고독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기로에서 예술가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 결과가 가난과 절대 고독이라 할지라도 선택은 안 바뀐다. 가난과 절대 고독이 예술 창작의 조건이라고 통찰하는 까닭이다.

 

  18세기 조선 화가 최북과 우리 시대의 빼어난 조각가 권진규를 보자. 최북은 한 권력가가 신선 그림을 요청하자 보지 못한 것은 그릴 수 없다고 단박에 거절한다. 권력가가 “네 목을 쳐도 그리지 않겠느냐?”고 윽박지르자, 최북은 붓대를 들어 제 눈을 찌르고는 “내 눈이 보지 못 하면 그림도 그릴 수 없겠지요.”라고 대꾸한다.

 

  권진규는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 자리 제안도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재능을 시샘하는 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한다. 최북은 장님으로 떠돌며 기행을 일삼다가 술 취한 채 얼어죽고, 권진규는 가난과 병고에 실연의 아픔이 더해져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독에 무너졌다.

  끝내 제 작업실에서 목매어 죽은 권진규는 “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라고 끼적인 문구를 남겼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 과연 예술가는 불행하기만 한 것일까? 예술가의 행복은 보통 사람의 잘 먹고 잘 사는 것과는 다른 행복이다.

 

  시인과 화가들은 가난과 고독으로 얼룩진 형극의 길을 지복의 조건으로 바꾼다. 최북과 권진규가 그랬듯이, 그리고 고흐나 랭보가 보여주었듯이 예술가는 불행과 고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행과 고독이 없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그들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이 주는 완벽한 달콤함을 느끼며 사는 이상한 종족들인 것이다. (출처:조선비즈)

 

  ◆장석주는 스무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서른 해쯤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여름, 서울 살림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일요일의 인문학’ 등 다수의 저작물을 냈다. 최근 40년 시력을 모아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 시인 박연준과 결혼 식 대신 쓴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냈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장석주 저/ 푸르메

 

  ○책 속으로

 

  열자의 인격은 청신하고 기는 고요했으며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거지는 소탈하였다. 열자가 뜻은 약하게 갖고 뼈는 굳게 하니 세속의 일에 연연하는 법이 없고, 남에게 가혹하게 군 적이 없고, 뭇 사람의 마음을 거스를 줄도 몰랐다. 열자는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제 본성을 흐린 적이 없다. 홀로 제 몸을 우뚝 세워 한결같음으로 지내다가 생을 마쳤다. 이것이 진짜 비움이 아닐까? ---p.97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다. 일체의 욕망을 비우고 나면 삶도 죽음도 하나의 흐름일 따름이다. 흐름에 편안히 머물고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나 기쁨도 둘이 아니다. 슬픔이 기쁨이고 기쁨이 슬픔이다. 자래가 말하듯 삶을 기뻐한다면 죽음도 기뻐해야 마땅하다.---p.116

 

  오면 가고 간 것은 되돌아온다는 늑골 아래가 서늘해지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다. 물들도 사람도 흘러간다. 간 뒤에 반드시 새로 온다. 간 것은 망각 속에서 그리움으로 싹트고 온 것은 생짜의 마주침으로 기쁨을 준다. 오면 가고 가면 새로 오는 것들이 날줄과 씨줄로 운명이라는 피륙을 짜는 것이다. ---pp.119-120

 

  앎의 지극함에 이른 사람은 구태여 재물을 쌓아두고 감추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명예와 이익이 요즘 사람들의 배와 그물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감출 수 없는 것을 감추려고 하지 마라. 재물의 울타리 속에 갇히면 마음에 족쇄를 채운 꼴이다 ---p.125

 

   장자는 "도라는 것은 실질이 있고 미더움이 있지만 무위하고 무형이다. 그것은 전해줄 수는 있지만 받을 수는 없고, 체득할 수는 있지만 볼 수는 없다"(「대종사」)고 했다. 도는 사람과 그 소유를 어떤 경계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계 없이 툭 터져 있는 까닭에 도와 하나가 되면 찾음과 잃음이 없어진다.---p.126

 

  본성을 지켜라! 인의가 아니라 본성을 따라서 살라! 어떻게? "자기의 본성과 천명대로 방임하는 것"(변무), 그것이 본성을 따라 사는 방법이다. ---p.169

 

   "무엇을 참된 본성이라고 합니까?" "참된 본성이란 가장 진실한 '마음속 마음'이오. 진정 깊은 마음이 없으면 남을 감동시킬 수가 없소." ---p.171

 

   죽음에서 나온 삶이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니 죽음이란 편안한 것이다. 삶과 죽음 어느 쪽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밤과 낮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은 서로 이어진다. 삶과 죽음은 우주 안에서 기가 순환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무릇 주검 앞에서 곡을 멈춰라, 차라리 노래하라! ---p.192

 

   쓸모없음이란 그 대상의 쓸모가 아직 발견되지 못한 것, 그래서 쓸모가 확정되지 않음을 말한다.---p.211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쓸모있음의 쓸모는 잘 알지만, 쓸모없음의 참다운 쓸모를 아는 자는 드물다고 탄식한다. 마음이 번잡하고 두루 매여 있는 탓이다. 사물을 귀로만 듣고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만 보고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p.212

 

  일에 바쁜 자는 고달프고, 하지 않음에 바쁜 자는 한가롭다. 하지 않음의 도에 들면 크고자 하지 않음으로 크게 되고, 이루고자 하지 않음으로 이룬다. 하지 않음의 도는 우주 만물 그 어디에도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 까닭이다. ---pp.231-232

