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영화 이야기

1987 (2017)

금동원(琴東媛) 2018. 1. 21. 02:57

  지난해  5.18 광주 사태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가 천만관객을 돌파했을 때 가졌던 생각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적어도 이 영화(택시운전사)를 통해 가슴아픈 역사적 현장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며 동시대의 기억을 환기해볼만 하다는 것이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뜨겁고 치열했던 1987년을 그려낸 영화 <1987>이 지금 700만명 정도 관람했다고 한다. 이 영화 역시 천만관객 이상이 그 해의 뜨겁고도 치열했던 가슴아픈 기억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었으면 한다.

  1987년 6.29 선언의 그 날도, 이한열군의 장례식 현장도,  남녀노소, 대학생 직장인 할 것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던 그 날도 잊을 수 없다. 체류탄 가스의 끔찍한 공포와 통증도 , 지난 해의 광화문 촛불 집회도 잊을 수 없다.

  역사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대적 소명과 정의란 무엇인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함은 어디까지인가. 세대마다 겪어내고 책임져야 할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아까운 젊음들이 보여준 가슴아픈 죽음과 용기, 그 시절을 함께 겪어내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낸 사람들의 신념과 희생정신, 우리 모두의 뜨거웠던 이야기이다. 함께 질렀던 피빛 함성소리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떠올려보면, 1987년에 결혼한 나는 개인적으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1987년을 간직하고 있다. 역사라는 큰 수레바퀴와 맞물려 우리는 그렇게 작은 수레바퀴가 되어 흘러가고, '지금'을 아직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참치)

 



1987(2017)

1987 : When the Day Comes


감독) 장준환                 

주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박처장(김윤석)의 주도 하에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가는 경찰. 그러나 현장에 남은 흔적들과 부검 소견은 고문에 의한 사망을 가리키고, 사건을 취재하던 윤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한다. 이에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등 형사 둘만 구속시키며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한편, 교도소에 수감된 조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카인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하게 되는데…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







  [ ABOUT MOVIE ]

   1987년 1월 한 대학생의 죽음이 6월의 광장으로 이어지기까지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해, 1987년을 그려내다!


  1987년 6월,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불의에 맞섰던 뜨거웠던 시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 <1987>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그때를 살았던 사람들에서 찾는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경찰과 권력 수뇌부, 이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신념을 건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 광장의 거대한 함성으로 확산되기까지. 가슴 뛰는 6개월의 시간을 <1987>은 한국영화 최초로 그려낸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또 하나의 의문사로 덮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고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접했던 모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했던 이들의 행동이 연쇄적으로 사슬처럼 맞물리면서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냈다. 영화 <1987>은 권력 아래 숨죽였던 사람들의 크나큰 용기가 만들어낸 뜨거웠던 그 해, 1987년을 그려낸다.






  드라마틱했던 1987년, 격동의 시간, 뜨거웠던 사람들
  1987년의 그들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로 생생하게 다가서다!


  영화 <1987>은 한 젊은이의 죽음이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흐름으로 확장되었는지, 1987년을 뜨겁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기록 속에 박제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사람들의 드라마로 가득 차 있고 오늘의 한국 사회의 주춧돌을 놓은 뿌듯하고 소중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영화 <1987>은 시작되었다. 졸지에 시신으로 돌아온 스물두 살 아들을 차갑게 얼어붙은 강물 속에 흘려 보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슬픔에서 1987년의 시간은 시작된다. 골리앗같이 강고한 공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대공수사처장(김윤석), 화장동의서에 날인을 거부한 검사(하정우), 진실을 보도한 기자(이희준), 막후에서 진실이 알려지는데 기여한 교도관(유해진)과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이들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평범한 대학생(김태리), 이밖에 박처장의 명령을 받들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수감되는 대공형사(박희순) 등 각자 다른 위치에서 부딪히고 맞물리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격동의 6월로 완성된다. <1987>은 실재했던 이들의 드라마가 가진 생생함에 덧붙여 그들이 겪었을 법한 사건과 감정의 파고를 손에 잡힐 듯 따라가며,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6월 광장의 시간은 불가능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숨죽였던 이들의 용기가 지닌 가치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까지
  영화 <1987>의 주인공들이 릴레이하듯 등장하며
  한 스크린에서 그려낼 1987년의 이야기!


