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카밀로 호세 셀라 저/정동섭 역 | 민음사
『돈키호테』 이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은 스페인 소설
지옥까지 내몰린 나약한 영혼 앞에 놓인 용서받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선택
스페인 소설가 중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카밀로 호세 셀라의 작품. 1942년 출간되자마자 스페인 현대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자리 잡은 이 소설은 세상을 경악하게 한 희대의 살인마의 수기이다. 열악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학대와 증오 속에서 자란 주인공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잇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려 들어간다. 개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 앞에 무너진 나약한 인간 본성,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변두리 삶의 극단적 비극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가 투박한 어조 속에 숨어 있다.
프랑코 정권의 엄격한 검열 정책은 이 작품에 대해 잔인한 소재와 폭력적인 묘사를 근거로 출판 금지 조치를 내렸지만, 내전 이후 황폐해진 스페인 대중은 그 잔혹함에 공감하고, 그 비극성에 감동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출간되자마자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침체되어 가던 스페인 문단에 “일종의 건전한 카타르시스”로 작용하며 스페인 현대 소설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작가 소개
( 1916년 5월 11일~ 2002년 1월 17일)스페인 북부 갈리시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관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스페인 여러 지방과 도시를 옮겨 다니며 자랐고, 아홉 살 때 수도 마드리드에 정착한 뒤로 중등교육을 받았다. 1934년 의과대학에 진학하지만 1학년을 마친 뒤 포기했고, 세관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지만 역시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문학 강의를 청강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을 접했으며, 처음으로 시를 써서 문예지에 발표했다.
스무 살 때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코 휘하의 반란군에 가담해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전장에서 돌아와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면서 첫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42년 출간한 이 작품은 출판 금지 조치를 받지만,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셀라는 1957년 스페인 왕립 학술원의 종신회원이 되었고, 1977년에는 국왕에 의해 초대 상원의원으로 지명받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가톨릭 여제 대십자가상, 아스투리아 왕자 문학상, 플라네타 상, 세르반테스 상 등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으며, 1989년 스페인 소설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말년까지 소설뿐 아니라 시, 단편, 수필 등을 망라한 여러 작품을 남겼으며, 2002년 1월 17일 마드리드에서 여든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역: 정동섭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아우토노마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북대학교 스페인·중남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가 있고, 논문 「바로크적 진실과 낭만주의적 거짓」, 「돈 후안 비교 연구」, 「보르헤스의 작품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성」 등과 옮긴 책으로 『스페인 영화사』, 『바람의 그림자』, 『미오 시드의 노래』 등이 있다.
○책 속으로
“현실에 대한 잔혹한 캐리커처”
스페인의 열악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어려서부터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하며 자란다. 가난하고, 무지하며,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그의 부모는 언제나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웠고, 그럴 때마다 어린 파스쿠알은 무자비한 학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미친개에게 물려 감금된 채로 죽고, 여우 같은 여동생은 집안의 재산을 훔쳐서 가출하고, 지능이 떨어지는 남동생은 기름통에 빠져 죽으면서 비극적인 가족사가 이어진다.
매번 이 불행이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바라던 파스쿠알은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만, 아내가 유산하면서부터 시작된 불화에 그의 삶은 또다시 어두워진다. 결국 아내는 파스쿠알에게 불륜을 추궁당하다가 급사하고, 파스쿠알은 아내의 외도 상대인 파코와 몸싸움을 벌이다 그를 죽인다.
몇 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파스쿠알은 두 번째 아내를 맞아 새로운 인생을 도모하지만 그의 곁에서 늘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위협을 느낀다. 어머니를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강박에 빠져든 파스쿠알은 어느 날 밤 날카로운 칼을 들고 어머니의 침실에 들어간다.