 

   공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손발과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합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과 하나됨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됨에 이르면 좋다 싫다 하는 경계가 없어지지. 변화를 받아 막히는 데가 없게 되지. 마침내 그대가 어진 사람이 되었구...나. 청컨대 나도 그대를 따르게 해다오."(대종사)---pp.235-236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거스르지 않음이며, 운명 안에 그대로 놓아둠이다.---p.254

 

   진인은 제 마음을 무위에 두어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게 한다. 진인은 바람을 타고 노니는 대붕이다. 바람을 타고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고, 세상이 욕망하는 것에서 초연함으로써 마침내 참된 나로 돌아간다. ---p. 271

 

  물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를 딸 삼고, 저 너른 금광호수를 아내로 삼고, 서운산 계곡의 오솔길들을 조카처럼 어여삐 여기며 꿋꿋하게 생계를 꾸렸다. 그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며 나는 마음의 상처들이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고요해졌다. ---p.273

 

   삶은 긴 꿈이다. 이 긴 꿈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 끝은 꿈에서 깨어남, 그리하여 화엄 세상,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장자는 그 종착역에 이른 사람을 '진인'이라고 부른다. 삶과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다.

---p.283

 

  ○출판사 리뷰

 

  못 말리는 '독서광' 장석주 시인이 『장자』에서 읽어낸 '존재의 기술'
  존재함에도 기술이 필요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 장석주 시인이 『장자』라는 고전 텍스트를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질박한 자기 고백을 통해 새롭게 읽어낸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 산책과 명상 등을 하며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과거 시름과 패배감으로 혼란에 빠졌던 마음이 고요에 들게 한 것은 바로, 오랜 『장자』읽기였다고 말한다. 총 열한 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가려 뽑은 장자의 가르침과 그것이 저자의 실제 생활에 투영된 모습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더없이 유려하고 심미적인 문장 속에서 현대적 의미로 재생된 장자는 다름 아닌 '느림과 비움'을 예찬한다.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며 나는 마음의 상처들이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고요해졌다. 고요해졌으므로 물 같은 사람이 되었다. 물은 유약하나 그 유약함의 덕성으로 세상의 강성한 것들을 능히 이긴다." ―본문에서

  실직 위기가 넘실대고 파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시대에 『장자』를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제 스스로를 '고요의 달인'이라 선언하는 저자는 그 소용을 가늠하기에 앞서 『장자』 읽기를 권한다. 기존 정치와 체제의 질곡에서 벗어나 자연에서의 물아일체를 삶의 이상으로 삼았던 장자에게서 우리가 배우고 익힐 것은 바로 '존재의 기술'이다. 단순히 존재함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오랜 시간 장자를 벗 삼아온 저자는 그 물음에 대해 "느리게 살아라! 비우고 살아라!"라는 압축된 언어로 답한다. 이 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은 절망만이 커져가는 세태 속에서도, 느림과 비움의 길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다독임과도 같은 응원의 찬가이다.

  '시인'에게서 듣는 장자의 가르침,
  '느림을 사는 자만이 비울 수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린다!'

  "나는 걸을 때 느리게 걸으려고 한다. 동면에서 막 깨어난 지리산 반달곰처럼 느리게 걸으면서 천지의 변화를 찬찬히 살피고, 어디선가 회수해서 내게 돌려주는 몸의 물질성을 세세하게 느껴보기 위해서다. 느림은 세계를 온전히 관망하게 하며 세계의 취득을 보다 더 완벽하게 만든다. 아울러 느리게 걷기는 세계에 대한 숙고에 깊이를 더하는 우아한 기술이다." ―본문에서

  이 책에서 저자는 세상 사람이 돈과 명예를 쫓아 바빠지는 일에는 반드시 게을러지고, 그들이 게을리 하는 '한가로움을 구하고 유유자적 하는 것'에는 바빠지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장자의 느림은 시인의 사유 회로를 거치면서 "가장 지혜로운 동물은 동면에 드는 동물이다"라는 문장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시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장자의 가르침은 여느 장자 책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기품과 풍모를 지니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비움이란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소유를 갖지 않는 것. 달리 말하면 자발적 가난에 드는 것. 그냥 버려서 얻는 경지가 아니라 제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 것"이다. 본디 사람은 많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하고, 나아가 남의 것을 부당하게 욕심내다보면 틀림없이 남과 자신을 함께 불행하게 만든다. 여백과 울림의 미가 돋보이는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느림과 비움, 그 둘의 상관관계는 '느림을 사는 자만이 비울 수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린다'라는 단순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청바지를 입고 홍대 앞을 유유자적 어슬렁대는 '장자'를 만나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의 천재,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는 초월과 지혜의 진인, 웃음의 왕, 이미 2천 년 전에 녹색 성장을 주창한 근본 생태주의자. 그가 바로 현인 장자이다. 저자는 2천3백 년 전에 살았던 장자에게 과감히 '청바지'를 입히고 '홍대' 앞을 어슬렁거리게 한다. 이는 『장자』의 현재성이 그만큼 탁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마치 우리의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듯한 장자를 만나볼 수 있게 한다. 


  장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담대하고 탁 트였으며 두루 통하지 않는 데가 없었다. 유유자적 천하를 유람하며 매임 없이 즐겁게 살았다. 그런 장자에게서 삶의 기술을 배운다면 우리 또한 타고난 자연 수명을 다 누리며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장자를 벗 삼아왔듯, 그렇게 곁에 두고 읽으며 장자의 가르침을 되새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