  역사의 주역은 위인들만은 아니다. 가장 큰 변화는 다수의 의지가 모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한국 현대사는 유독 그런 순간들이 많았고 민주주의의 시계를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게 만든 1987년은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시간이었다. 영화 <1987>에 출연한 배우들 역시 분량의 많고 적음을 떠나 1987년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릴레이로 주인공을 맡아 매 순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그들이 연기한 단 한 명의 인물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 해의 6월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인물의 선택 사이, 행간에 놓인 감정의 변화까지 따라가는 영화 <1987>에서 인물 하나하나를 연기한 배우들의 면면은 영화 <1987>을 주목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추격자>와 <황해>로 강하게 격돌하며 한국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투톱 연기를 선보였던 김윤석과 하정우는 사건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장과 이에 맞서 부검명령서를 발부하는 검사로 재회해 극 초반의 에너지를 책임진다. 그리고 일명 ‘비둘기’로 불렸던 재야인사의 옥중서신을 바깥으로 전달하는, 실존 인물에 기초해 그려진 양심적인 교도관 한병용 역은 인간미의 대명사 유해진이 맡아 연기한다. 그의 조카로 삼촌이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고 대학 입학 후 동료 학생들의 시위를 보며 갈등하는 87학번 신입생 연희 역에는 강한 의지와 당찬 면모를 동시에 갖춘 김태리가 출연한다. 박처장의 명령을 받들다 수감되는 대공형사 조반장은 박희순이, 서슬 퍼런 보도지침에 맞서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기자 역에는 이희준이 출연해 사슬처럼 맞물려 이어지는 그 해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완성한다.


  이들 외에도 도피 중인 재야인사 역의 설경구, 박처장의 오른팔인 유과장 역의 유승목, 수감 중 한교도관의 도움으로 진실을 담은 옥중서신을 적어 보내는 민주화 인사 이부영 역의 김의성, 정권 실세인 안기부장 역의 문성근, 박종철의 아버지로 심장이 끊어지는 슬픔을 손에 잡힐 듯 전한 김종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특별취재반을 구성한 일간지 사회부장 역의 고창석, 조카의 시신부검 현장에 가족대표로 입회해 관객을 함께 눈물짓게 하는 삼촌 역의 조우진, 사건 당시 경찰 총수인 치안본부장 역의 우현. 그리고 어떤 작은 역이든 좋으니 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밝혀 일명 셀프 캐스팅이 된 일간지 사회부장 역의 오달수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 역의 정인기 등 <1987>의 매 장면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연기로 그때 그들을 살려내는 명배우들로 가득하다.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들이 기꺼이 뜻과 마음을 모아 만들어낸 <1987>은 재미와 감동 속에 관객들을 그 때 그 시간의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지구를 지켜라!>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의 장준환 감독,
  < 그때 그사람들> <만추> <암살>의 김우형 촬영감독을 비롯한
   한국영화의 오늘을 대표하는 스태프들
  <1987>의 세계를 창조하다!


  영화 <1987>은 캐스팅뿐만 아니라, 스크린에 구현되는 모든 것을 책임지는 스태프 크레딧 또한 믿음직스럽고 탄탄하다. 틀을 뛰어넘는 발상과 장르 영화의 매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지구를 지켜라!>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의 장준환 감독. 그가 한국 현대사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영화 <1987>에 호기심이 생기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하나의 장르에도, 기존의 문법에도 갇히지 않는 영화 세계를 가진 그이기에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기초한 <1987> 또한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영화적 재미와 다이내믹함으로 관객을 만날 것을 약속한다.


  또한 인물들의 감정과 당시 시대의 공기까지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촬영감독은 김우형이 맡았다. 그는 <바람난 가족> <그때 그사람들> <만추>와 <암살> 그리고 최근작 <더 킹>까지 사건의 긴박함과 인물의 감정, 둘 다를 놓치지 않는 촬영을 선보였다. 장준환 감독에 의하자면 마치 카메라가 또 하나의 배우인 것처럼 <1987>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영화 <1987>이 때로는 관조적으로 때로는 인물의 내면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 같이 관객의 시선을 안내할 것임을 예고한다.


  한편 그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들은 많은 데에 반해, 정작 당시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아서 영화적으로 가장 재현하기 어려운 시대로 꼽히는 80년대 후반의 공간을 실감나면서도 완성도 있게 만들어야 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느와르의 공간, <협녀, 칼의 기억>의 고려시대를 기품 있고 스타일리시하게 만들었던 한아름 미술감독이 맡았다. 그때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당시로 돌아가게 하는 설득력 있는 시간 여행이 되어야 하고, 그 시절을 모르는 젊은 관객층에게는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인 동시에 인물의 속성을 보여줘야 하는 난제가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섬뜩하게 감도는 남영동 대공분실, 위협적인 카리스마가 관객에도 느껴져야 할 박처장 사무실, 그리고 뜨거운 열기가 하나로 모이는 6월의 광장까지. <1987>의 프로덕션 디자인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다.


