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책 이야기

디스옥타비아 /유진목

금동원(琴東媛) 2018. 7. 9. 13:08


 

『디스옥타비아』-  2059 만들어진 세계

  유진목

저/백두리 그림  | 알마

 
 
 ◇책 속으로

 

  밤사이 바닷물에 떠밀려 온 커다란 물체가 물살에 이리저리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머지않아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세히 보니 두 팔을 느슨하게 벌린 자세로 엎어져 물에 떠 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p.10

  더 이상 혼자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나마 두려웠던 것은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순간에 심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변기에 앉아 죽을까 봐 걱정했다. 그들이 내 바지를 걷어 올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몸을 씻다 죽는 것도 싫었다. 그들이 내 주름이 가득한 알몸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싫은 것은 언제나 싫었다. 싫은 것은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p.15

  율리가 말하는 다른 세상에서 떠나온 사람으로서 나는 율리를 걱정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살진 않을 거예요. 율리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 같았다.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게 될 거야. 그게 너의 전부가 될지도 몰라. 나는 내가 도망쳐 온 삶에 몸서리를 쳤다. 걱정 말아요. 작가가 되지 않을게요.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율리가 문득 환하게 웃었다. --- p.28

  다른 삶은 없다고 말하는 이에게 다른 삶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절망에는 다른 삶을 꺼낼 수조차 없어야 한다. 잦아드는 불씨처럼 타들어가는 숨이 마침내 다 꺼질 때까지. 형체를 간직하고 있지만 이내 주저앉아 바스러질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절망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p.31
 
  내가 한창 가임기의 여성이었을 때, 나는 내가 속한 사회가 생산하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찌감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내가 새로운 가족을 꾸릴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지금 다시 그럴 수만 있다면 아이를 낳아서 함께 살고 싶다. 아이를 낳아서 바다가 무엇인지 모래가 어떤 촉감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만지게 해주고 싶다. 함께 물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가 먹을 것을 만들고 아이 옆에서 함께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잠이 들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아이가 깨어나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싶다. 하지만 내 몸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 --- p.42~43
 
  나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으면서 자신을 살려두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나를 살아가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삶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처럼. 한때 나는 만족스러운 삶의 한가운데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p.53~54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다면 당신은 지구를 떠날 텐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삶의 본연으로 삼는 일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되어버리는 때가 있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비참을 견디며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때가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혼자서만 책임지면서 타인의 요구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은 요구만 할 뿐 책임은 없다. 타인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나는 고립된다. 하지만 본연의 모습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 위험을 택할 자유는 있었다. --- p.62

  옛날에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신과 내가 만난 건 운명이야. 이렇게.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사라진 말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율리는 한참 후에야 그 말을 이해했다. 율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비롭게 여겼다. 그건 마치… 자기 자신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려요. 내가 살아가는 데 다른 사람이 왜 필요하죠? --- p.64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만으로 다른 실망스러운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생활비가 걱정돼 울다가도 먹고 싶은 게 떠오르면 눈물을 닦고 그것을 먹었다. 내 앞에는 언제나 안 좋은 일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은 불안한 날들을 살면서도 내가 밥을 맛있게 먹으니까 유야무야 돼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내가 밥을 맛있게 먹고 밥을 무척이나 좋아해서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음식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밥을 맛없게 먹는 사람이었다면 대신 내 앞에 마련돼 있던 모든 불행을 그대로 맛보았을 것이다. --- p.73
 
남자처럼’ 짧다는 것은 그야말로 옛날식 표현이다. 이제 아무도 그런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율리에게 남자처럼 잘라달라고 말하면 율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을 남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절이 정말로 있었다. 거리에는 남자 같고 여자 같은 것들이 넘쳐났다. 남자 답지 않은 것과 여자 답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반드시 문제가 되었다. 남자 답지 못한 사람이나 여자 답지 못한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 p.77
 
