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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 김주연

금동원(琴東媛) 2018. 1. 19. 00:26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김주연/문이당            

 

 

 『사랑과 권력』으로 팔봉문학상을 수상한 김주연이 199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글들을 한데 묶은 비평집. 디지털 욕망과 대중, 아우라가 사라진 벌판에서, 페미니즘의 가능성 등의 3장으로 나누어 대중문학의 확산이 대중문학의 민주화로 가는 길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 문학의 신성성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세심한 '다름'의 세계를 존중하여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여성문학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작가 소개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으며, 1966년 『문학』에 「카프카시론」이 당선되면서 문학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계간 『문학과 지성』 동인으로 활동해 왔으며, 1978년부터 2006년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독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독일 뒤셀도르프대학 객원교수,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우경문화저술상, 팔봉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상황과 인간』, 『문학비평론』, 『변동사회와 작가』, 『고트프리트 벤 연구』, 『독일시인론』, 『새로운 꿈을 위하여』, 『문학을 넘어서』, 『문학과 정신의 힘』, 『독일문학의 본질』, 『독일학 연구』,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 『김주연평론문학선』,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넘어서』, 『독일 비평사』 등이 있다

 

 

  목차

 

  1. 디지털 욕망과 대중
  대중문화 시대의 대중문학
  대중문학에 대한 의문
  문명은, 디지털은 슬프다
  왜 여전히 신비주의인가
  세기말 감성과 신비주의 정신
  자연 앞에서도 그대로 서지 못하고
  억압의 문명에서 바라보는 그리움의 문학
  세기말 한국 시에 대한 질문
  디지털 욕망의 앞날

  2. 아우라가 사라진 벌판에서
  문학과 영성
  시아 구원, 혹은 시의 구원
  보석과 애벌레
  하나님의 슬픔, 문학의 슬픔
  신성성, 그 총체적 세계관의 세계
  초월 속의 평화
  신앙과 애정

  3. 페미니즘의 가능성
  페미니즘, 그 당연한 욕망의 함정
  욕망인가, 자아인가 : 뿌리에 관하여
  불꽃과 재를 지나서
  어머니, 혹은 에고와의 싸움
  욕망의 정화를 꿈꾸며
  성찰되는 여성성
  여성 시인들의 작은 성채
  기술정보 사회 안의 고독

 

 

  ○책 속으로

 

 

  아우라를 반드시 영성으로, 아니 영성을 꼭 아우라라는 개념 아래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도 이견은 있을 수 있다. 아우라가 갖는 분위기가 항상 종교적이라고만 할 수 없음에 비해 영성이라는 낱말 아래에서는 종교적 엄숙성의 공기가 감돌기 때문일까. 그러나 벤야민의 아우라에 비교의적 내지 신비주의적 요소가 배어 있다고 한다면, 이 경우 종교성은 보다 넓게 해석되어 무방할 듯도 싶다.--- p.147

빨리빨리! 그러나 그렇게 빨리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은 긴요해 보이지도 않고, 진지하게 행해진 일도 없다. 속도가 주는 편리함이 너무 좋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속도 메커티즘의 이러한 발달이 문학에서 문체의 변화-속도감 있는 문장의 발전을 유발하리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디지털 욕망의 긍정적 측면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디지털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은 속도성 이외에 이른바 일차원성(one dimension)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있다. 이 문제는 인터넷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홈 페이지를 비롯해 각종 정보의 소통 형태와 그 현장을 보자. 거기에는 남녀·노소·상하의 아무런 구별과 차이도 없을 뿐 아니라 익명성까지 보장되어 있다. 24시간 저장된 채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열려 있는 이 공간은 그야말로 세계의 온갖 요소를 인간의 욕망 안으로 수렴시키는 일차원의 평면이다.
--- p. 135 

 

 

  ○출판사 리뷰

 

 

  이 책의 내용은 크게 제1장 "디지털 욕망과 대중", 제2장 "아우라가 사라진 벌판에서", 제3장 "페미니즘의 가능성"으로 나누어진다.