  또한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수많은 캐릭터의 비주얼을 책임진 이들은 <박하사탕> <오아시스> <살인의 추억> <형사> <마더> <아저씨> 등 수많은 한국영화들에서 분장을 통해 캐릭터의 성격까지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베테랑 황현규와 <곡성> <굿바이 싱글> <터널> <수상한 그녀> <써니> <추격자> 등 장르를 불문하고 캐릭터에 최적화된 의상을 선보였던 채경화로 <1987>이 실감 그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갖춘 인물들을 만나게 해줄 것임을 예감케 한다.






  [ PRODUCTION NOTE ]

  사실적인 접근에서 드라마틱한 순간까지
  배우와 같이 호흡하는 카메라 워킹으로
  1987년, 그때 그 시절의 진짜 이야기를 담아내다!


   영화 <1987>은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진정성 있게 화면에 담을 것인가에 많은 중점을 두었다. 제작진은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보다는 역사적인 사건의 진실을 대하는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 익숙한 화면 비율인 1.85:1을 선택하고, 사실적인 접근으로 시작해 드라마틱한 순간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영화의 전반부는 필름 영화가 주를 이뤘던 80년대 시절에 나온 칼 자이즈 하이스피드 렌즈를 호환해서 사용하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사실적인 접근을 위해서 핸드헬드 촬영으로 인물의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김우형 촬영 감독은 마치 카메라로 연기를 하듯이 배우의 호흡, 눈빛, 고개 돌림 하나 하나를 배우와 같이 호흡하면서 매 순간 느껴지는 감정들, 타이밍을 담아냈다. 또한 인물들과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감정선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자 망원 줌과 접사 렌즈를 통해서 카메라가 물리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전통적인 촬영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사실적인 접근으로 시작한 <1987>은 점점 많은 인물들이 쌓여가면서 드라마의 따뜻한 온기가 가미된 톤으로 변하게 된다.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실제 사건의 재현과 그 안에서의 드라마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비주얼적으로 서로 충돌하면서 잘 융합되는, 드라마틱한 순간까지 카메라의 시선은 관객들에게 그때 그 시절의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해줄 것이다.


  1987년으로 가는 시간여행,
  작은 공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은 철저한 고증으로
   드라마틱한 <1987>의 세계를 완성하다!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은 그 시절을 겪었던 관객들이 영화를 봤을 때, 당시를 회상하고 감동 받을 수 있기를 바랬고, 1987년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자 했다. 제작진은 수천 장이 넘는 자료를 찾으면서 최대한 리얼하게 강박처럼 고증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1980년 후반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45,000평의 부지에 오픈 세트를 지었고, 뜨거운 열기가 하나로 모였던 연세대학교 정문부터 시청 광장, 명동 거리, 유네스코 빌딩, 코리아 극장 등을 되살려냈다.


  건물의 사이즈부터 건축 자재 하나까지도 실제 당시에 사용되었던 소재를 사용했고,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소재들은 해외 루트를 통해 수급하는 등 최대한 리얼리티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고증이 어려운 경우, 공간과 인물의 분위기에 맞춰 미술적인 재해석을 가미했다. 대공수사처 박처장실은 그의 카리스마와 권위가 느껴지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남영동 고문실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있었지만 복도나 기타 공간들은 외적으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고문실 벽 타공판의 타공 위치부터 욕조, 세면대, 선반까지 흡사하게 재현해냈고, 남영동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문서, 작은 서체까지도 섬세하게 구현하며 공간이 주는 분위기, 작은 공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1987>의 공간 중 가장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곳은 바로 명동성당이다. 실제 각종 집회와 민주화를 촉진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던 명동성당 내부에서의 촬영이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허가되었고,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스크린에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이 아닌, 고증과 재해석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생동감 있는 공간들을 재창조해낸 <1987>은 1987년으로의 특별한 시간여행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실감 그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갖춘 인물을 그려내다!                                                                                                                                                                                                                                                                                                                                    
캐릭터를 중심으로 충실한 고증을 통해 실제에 가까운 1987년의 스타일을 완성하다!


  1987년을 배경으로 한 <1987>은 불과 30년 밖에 지나지 않은 과거이기에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 어색하지도, 너무 튀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미션이었다. 채경화 의상 감독은 지금의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87년의 옷들은 과거의 옷이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새 옷이었을 수 있다는 점에 포인트를 두고 준비했고, 비슷한 직업 군으로 묶인 캐릭터 군단의 특징이 잘 살아날 수 있도록 군단 별 콘셉트를 잡아 <1987>의 의상을 만들어냈다.