봇물이 터지듯 피가 튀어 내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것은 내장처럼 따뜻했고, 양의 피와 똑같은 맛이었습니다. (……) 나는 들판을 향해 쉼 없이 몇 시간 동안이나 뛰고 또 뛰었습니다. 들판은 시원했고 안도감 같은 기분이 혈관을 타고 흘렀습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보여 주는 모친 살해라는 소재와 잔인하고 거친 에피소드는 당시 스페인 독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고, 이 작품은 스페인 예술과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전율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셀라 역시 이 작품이 끔찍하고 잔인한 면을 집요하게 묘사하여 냉혹한 인간 실존을 부각하는 전율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며 “전율주의는 삶이 전율적일 때만 존재한다.”라고 덧붙였다.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겪은 비극이 일반적인 현실이라기보다 극단적이고 과장된 일면일 수 있겠지만, 스무 살 즈음의 젊은 나이에 내전을 직접 경험했고, 프랑코 휘하 반란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던 작가 자신에게 세상이 그만큼 처참하고 끔찍한 지옥으로 느껴졌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그는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통해, 빈곤과 무지, 야만이 지배하는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내전을 소설의 직접적인 소재로 삼는 것이 금지된 억압적인 사회에서, 그는 사실적인 묘사 대신 괴물 같은 한 인물이라는 독창적인 은유를 통해 시대의 비극과 공명을 시도한 것이다.
가장 음습한 현실까지 스며든 휴머니즘
사면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너무도 악했고 그런 본능에 저항하기에 나는 너무도 연약했기 때문이지요.
당대의 문호 바로하는 이 작품의 서문을 써 달라는 셀라의 부탁을 “거절하겠네. 만일 자네가 감옥에 가고 싶다면, 혼자 가게나. 그러기에는 젊지만 말이야. 난 자네의 책에 서문은 쓰지 않겠네.”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 작품이 그만큼 불온하고 위험한 내용을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하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선정주의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소설의 저변에는 철저하게 세상의 변방으로 몰린 한 인물에 대한 연민이 깊게 깔려 있다.
작가는 한 신부의 입을 빌려, 그가 실은 “인생에 놀라 궁지에 몰린 온순한 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짐승처럼” 여겨지지만 그 역시 가족과 이웃에게 최소한의 도리는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일상화된 가혹함과 만연한 폭력 상황에서 끔찍한 수렁에 점점 빠져들어 갈 때, 그가 믿고 쉬어갈 만한 도피처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가족도, 이웃도, 교회도 그에게 낙인을 찍고, 그를 추궁할 뿐이다. 결국 파스쿠알이 언쟁 끝에 친구를 칼로 찌르고, 아내를 뺏으려는 자의 뼈를 부러뜨리고, 자신을 저주하는 어머니의 목에 칼을 꽂은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이기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었다고 역설한다.
이 작품은 파스쿠알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선악의 판단은 차치하고, 소외와 좌절, 죽음이 끊이지 않는 극한 상황에서 나약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독자들의 동정심에 호소한다. 더 나아가 내전으로 인한 집단 학살을 경험한 사회에서, 범죄자 한 명을 놓고서 짐짓 정의의 편에 서는 체하는 게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에둘러 물으며 무책임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주제를 확장한다.
‘가장 스페인적인 것’을 가장 생생하게 구현하는 세계의 거장
놀라울 만큼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성취한 작가로 평가받는 카밀로 호세 셀라는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실제로 그의 많은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고,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친숙한 작가는 아니다.
1989년 일흔세 살의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스페인어권 작가 중 세계에 더 잘 알려진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옥타비오 파스를 선정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는 몇몇의 의견도 있었다. 이에 대해 줄리오 오르테가(브라운 대학 스페인어과 교수)는 셀라가 성취한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경험한 유럽 사회 속의 스페인의 가능성을 보여 주면서도 가장 스페인스럽게 남아 있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유럽 문학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 작가이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에서도 이러한 작가의 가치가 잘 녹아 있다. 내전 이전의 군주제 사회부터 공화정이 자리 잡기까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 떠돌이 무산자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에 맞서는 스페인 문학 특유의 ‘피카레스크 전통’의 주제, 당시 스페인 사회에 깊게 깔린 불안하고 황폐한 대중 심리를 반영하여, 우리는 이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스페인의 다양한 풍경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스페인 문학의 획기적인 분수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스페인적인 것’의 전범으로 아직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지하련 | 2011-05-27 |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만 유독 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그런 경험이 계속 쌓여져갈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쌓여져갈 때, 그것을 ‘운명’ 탓으로,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이제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면 그 뿐이다. 헛된 희망을 꾸지 말고 그저 원래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으며 되는 일이란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면 그 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운명’와 ‘팔자’를 다스리고 있다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경배를 시작하면 된다. 점쟁이 집에 자주 가고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안 다니던 절에도 나가고 교회도 나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그런 주어진 대로 살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행이 일어난다면, 유독 나에게만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긴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카밀로 호세 셀라의 ‘빠스꾸알’은 자신의 어머니를 난도질해버린다.