  제1장 디지털 욕망과 대중의 화두를 떼는 「대중문화 시대의 대중문학―긍정과 부정, 수락과 우려의 양면성」과 「대중문학에 대한 의문」은 세기말과 밀레니엄에 직면하여 보편화된 불안과 희망을 언급하면서, 대중문화 시대의 긍정적인 속성과 부정적인 속성의 양면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문명은, 디지털은 슬프다―김주영 문학의 시대 / 비시대성」은 작가 김주영의 작품 세계를 초기 소설과 장편 『화척』을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는 글이다. 「왜 여전히 신비주의인가―한승원 중단편전집」은 한승원의 작품을 살펴봄으로써 신비주의를 진단하는 글로서, 샤머니즘이든 불교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본질적 속성이 오늘날 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진실하고 또 인간을 위해 바람직스러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비판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세기말 감성과 신비주의 정신―남진우의 『타오르는 책』」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으나 우리의 샤머니즘과 같은 토속적 정서와 무관한 곳에서 비현실적 신비성을 시의 현실로 붙들고 있는 시 세계를 다룬다. 「자연 앞에서도 그대로 서지 못하고―신대철의 시집 『개마고을에서 온 친구에게』」는 고향의 자연 속에선 불가능했던, 분열된 자아의 하나되기를 얼음의 극지에서 성취한 시인의 새로운 내적 통일과 안정을 축하하고 있다. 「억압의 문명에서 바라보는 그리움의 문학―오생근 비평집 『그리움으로 짓는 문학의 집』」에선 평론가 오생근의 글이, 서로 다른 작가의 세계를 기계적으로 절충시키지 않고, 모든 다른 것들이 서로서로 그리워하도록 하는 "그리움의 집"을 짓고 싶어한다고 읽어 내고 있다. 「세기말 한국 시에 대한 질문」에선 이태동과 김용택의 시를 살펴봄으로써 세기말 한국 시가 보다 다양한 세계들을 추구하는 가운데에서 시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것임을 강조한다.

 

 


 「디지털 욕망의 앞날―1990년대 소설의 성취와 새 세상」은 세기말의 우리 소설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전망을 가늠해 보는 글이다. 디지털 문화의 속성이 속도성과 일차원성, 여성성을 지향한다고 보는 저자는 생태계의 파괴와 생명의 존엄성 상실이 우려되고 있는 세상에서 문학은 디지털과 자연이 불화 없이 만나는 생태계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제2장 아우라가 사라진 벌판에서의 첫 글 「문학과 영성」은 문학의 종교성을 서술하면서 상상력이란 영감 즉 영성이며, 이 힘이 글의 창조성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와 구원, 혹은 시의 구원―정현종·오규원의 새 시집들」은 정현종 시의 잠언적 진술을 통해 시가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사물들과 정경들을 즉자적으로 들추어내면서 거기에 시인의 내면 시선을 교차시키는 오규원 시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진솔한 마력을 환기시키고 있다. 「보석과 애벌레―소설과 신성의 관계를 주목하여」는 김원일의 장편소설 『사랑아 길을 묻는다』, 이승우의 중단편집 『목련공원』, 정찬의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을 통해 한국 문학이 정신사의 본루에 앉아 인간의 본질을 그 총체적 측면에서 다루는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하나님의 슬픔, 문학의 슬픔―정찬의 『세상의 저녁』」은 하나님의 슬픔과 눈물이 공감되는 순간을 마련하는 문학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신성성, 그 총체적 세계관의 세계―마종기·황동규·이시영의 시에서」에선 일상적 자아와 구분되는 시적 자아가 시를 읽는 이들의 모든 억압을 풀어 주면서 자유스러운 감동을 빚어내는 시적 형태일 뿐, 어떤 체계와 제도를 연상케 하는 우상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초월 속의 평화―마종기의 『이슬의 눈』」에선 범상한 일상의 체험을 통해 단정하게 묘사되면서 획득된 아름다운 시의 공간을 소개하고 있다. 「신앙과 애정―김원일 장편소설 『사랑아 길을 묻는다』」에선 작가의 귀중한 도전을 통해 문학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3장 페미니즘의 가능성은 「페미니즘, 그 당연한 욕망의 함정―21세기 문학의 발전적 전망과 관련하여」로 시작된다. 1995년 이후에 발표된 여성 작가들의 글들을 대상으로, 거기에 나타난 성 문제의 구조와 성격을 장르별로 고찰하고자 하는 이 글은 소설가 은희경, 공지영, 서하진, 김인숙, 전경린, 김연경, 이남희, 송경아, 차현숙, 김이정 등과 시인 김혜순, 박라연, 최영미, 신현림, 김언희, 양애경, 이선영 등 그리고 평론가 김미현, 김영옥, 신수정 등을 세심하게 분석해 낸다. 「욕망인가, 자아인가: 뿌리에 관하여―김규린의 첫 시집 『나는 식물성이다』」는 성숙으로 가기까지의 시인의 치열한 성장 기록을 다루고 있다. 「불꽃과 재를 지나서―서하진의 소설들」에선 주로 30대 여성들을 화자로 설정한 작가가 섹스-죽음이라는 피상적인 신화적 해석의 범주를 극복하고자 하는 흔적을 지적한다. 「어머니, 혹은 에고와의 싸움―김향숙의 가족소설 『물의 여자들』」에선 가족소설의 전형을 일례화하고 있다. 「욕망의 정화를 꿈꾸며―이나명 시집 『그 나무는 새들을 품고 있다』」는 꽃과 나무의 병존에서 발견되는 화평의 세계가, 꽃이라는 선험적 시적 자아를 이루고 있는 시인의 궁극적인 소망임을 분석해 낸다. 여성 시인들을 묶어 고찰하고 있는 「성찰되는 여성성―노향림과 나희덕의 시」, 「여성 시인들의 작은 성채―김정란·김혜순·박라연」, 「기술정보 사회 안의 고독―이원·최정례의 시」에선 페미니즘의 깊이와 넓이가 전 방위에 걸친 새로운 힘으로 새롭게 인식될 필요가 있음이 강력하게 역설되고 있다.