  대공수사처의 대표 캐릭터인 박처장(김윤석)은 장준환 감독이 원하는 건장하고 큰 산 같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옷 속에 패드를 넣어 어깨와 전체적인 몸집을 많이 커 보이게 했다. 대공수사처에 맞서는 최검사(하정우)는 옅은 베이지 등의 따뜻한 컬러를 살리고 루즈한 핏으로 80년대 옷의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어 검사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리되, 딱딱한 검사보다는 따뜻한 검사라는 느낌에 초점을 맞추었다.


  평범한 시민의 대표 캐릭터 연희(김태리)는 연약한 느낌을 배제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보이쉬한 느낌을 살렸다. 중간중간 컬러감을 주며 포인트를 살리되 다른 사람들과 섞였을 때 크게 튀지는 않도록 구상했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당시 전투경찰(전경) 안에서 무술 고단자들로 구성된 특수한 조직, 백골단의 의상은 그들이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 스노우 진과 청자켓으로 통일해, 그 청자켓을 보면 사람들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무시무시한 존재로서의 모습을 표현했다.


  분장 또한 얼마나 실제와 가깝게 표현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실제 인물과 최대한 비슷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그 덕에 분장팀은 고증에 대한 고민과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분장을 맡은 황현규 실장은 배우들이 그 시대 사람처럼 연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모가 87년의 사람 같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분장 콘셉트를 잡았다. <1987>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인물이 바뀔 때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빠르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또한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고 그 점에도 특별히 신경 썼다.


  영화 속에서 외적으로 가장 많이 변신한 인물은 김윤석이 연기한 박처장이다. 실존 인물과 최대한 닮게 만들기 위해 이마의 앞머리 선을 올려 매서운 눈빛이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특수분장을 통해 고집과 권위가 읽히는 입매를 만들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 김윤석의 캐릭터 변신이 완성되었다. 실제 촬영 당시 현장에서는 김윤석의 외모가 눈에 띄게 달라 보여 모두가 만족했었다. 관객들이 받아들일 때 불편하지 않은 것, ‘그 시절에 그랬을 것 같아’라고 하면 성공한 고증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작업하며, 현실적인 부분과 드라마틱한 부분을 적절히 섞어 밸런스를 맞춘 <1987>의 스타일은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토요판] 특집 영화 ‘1987’ 감독·작가·제작자 인터뷰

  “1987’, 영화로만 끝나면 안돼…현재 반성하는 계기 됐으면”


 장준환 감독
  “꽃다운 청년이 국가폭력 앞에
   왜 쓰러져갔는지 묻고 싶었다
   아직 못 온 ‘그날’ 고민 계기 되길”

  김경찬 작가
  “민주화 위해 치열하게 싸운 분들이
   있었다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영화 흥행보다 실화 안 깨려고 애써”

  이우정 대표
  “환희에 찬 역사적 순간 87년을
   잘 기록한 기념물이 되길 바라
   다른 영화 비해 캐스팅에 행운”

“어려운 시대를 헤쳐온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만든 김경찬 작가(왼쪽부터)와 장준환 감독,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가 영화가 개봉한 다음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국립미술관 뜰에서 만나 청와대 뒤의 북악산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려운 시대를 헤쳐온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어요.” 6월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만든 김경찬 작가(왼쪽부터)와 장준환 감독,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가 영화가 개봉한 다음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 국립미술관 뜰에서 만나 청와대 뒤의 북악산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지난 연말 개봉된 영화 <1987>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을 다룬 첫 대중적 상업영화일 뿐 아니라 영화 형식에서도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한두명의 주인공이 영화를 끌어가는 보통의 형식이 아니라 다수의 주인공이 바통을 이어가며 주역을 맡는 방식이다. 게다가 관객들의 반응도 좋다. 13일까지 누적 관객수가 5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작가, 영화사 대표를 한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영화 <1987>은 6월항쟁을 배경이 아니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실존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면에서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영화적 감동이 살아 있다. 실화의 진지함과 극적인 재미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감독(장준환·47)과 작가(김경찬·47), 영화사 대표(이우정·47)를 지난달 28일 서울 삼청동의 카페 ‘라디오엠’에서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신파든 국뽕이든 무슨 말을 붙이든 간에 ‘같이 울어주세요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1987>의 장준환 감독은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신파든 국뽕이든 무슨 말을 붙이든 간에 ‘같이 울어주세요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1987>의 장준환 감독은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영화를 보고 감동받았다는 댓글이 많더라. 에스엔에스(SNS) 반응도 좋고.