선생님, 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 8쪽
소설의 시작은 밋밋하고 도대체 왜 이 사내는 이런 말을 소설의 처음부터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이 짧은 시작은 그 무수한 현대 소설들 중 가장 멋진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빠스꾸알이라는 이 사내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 사랑, 증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요즘의 꼬마 아이들마저도 세상은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며 되먹지 못한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 ‘세상탓’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나의 태생, 배경, 학력 등으로 내 인생은 정해져 버렸으며 그냥 여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면 그 뿐이다.
하지만 빠스꾸알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용감하게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는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행복은 아주 짧은 순간 뿐이었고 연거푸 불행이 이어진다. 더구나 그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 그에겐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할 뿐. 태어날 아이가 죽어 나오고 겨우 태어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고 사랑하는 아내는 다른 남자의, 자신의 여동생과 살고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빠스꾸알에게는 평범한 삶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천연덕스럽게 잉태하곤 그 아이를 죽게 내버려둔 그의 어머니나 술만 마시면 몽둥이질을 해대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빠스꾸알. 하지만 그는 끝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세상에 진리가 있느니, 신의 밝은 빛이 지상에 당도한다느니, 선한 신이 있다느니 하는, 너무 듣기 좋아,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인 그런 말들은, 불행하게도 빠스꾸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말 다행스런 일은 그런 말을 지껄이는 이들에게 빠스꾸알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똑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들이 마치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죽음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여러 갈래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고운 꽃과 풀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꽃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엉겅퀴와 선인장이 무성한 험난한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꽃길을 걷는 이는 평화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을 맛보면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행복에 겨워 미소 짓습니다.
그러나 엉겅퀴와 가시밭길을 걷는 자들은 광야의 폭염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험상궂은 우거지상을 합니다. 몸에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는 것과 지울 수 없는 문신을 넣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 8쪽에서 9쪽.
26살의 카밀로 호세 셀라가 1942년에 발표한 이 데뷔소설은 20세기 이후 모든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어떤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빠스꾸알이라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이냐며.
■ 파스쿠알 두아르테 , 그는 왜 사형수가 되었어야 했는가?
아델라이드 | 2009-12-15
1939년 스페인의 한 작은 약국에서 손으로 휘갈겨 쓴 원고가 발견된다. 파스쿠알 두아르테라는 가련한 사내가 쓴 것으로, 그 안에는 사형집행을 앞둔 그의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쓰여져 있었다. 빈민촌 출신으로 거의 무학이다 시피한 그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읽혀질거란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그는 세상에 알리고 싶어했다. 소박한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 알고 보면 한없이 연약한 그가 어쩌다 사형수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사면을 구하고 싶지는않습니다. 삶이 내게 준 것은 너무도 약했고 그 본능에 저항하기에 나는 너무도 연약했기 때문에... 라고 담담히 말하는 이 사내는 얼마 후 존재 자체가 말살되어져 버릴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은 나도 좋은 사람이라고, 단지 운명이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제발 억울하고 속타는 이 마음을 이해해 달라면서 그는 자신의 출생부터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그 원고를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만한 사람이었다고 지명한 작가에게 남긴다. 그 원고를 읽은 작가가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 책을 쓰게 되었다는 설명으로 책이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파스쿠알 두아르테를 사형수로 몰고 간 그의 가족사는 과연 어떤 것이었까?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거기서 모종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남편 못지 않게 냉정하고 독기 서린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파스쿠알은 가난하고 무식하며 되는데로 살아가는 부모 슬하에서 부대끼며 성장하게 된다. 부모가 그 모양 그 꼴이니 자식들의 인생이 잘 풀릴리 만무, 장남인 파스쿠알도 그렇지만 그의 동생들의 운명 역시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예쁘다는 장점을 살리지 못한 그의 여동생은 십대 시절부터 가출을 일삼더니 결국 바람둥이 남자들 손에 인생을 망쳐버리고, 아비가 누군지 짐작되지 않는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어난 남동생은 일생을 장애아로 살다 비참하게 죽고 만다.