 

 


  평론가 김주연은 이미 수 권의 비평집을 통해 1990년대 이후의 한국 문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내면서 대중문학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의 긴장 가운데 열려질 역동적인 움직임을 예측한 바 있다. 이번 비평집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에서 이제 그는 대중문학의 확산이 반드시 대중문학의 민주화로 가는 길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문학이, 언어 질서라는 섬세하면서도 거대한 조직의 의미가 무력화되고 단순한 메시지 기능의 지시적 언어로 퇴화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면서 문학의 신성성을 회복해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문학의 언어는 이제 구원과 무관한 자리에서는 문학의 올바른 정당성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문학과 신성성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에 소홀했던 학계를 비판하면서, 기존의 윤리와 도덕의 지반이 흔들리고 모든 가치를 재고하기를 요청하는 세기말에 직면하여 문학의 영성의 씨앗을 새로운 토양 위에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 비평집 전체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김주연은 세심한 "다름"의 세계를 존중하고자 한다. 그가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여성문학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여성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으로 여성 평론가들의 대거 등장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것은 남녀의 역할 구분이라는 도식화에 도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여성소설과 여성시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더 이상 남성적 시각에 맡기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소산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새로운 세기의 여성문학이 보다 총체적 인간관·세계관을 준비해야 하며, 겸손한 성의 상호 이해를 향해 새롭게 도전해야 한다고 자신의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기를 잊지 않는다.

 


  한국 문학을 이끌어 온 중요한 인물인 김주연은 이번 비평집으로 문학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을 독자들에게 확인시켜 주면서도 그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부단히 검토하고 쇄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귀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 리뷰]

 

  ■ 아우라 없는 시대

   chaeeb | 2001-07-05 |

 