  장준환(장) “댓글들이 대부분 길게 올라오더라. 당시 직접 겪은 분들은 특히 감회가 더 새로운 거 같다. 어떤 이는 아이들과 같이 봤는데 딸이 자기를 안아주면서 ‘고맙다’고 얘기하더라고 적었더라. 그런 것을 보면서 나도 눈물이 났다. 한편으로는 보람도 있고.”

 
  김경찬(김) “사람들 가슴속의 뜨거운 것을 끄집어낸 것 같다. 2016년 겨울의 경험이 있어서 세대간 공감대도 만들어진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 영화를 시작할 때 약속한 것을 잘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 약속이 뭐였나?

 
  김 “치열하게 싸우신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화 흥행을 위해 손쉬운 선택을 하지 말고 좀 힘들더라도 원칙대로 가자고 약속했는데 그 초심을 잃지 않은 것 같다.”


“세번의 혁명을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1987>의 김경찬 작가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세번의 혁명을 이룬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1987>의 김경찬 작가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YTN 기자의 술자리 질책이 출발점

  ―그동안 1980년의 광주항쟁 영화는 더러 있었는데 1987년 6월항쟁을 영화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영화를 처음에 누가 먼저 하자고 했나?


  김 “저였다. 원래는 이 대표와 사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015년 6월쯤 송태엽 기자(와이티엔 전주지국, 얼마 전 보도국장으로 지명됐으나 고사함)를 만나 술을 마셨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송 기자가 ‘영화 하는 사람들은 6월항쟁은 왜 안 만드냐’고 하더라.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날 밤 잠이 안 왔다. 며칠 뒤에 이우정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이 대표가 자기도 마음에 담아둔 것이라면서 같이 해보자고 하더라.”

 
  이우정(이) “나도 영화를 하면서 꼭 다뤄보고 싶었던 소재였다. 이 작가가 6월항쟁을 하자고 했을 때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김 “그런데 영화를 만드려고 막상 조사를 해 보니 여태 왜 안 했는지 알겠더라.”


  ―무엇이 문제였던가?


  김 “우선 관련된 인물이 너무 많다. 기간을 1월(박종철 열사 고문 사망)부터 6월(이한열 열사 최루탄 피격)까지로 한정하더라도 어느 인물에 집중해서 보여줘야 할지 막막했다. 이래서 다들 못 했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알겠더라. 허락받으러 이한열기념사업회와 박종철기념사업회 분들을 만났더니 ‘그동안 왔던 사람들이 아무도 성공 못 했다’면서 ‘해보려면 한번 해보세요’ 하는 분위기였다.”

 
   이 “박종철 열사나 이한열 열사를 중심으로 하거나 그들의 전기를 만드는 식으로 접근했던 것 같더라. 그런 점에서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고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의 시나리오는 단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독특한 접근이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형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 “실화를 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감독도 보통 영화처럼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본인이 하고픈 것도 그 방식이라고 했다.”

 
  장 “그게 예술적으로나 영화적으로 도전이면서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고전적 작법은 프로타고니스트(연극이나 영화 등에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을 따라가다가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악의 축을 하나 놓고 많은 사람들이 부딪쳐 가면서 나중에 눈덩이와 파도가 되는, 그리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그런 얘기 구조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와 형식이 잘 맞아서 오히려 너무 좋았다. 어렵지만 도전해보자고 처음부터 생각했다.”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의 시나리오는 독특한 접근이었다”고 <1987>의 제작자인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모두가 주인공인 우리의 시나리오는 독특한 접근이었다”고 <1987>의 제작자인 이우정 우정필름 대표는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87>도 지구를 지키는 프로젝트”

  ―2015년에 6월에 영화화를 결심한 뒤 시나리오는 언제 마무리했나?


  김 “7월까지는 다른 작품을 했고, <1987>은 8월에 자료 수집해서 9월부터 쓰기 시작했다. 3고까지 시나리오를 쓴 뒤 그해 12월쯤 감독이 합류했다.”


  ―장 감독은 어떻게 합류했나?


  이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는 후배가 원래 다른 작품을 가지고 장 감독과 협의하고 있었다. 그 후배랑 친해서 이 작품(<1987>) 모니터링을 부탁한 상태였다. 장 감독이 고민 끝에 후배 작품을 거절하는 자리에서 그 후배가 <1987> 작품에 대해 물었다. 장 감독이 관심 있어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내가 바로 메일로 시나리오를 드렸더니 장 감독이 만족해했다.”


  ―시나리오 보고 바로 연출을 맡기로 결심했나?