  삶은 이상한 것이다. 내가 원할 때 곧장 멈출 수 없다. 계속하고 싶을 때 계속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 걸 공평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러 번 삶을 멈추고 싶었다.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충분한 감정이 아니라 지쳐서, 힘이 없어서, 원하는 삶이 너무 멀리 있어서, 그저, 단지,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정말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어떨까. 삶에 대해 이런 마음이 스칠 때 나는 슬픔을 느낀다. --- p.104
 
  내가 다시 한 번 나를 위해 스스로의 신이 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숨이 멈춘 그의 곁에서 잠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기절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입이 조금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텅 빈 구멍에 나는 입을 맞추었고 얼마 동안인지 모를 시간을 울었다. 사위는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는 잠이 들 때면 목젖에 부딪히며 새어 나오는 조그만 숨소리를 내곤 했었다. 하지만 그의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나는 푹 꺼진 그의 배를 넓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p.115

  호텔에 머무는 동안에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나의 트렁크에는 노다 마사아키와 마야모토 테루, 존 맥그리거와 오르한 파묵의 책이 들어 있었다. 책이라면 몇 권이라도 더 가져오고 싶었지만 오르한 파묵의 산문집만 해도 두꺼워서 그럴 수 없었다. 열흘 동안에 나는 마치 처음 읽는 책인 것처럼 네 권의 책을 천천히 읽었다. 다시 읽을 수 없을 것이었다. 흩어진 채로 살아 있다가 이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 p.127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태어난 이상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가?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없다면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죽어서는 안 되는가? 국가가 개인을 정말로 도울 수 있다면 왜 죽음만은 돕지 않는 건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자신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결정한 사람이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생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p.131
 
  우리가 표류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만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들이 그와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이었다. --- p.138~139
  도대체 내가 누구란 말인가? 내가 글을 통해 하는 말에 왜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특히 젊은 시절에는 이런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왜 써야 하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작가와는 거리가 먼 부류의 인간인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써야 하는지 모른 채로 썼다. 누군가 왜 쓰냐고 물을까 봐 겁을 잔뜩 먹고서 내 자신을 이리저리 숨겼다. 여기에 적는 글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혼란스럽다. 왜 써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    p.141


  ○저자 소개

MBC 문화사색 '책 읽는 풍경' - 유진목 시인과의 만남


            1981 서울 동대문에서 태어났다. 동대문 가화 산부인과 분만 카-드에 그렇게 적혀있다. 1997 고등학교 입학. 문예반에 들어가 습작노트를 만들고 무언가를 썼다. 일주일에 한 번 선배들에게 검사를 받았다. 아직 그 노트들을 가지고 있다. 2000 대학 입학. 동아리방에 찾아 온 81학번 선배가 다짜고짜 81학번 동기가 그 시절 그대로 나타난 것 같다는 우스개를 한 뒤로 어쩐지 동시대와는 동떨어진 기분에 시달리고 있다. 2003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잠보앙가라는 소도시에서 지냈다. 지금은 잠보앙가 국제공항을 통해 여행자가 입국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겨울이 없는 1년. 저녁이면 동네에 생선을 굽는 연기가 자욱했다. 바나나 잎에 싼 생선을 왼손에 올려 놓고 손가락으로 집어먹었다. 저녁이면 누구나 그랬다. 2007 7년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국어국문학과를 다녔지만 불문과 수업을 많이 들어서 국어불문학과에 다니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도서관에서 나무 막대에 걸린 옛날 신문을 보는 일이 좋았다. 2009 영화 <회오리 바람, 2009>을 시작으로 <도희야, 2013>와 <4등, 2014>의 스크립터를 했다. 몇 편이 더 있지만 적고 싶지 않다. 영화 <거짓말, 2015>에는 편집팀으로 참여했다. 2012 ‘목년사’를 만들어 뮤직비디오들을 제작하고 단편영화들을 연출했다. ‘목년사’는 1인 제작사다. 혼자서 모든 걸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2015 ‘문학과 죄송사’에서 시집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를 냈다. 9월에는 <쿠바의 책>을 쓰기 위해 쿠바로 떠났다. 동부를 여행하는 중에 차가 중심을 잃고 도로를 벗어나 부서지는 사고가 났다. 차창으로 달려드는 풍경이 형상을 잃고 뒤섞이다 뭉개지는 걸 보면서 이제 죽나보다 하였다.