  본 비평집은 책 제목이 잘 나타내 주듯이 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긴 역사적인 안목에서 바라본다면 세기의 전환기에는 당연히 있어야만 하는 숙명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컴퓨터로 글쓰기, 진정한 문학성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아니라 대중성으로 평가받는 시대, 페미니즘의 문제등 현대의 문학에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점과 가능성들을 먼저 말하고 있다. 특별히 본 비평집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영성이 사라졌다는 것, 아우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종교에서 영성이 사라지면 더 이상 종교가 아니듯 문학에서 아우라가 사라졌다는 것은 더이상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째든 이 책은 "진정한 문학이란 무엇인가? 대중적인 것이 문학인가? 아니면 대중적이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 아우라가 있고 세계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는 것이 문학인가?"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아우라를 반드시 영성으로, 아니 영성을 꼭 아우라라는 개념 아래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에도 이견은 있을 수 있다. 아우라가 갖는 분위기가 항상 종교적이라고만 할 수 없음에 비해 영성이라는 낱말 아래에서는 종교적 엄숙성의 공기가 감돌기 때문일까. 그러나 벤야민의 아우라에 비교의적 내지 신비주의적 요소가 배어 있다고 한다면, 이 경우 종교성은 보다 넓게 해석되어 무방할 듯도 싶다.

 

 

 

  ■[조용호의 나마스테!] ‘사라진 낭만의 …’ 펴낸 김주연 숙명여대 석좌교수

 

  “정말 절망스럽다면 끝까지 부딪혀라! 거기에 답 있고 위로 있어”

  -입력 : 2013-11-04 20:46:36

 

 

  담쟁이 잎이 검붉다. 아직 햇빛이 그리 야윈 건 아닌데도 겨울을 예감하고 서둘러 연록의 청춘을 지우는 담쟁이의 생존법을 탓할 수만은 없다. 사진 속에서 김주연(72) 숙명여대 석좌교수는 담쟁이를 배경으로 검은테 안경을 잠시 들추고 있다. 먼 청춘을 되짚는 눈빛이 아득하다. 담쟁이가 타고 올라간 벽은 서울역사박물관이다. 이곳은 김 교수가 반세기 전 다녔던 서울고등학교 자리이기도 하다. 그가 지난달 펴낸 ‘사라진 낭만의 아이러니’(서강대학교 출판부)를 계기로 광화문에서 오랜만에 만난 날이었다.

 


  평준화 이전 서울고는 경기고와 더불어 수재가 아니면 입학하기 힘든 명문고였다. 혜화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난 6·25전쟁으로 이후 초등학교를 4곳이나 전전해야 했던 김 교수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돈암초등학교에 편입해 졸업할 수 있었다. 불쑥 졸업반에 나타난 정체 모를 아이가 서울고 입학원서를 쓰겠다고 하는 것도 미심쩍었는데 정작 담임이 밀었던 학생들은 다 떨어지고 혼자 합격했다고 한다. 합격 사실을 알리러 갔더니 담임이 축하는커녕 “붙을 만한 애들은 떨어지고 이상한 놈이 됐다”고 했다던 말, 눈물이 나올 만큼 서운했다고 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다니, 어린 마음을 두고 말 한마디 함부로 할 일 아니다. 그 ‘이상한’ 아이가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를 거쳐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이자 원로 인문학자로 살고 있으니 더 말할 것 없다.

김현, 김치수, 김병익 등과 더불어 ‘문학과지성’ 동인 ‘4K’로 꼽히며 한국의 대표적 인문학자로 살아온 김주연 숙명여대 석좌교수. 그는 “요즘 인문학이 많은 사회적 관심 아래 조명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물성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인문학의 현장은 바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김범준 기자

 

  “솔직히 청춘을 위로하는 요즘 자기계발서들 너무 싫습니다. 달콤한 말로 토닥인다고 힘들어하는 청춘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정말 그들이 아프고 절망스럽다면 끝까지 가게 밀어붙여야 합니다. 차라리 그곳에 답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부딪쳐서 끝까지 가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입니다.”

 