  장 “바로는 아니었다. 이걸 보고 너무 재밌었고 독특했다. 왜 이 이야기를 그동안 아무도 안 했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나중에 불이익을 받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못 만들어지는 만큼 창작자한테 힘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좀 했다. 하지만 나도 애를 낳아서 키우다 보니까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이 가고,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이 이야기는 꼭 해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자는 결심이 서더라.”


  ―그때가 2015년 12월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정책이 한창일 때였다. 영화를 못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런 정치 상황 때문인가?


  장 “그렇죠. 당연히.”

 
  이 “감독이 철이 없는지 쉽게 생각한 게 있었던 것 같다.(웃음) 작가님도 감독님보다 더 쉽게 생각했던 듯하다.”

 
  김 “그렇다. 객관적으로 보면 제작 가능성이 거의 제로였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혼이 비정상’이라고 했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아무 근거는 없는데 이건 될 것 같다,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힘이 빠지는 순간이 올 것이기에 미리부터 떨지 말고 까짓것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내가 이 영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힘은 6월항쟁은 어쨌든 역사에서 민초들이 승리했고, 그 결과가 가장 오래 지속됐고 그 이후 상황의 초석이 됐던 혁명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11기) 출신인 장준환 감독은 2003년 블랙코미디물인 장편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했다. 그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넘치는 <지구를 지켜라>로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등 국내외의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는 등 천재감독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10년 만인 2013년 두번째 장편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만들었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내 문소리가 감독한 <여배우는 오늘도>(2017년)에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리얼리즘에 기반한 <1987>은 그동안 장 감독이 만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영화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영화 스타일이 바뀐 건가?


  장 “<지구를 지켜라>나 <화이>가 미세한 현미경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약간 거시적으로 인간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결국 힘이 모아진다는 부분은 유니버설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여서 이전 작품들과 맥락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엉뚱한 B급 감성에 끌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야기냐, 어떤 인간의 이야기냐는 측면을 더 따진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도 사실은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배역 없어 출연 못한 배우들 많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이우정 대표는 명필름 등에서 오랫동안 영화 제작 관련 일을 해왔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2010)을 비롯해 <고지전>(2011), <쎄시봉>(2015) 등이 그가 제작에 참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1987>은 그가 독립해 세운 우정필름이 만든 첫 영화다.


  ―영화를 만들면서 배우 캐스팅과 투자 유치 가운데 뭐가 더 어려웠나?


  이 “영화산업에서 원래 캐스팅이 가장 어려운 작업인데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했던 어떤 영화보다 캐스팅이 쉬웠다. 감독이 쌓아온 인덕에 기반한 것이지만, 강동원 배우가 먼저 참여 의사를 감독에게 전달해 왔다. 또 김윤석과 하정우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등 캐스팅이 순조로웠다.”

 
  장 “나는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강동원과는 단편영화를 같이 하면서 친분이 있었다. 서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 말하기가 편해서 그에게 ‘이런 작업을 한다’고 했더니 ‘나중에 완성되면 좀 보여주세요’라고 하더라. 시나리오가 나왔는데 톱스타인 강동원이 할 배역이 별로 없었다. 박처원 역을 맡길 수도 없었고(웃음), 다른 역은 너무 작았다. 그가 한다면 ‘잘생긴 남학생’이라는 배역명을 가진 역할뿐이었다. 나중에 이한열 열사로 밝혀지는 배역인데, ‘네가 잘생겼으니까 작은 역이지만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그의 일정이 매우 바쁜데도 열흘쯤 뒤 연락이 와서 만났더니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영화에 폐가 되지 않으면 하겠다는 조건부였다. 자기가 너무 알려져 있는 사람이니까 혼자서만 영화에 나오면 작품에도 해가 될 것 같다고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 내게는 또다른 미션이 있는 거다. 이런 균형을 어떻게 다 맞출까 하고 걱정했는데 나중에 김윤석 선배가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더니 흡족해하면서 동참하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시국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다. 최순실 사건이 막 터지고 할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윤석 선배가) ‘우리 셋이 합치면 뭐가 되지 않겠느냐’면서 형님처럼 끌어줬다. 그때 하정우 배우는 너무 쿨하게 ‘감독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시나리오 너무 좋아요, 재밌어요’ 하면서 용기를 줬다.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작가, 준비중인 사극 대신 제안
   영화사 대표, “하고픈 소재” 동의
   시나리오 본 감독도 의기투합

   강동원, “작은 역” 불구 맨 먼저 결정
   김윤석, “힘 합해서 해보자” 끌고
   하정우도 “시나리오 좋아” 용기줘
   오달수 등 “어떤 역이나 맡겠다”


  ―이 영화에는 설경구가 김정남 역으로 나오는 등 쟁쟁한 배우들이 워낙 많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호화 캐스팅을 하면 돈이 많이 들 텐데, 저분들이 일종의 재능 기부를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이 “그건 내가 힘든 부분이었다.(웃음) 원래 감독의 연출 방향이 그랬다. 등장인물이 많으니 무명 배우를 쓰면 누가 누군지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려서 관객들이 감정이입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설경구나 오달수 이런 분들을 작은 배역에 기용했는데 나로서는 제작비가 한정돼 있어서 고민이 좀 됐다. 하하.”