부모 대신 동생들을 보살펴 주고 싶어했던 파스쿠알은 비참함에 눈물을 흘리나 그 역시 자신의 앞가림도 버거운 실정, 동생들의 불행에 무기력한 연민을 보낼 뿐이다. 한동네 처녀인 룰라와 살림을 차린 그는 결혼 했음에도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실망한다. 연이은 유산에 이어 드디어 아들을 얻은 그는 뛸 듯이 기뻐하나 , 그것도 잠시 갑갑한 마음을 주체 못한 그는 무작정 가출을 감행한다. 도시를 떠돌다 3년만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난 상태, 아내를 추궁하다 죽음으로 몰게 된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아내의 상대 남자마저 죽여버린다. 그렇게 처음으로 감옥에 가게 된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형기를 채우기도 전에 모범수로 풀려 나오게 된다. 감옥의 소장은 자유를 되찾아 나가는 그를 향해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덕담을 하나, 후에 알게 되다시피 일찍 풀려난 것이 오히려 그의 명을 재촉하는 계기가 된다. 그를 기다리던 마을 처녀와 다시 살림을 차린 그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진땀을 흘린다. 파괴 충동에 져버린 그는 오래전부터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존재를 향해 살인의 손길을 내미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읽었던 <산체스가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가난한데다 권위적이며 제멋대로인 개차반 부모, 그 부모 슬하에서 고통받으며 성장하는 아이들, 그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성장한 뒤 원망의 분노의 화살을 부모에게 돌리게 되는 자식들, 그들이 그 삶을 다시 자식들에게 돌려주는 악순환의 고리들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빈민가나 스페인의 빈민가는 어쩜 그리도 닮았던지... 어쩜 이 세상 모든 빈민가의 풍경이 대충은 다 그러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벗어날 길 없어 보이는 가난과 폭력의 가족사가 결국엔 파국을 몰고 오는 과정들을 개연성있게 묘사하고 있던 이 소설은 비교적 탄탄한 줄거리에 심장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적인 문장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들을 잡아내는 통찰력등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던 작품이었다. 스페인 빈민촌의 토속적인 풍경을 어찌나 잘 잡아내고 있던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다가오던 점도 이 책의 매력을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매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결론이 갑작스러운 점이나, 파스쿠알이 살인을 되풀이 하게 되는 것이 모두 가족사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점등이 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처음 살인을 하게된 동기는 그에게 있었으니 말이다.
하긴 파스쿠알 자신의 육성에 의한 변명이다 보니 '내 성질이 더러워서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나오긴 무리였을테지만서도, 작가의 객관적인 견해가 붙어 있었더라면 좀 더 완벽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라고, 작가는 여기에 무언가를 덧 붙이는 것이 오히려 사족이 될거라 생각한 듯 했다. 그건 아마도 작가의 판단이 옳았다고 보여진다. 이 책은 소설이지 범죄학 교본이 아니니 말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 발간 당시엔 파격적으로 들려 왔다는 모친 살해에 대한 논란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엔 그다지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느정도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는 의미다. 예전에 대학교에서 형법각론을 배울때 교수님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난다. 만인의 지탄을 받는 존속 살인자를 실제로 만나보면 실은 가장 안타까운 사연이 대부분라는 것이었다. " 오죽했으면... " 이란 마음이 들 정도로 부모에게 방임받고 학대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서, 그럼에도 존속이라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한다는건 불합리한 규정일지도 모른다고 하신게 기억 난다. 살인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지만 아동학대는 뭐 정당화 되는 범죄이겠는가? 이런 책 한 권을 통해 폭력 가족이 그들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건 무리겠으나, 적어도 보통 사람들에겐 한가지 교훈은 남겨주는게 아닐까 한다. 최소한 가족들간만이라도 사랑하며 살자. 이 아니 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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