  그가 이번에 펴낸 책의 첫 장은 시대만 다를 뿐 나란히 29세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와 소설가 김유정(1908∼1937), 이들보다 앞서 불과 스물여섯 살에 세상을 떠난 독일 소설가 볼프강 볼헤르트(1921∼1947)가 집필한 ‘절망의 노래’로 시작된다. 채 서른 살에 닿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청춘들이지만 이들이 지상에서 부른 노래들은 불멸의 생명을 얻었다. 기형도가 살다간 청춘기는 1980년대라는 암울한 지형이었다. 캠퍼스에는 최루탄 연기 걷힐 날 없었고 시인 자신의 실존적 가난도 어둠을 더했다. 김 교수는 “기형도는 자기 시대의 공포와 그 분위기에 짓눌렸으나 물리적 저항 대신 시와 노래의 위대성을 모색하였고, 결과적으로 승리하였다”고 썼다. 김 교수가 기형도의 승리로 예를 든 대표적인 시는 널리 알려진 ‘빈집’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보다 더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김유정. 그는 소설 ‘만무방’에서 절망을 유머로 다스린다. 빚만 잔뜩 진 채 굶주림에 찌든 집을 떠나면서 젓가락이며 밥사발 등을 싸우지 말고 잘 나누어 가질 것을 당부하는 성명서를 빚쟁이들에게 남긴다. 김유정 못지않게 혹독한 나치 시대를 살다간 볼헤르트는 투옥과 석방과 전쟁터를 넘나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별 없는 세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사진을 찍고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낳으며 두려움 때문에 여자 속으로, 항상 여자 속으로 파고들며 두려움 때문에 심지를 기름에 담그고 불을 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바보입니다.”

 

  김 교수는 “역설의 패러독스와 반어, 유머가 뒤섞인 놀라운 공포의 진술”이라고 보았다. 나치의 폭압 정권에서 감옥을 들락거리며 사형의 위기에까지 처했지만 나치처럼 주먹을 쥐는 대신 인문학적 저항을 택했고, 그 노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김 교수가 20대에 요절한 이들 문인을 거론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청춘의 아픔을 그저 위로하는 것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다는 그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취업이 되지 않는 물성화된 절망을 극복하는 건 같은 차원에서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지만 다른 층위에서 정신적 충격을 가하는 ‘낭만’은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노래로 솟구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이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실현성이 작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또는 그런 심리 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라고 풀이돼 있다. 흔히 ‘현실적’ 혹은 ‘이성적’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맥락이다.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채 치기를 부리는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낭만의 본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통해 수입되면서 한 번 굴절된 데다, 이를 받아들인 한국 지식인들이 퇴폐와 허무의 이미지로 낭만이라는 단어를 소모했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본다.

 

  “낭만의 본질은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파괴와 생성을 거듭하는 겁니다. 진보라는 건 자기 쇄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방법에 대한 이름이죠. 보수와 진보는 같이 얽혀서 가는 건데, 낭만이 사라진 우리 정치는 물론 문학이나 문화 모두 말로만 진보 운운하지 사실 모두 보수에 가깝습니다. 다 머물러 있는 걸 좋아하니까.”

 

  김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낭만이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선행돼야 한다. 그는 합리적 이성만이 유일한 도구인 계몽의 산물로 나타난 현대 문명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무르고 있고,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정체가 드러났다고 판단한다. 계몽에 대한 반성처럼 보이지만 나타나는 건 좀비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극대화라는 얘기다. ‘낭만’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피히테나 훔볼트 같은 인문학자들이 청춘들을 정신적인 창조성의 공간으로 유도하기 위해 ‘학생건달조합’(Studentenburschenschaft)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 조합의 기치는 “술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고, 공부에 취하라”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일상 세계 질서의 반복으로부터는 어떤 새로움도 창출할 수 없으니 디오니소스의 세계에서 창의성을 기대했다는 얘기다.

 

  세계 무역 규모 10위 안에 드는 데도 늘 쫓기듯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낭만을 거론했다가는 몽상가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스펙을 쫓느라 허덕거리는 대학가의 청춘들, 창의성과 새로움에 불을 지필 낭만의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에게 19세기 독일의 ‘학생건달조합’이라도 수입해줘야 하는 걸까. 보수니 진보니 편만 가를 뿐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판에도 낭만의 힘은 시급한 듯하다. 광화문 골목길 한적한 카페 이층에서 창문으로 비껴드는 석양을 받으며 오래 침착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던 인문학자 김주연 교수. 그는 이 지면에 다 전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 끝에도 다시 낭만과 영성을 말했다.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영성에 대한 외침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문학의 상징인 낭만성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부서지고 새로워져야 하는 과정이 긴요한 만큼 낭만성에 대한 그리움은 절실합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