  ―오달수는 어떤 역이라도 맡겨달라면서 일종의 셀프 캐스팅까지 했다고 하던데?


  장 “너무 감사했다. 오달수뿐 아니라 조우진, 정인기 배우 이런 분들이 다 그랬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하겠다고 했는데 더 이상 맡을 역이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그분들에게 탈락시켜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 했다. 시나리오의 힘, 이 영화의 취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의 의미에 배우분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그런 점이 이 영화를 하면서 또 하나 감격스럽고 감동스러웠던 부분이었다.”


“역사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연희나 한병용 가족 등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장준환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987>에서 연희(김태리 분)가 삼촌인 교도관 한병용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온 편지)가 든 잡지를 건네받고 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역사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연희나 한병용 가족 등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장준환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1987>에서 연희(김태리 분)가 삼촌인 교도관 한병용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온 편지)가 든 잡지를 건네받고 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신파든 국뽕이든 같이 울었으면”


  김경찬 작가는 방송사 피디(PD) 출신이다. 1995년 <목포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그는 2008년 퇴사할 때까지 피디로 있으면서 다큐 3부작 ‘가야금', ‘섬' 등을 연출해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퇴사 뒤 콘텐츠 기획 및 개발을 하다가 2011년부터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본격적으로 나섰다. 마트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 반대 투쟁을 그린 <카트>(2014)가 영화화된 그의 첫 작품이다.


  ―<1987> 영화 제작을 비밀리에 진행했다고 들었다.


  김 “우리가 시나리오 개발하고 할 때는 시절이 엄혹해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네방네 떠들 일이 아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처원 처장을 죽일 놈으로만 그리지는 않고, 그 역시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희생자로 그렸더라.


  장 “나하고 작가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악당이 무서워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 무섭지? 잔인하지?’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히스토리가 있는 게 더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겪고 이념의 트라우마 때문에 왜곡된 애국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또다른 폭력으로 번진 인물의 히스토리를 가져오면 훨씬 더 리얼한 악당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 “조사해 보니까 박처원은 경찰에 투신할 때부터 빨갱이를 살려둘 수 없다면서 그러한 개인사를 계속 얘기했더라. 1960년대와 70년대 그에게 잡혀가서 고문받았던 사람들을 만났더니 그가 술 마시면 꼭 그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의 고향(평안도 용강군)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그 얘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월남한 인사가 경찰에서 성공하기 위해 포장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허구 인물은 김태리 배우가 연기한 연희다.


  장 “실존 인물이 아니긴 한데 사실은 당시에 수많은 연희들이 있었다. 역사는 보통사람들을 기록하지 않지만, 역사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연희나 한병용 가족 등 그러한 보통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영화에서 연희는 여러 기능과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한열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끌어와야 하고, 자기 개인의 트라우마를 떨쳐내면서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보통사람의 시선이나 갈등을 내재하고 있어야 했다. 또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보여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 작업도 어려웠고, 실제로 연기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갈 때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연희 존재는 처음부터 있었나?


  김 “캐릭터는 원래부터 있었는데 누구의 가족이어야 하는지는 계속 바뀌었다.”

 
  장 “작가와 작업하다가 한재동, 전병용 두 교도관을 한병용 한명으로 합치면서 그러면 이 가족으로 넣는 것으로 했다.”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부분이 연세대 교문 앞에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이더라.


  장 “두 열사 부분은 연출적으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어떤 생각이었느냐 하면 ‘그냥 여기서는 같이 울어주세요’였다. 그래서 고속 카메라도 사용했다. 왜 이 꽃다운 나이의 젊은 청년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 쓰러져 갔어야 됐냐는 것이 이 영화를 하게 된 강력한 요소의 하나였기에 신파든 국뽕이든 무슨 말을 붙이든 간에 ‘같이 울어주세요 좀’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나, 같이 화내고 울어주고 이런 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분들한테 그리고 우리 스스로한테 위안이 되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그렇게 데모를 하느냐,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라는 연희의 질문에 이한열이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아파서”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도 가슴이 찌르르하더라.


  장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 장면이 굉장히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사실 그건 제 마음 같기도 하다. 사실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고 싶지만 마음이 아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여 광장에 있었던 이야기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 얘기를 하려고 이한열 열사가 잘생긴 남학생으로 극중에 들어왔다.”

<1987>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 처장(김윤석 분)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박종철의 사망과 관련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2016년 초 감독과 영화사 대표가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 탄압 정책 때문에 배우 캐스팅을 고심할 때 김윤석은 “힘을 합해서 해보자”며 출연을 흔쾌히 결정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1987>에서 남영동 대공분실 책임자인 박 처장(김윤석 분)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박종철의 사망과 관련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2016년 초 감독과 영화사 대표가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 탄압 정책 때문에 배우 캐스팅을 고심할 때 김윤석은 “힘을 합해서 해보자”며 출연을 흔쾌히 결정했다. 씨제이이앤엠 제공

 
  작가 “고3 때 이한열 쓰러진 사진 보고 충격”


  ―명동성당 내부를 촬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장 “의미있는 장소에서 의미있는 촬영을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드리고 촬영 요청을 드렸더니 너무 감사하게도 수락해주셨다. 촬영하면서 처음이란 것을 알았다. 영광이고, 너무 감사하다.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것은 6월항쟁 때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김수환 추기경을 영화에 넣어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장면은 2016년 겨울의 촛불을 연상시키더라.


  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장면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그러한 촛불집회를 전혀 예상조차 못 했다.”


  ―6월항쟁 때는 뭐 했나?


  이 “그때 고3이었다. 1988년에 대학에 들어왔는데 우리가 6월항쟁의 수혜를 가장 많이 받았다. 문화적으로 광장 자체가 많이 열려 있어서 대학 생활 자체가 자유로웠다. 비록 6월항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수혜를 받았기에 영화업을 하면서도 그 경험이 세상을 바라보는 제 관점이 됐다.”

  김 “나도 그때 고3이었다. 어느 날 떨어진 신문(<중앙일보>)을 주워 들었는데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사진이 있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과 공포, 울분, 분노 이런 것들이 지금도 안 잊힌다. 연희가 그 사진이 실린 신문을 집어 들었을 때의 감정이 내가 그때 받았던 감정이다. 그걸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장 “나도 직접 거리에 나갈 수 없는 고교생 신분이었다. 수업 중에 최루탄 냄새가 계속 날아오고 등하교 때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싸우는 것을 봤다. 광주 비디오를 처음 접한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한테도 잊힐 수 없는 한해였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졌던 바람이나 기대가 있었을 텐데.


  이 “영화라고 하는 매체 또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결코 개인적인 게 아니다. 대중이 모이고, 어찌 보면 소통하는 광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87년의 광장은 우리한테 환희에 찬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 기록한 기념물이 됐으면 좋겠다.”

 
   김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면 세 번의 혁명이 있었다. 4·19 혁명과 87년 6월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혁명이 그것이다. 전세계를 봐도 이런 나라가 없다. 정말 국민이 위대한 나라다. 국민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장 “나는 이 영화가 굉장히 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이 이렇게 훌륭하니 자부심과 용기를 가져도 된다는 생각을 나타내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영화로만 끝나면 안 된다. 2017년에 또다른 광장이 있었듯이 6월항쟁 광장에 있었던 세대로서 왜 30년 만에 우리 사회는 이렇게 각박해지고, 아파트값은 이렇게 높은 건지 등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외치고 불렀던 ‘그날’을 향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또다른 담론들이 나타나는 그런 확장된 고민의 시작으로 이 영화가 작용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장면 둘

  #박종철 열사의 마지막 대사=박 열사가 물고문 끝에 숨져가면서 마지막 대사를 한다. 물속에서 하는 말이라 거의 들리지 않지만, 두 글자 “엄마”다. 장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배우(여진구)에게 주문해서 들어간 대사다. 김경찬 작가는 “촬영된 필름을 보면서 분명히 엄마라고 하는 것 같아서 스태프에게 물어봤더니 맞더라. 내가 미처 안 쓴 부분인데, 추가된 대사가 비수처럼 제 가슴을 찌르더라”고 말했다.

  #이한열 열사가 부른 친구 이름=이 열사가 연세대 교문 앞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 그의 옆에 있던 학생 한명이 먼저 쓰러진다. 그에게 달려가면서 “주열아! 주열아!”라고 외친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마산의 김주열 열사를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다. 6월항쟁이 4·19 혁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진행·정리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