  2016 ‘삼인 시집선’으로 <연애의 책>이 출간되었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쓴 시들을 묶었다. 사는 동안에 많이 읽은 책을 생각하면 김승옥의 소설들이 떠오른다. 어느 소설에서 여자의 삶은 어딘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대문 앞을 곰곰히 서성이던 남자라든가. 그 다음은 마쓰모토 세이초. 빈곤한 출장비로 근심이 많은 형사가 늦은 저녁 찬장에서 아내의 무조림을 꺼내먹는 걸 보면 순순히 응원하게 되는 마음. 책을 덮고 부엌에 들어가 무조림을 만들게 되는 것도. 5월부터는 격월간 독립 문예 잡지 <더 멀리>에 시를 연재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옥타비아 버틀러의 자장 안에서


『디스옥타비아』는 미국의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책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1947년 태어나 2006년 작고한 미국의 SF 작가로, 흑인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였다. 작가가 되기까지 그녀는 미국 사회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혀야만 했다. 우선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사회적 약자에 속했으며, 가난했기에 학비를 벌기 위해 육체 노동에 매달려야 했다. 약자이며 소수자인 그녀의 경험을 반영하듯, 그녀의 작품들은 사회적 문제들과 과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것들이 많다. 가령 그녀의 대표작인 『킨』은 시간 여행물로, 시대를 오가는 주인공이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서 받는 폭력에 고통받고 좌절하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삶과 작품이, 여성 혐오가 만연한 한국에서 여성 작가로 살아가는 유진목 시인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다가왔음은 어쩌면 필연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진목 시인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문장이 불현듯 나를 움직이고 있”다면서 “옥타비아 버틀러와 함께 나에게서 생겨나는 것을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음미하면서” “변화하는 내 자신을 쓰고 또 썼다”라고 작가의 말에 밝혀두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디스옥타비아』는 옥타비아 버틀러에 대한 헌사이기도 하다.

『디스옥타비아』에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에서 빌려온 문장과 이미지의 변주, 패러디 들이 퍼즐 조각처럼 펼쳐져 있다. 가령 『디스옥타비아』의 모와 율리의 관계는 [블러드 차일드]의 트가토이와 간의 관계를 떠오르게 하며, [저녁과 아침과 밤]에서 등장하는 ‘표류’라는 증상은 『디스옥타비아』에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미 옥타비아 버틀러를 읽은 독자라면 버틀러가 만들었던 세계를 유진목 시인이 어떻게 인용하고 변형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언젠가 버틀러를 읽을 때 『디스옥타비아』의 이야기들이 단편적인 꿈처럼 떠오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과 유진목의 이 ‘미래 일기’는 독자들을 통해 또 다른 ‘만들어진 세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 질문을 던지다


디스옥타비아』에서 그리는 2059년은 마침내 성차별이 없는 세상이다. 78세의 ‘모’는 “남자 답지 않은 것과 여자 답지 않은 것은 반드시 문제되던 시절”이 정말로 있었다고 회상한다. 고작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사회적 문젯거리로 보도되고, 출산 장려를 위해 낙태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부부 사이에서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행위가 가정을 돌보는 일이라며 묵인되었다고. 여성은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부양할 능력이 없으므로 강자인 남성은 여성을 부양할 의무가 있고 때문에 대접받을 자격도 있다고. 이런 일들이 불과 사십 년 전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었다며 ‘모’는 “나의 설명을 따라올 수 있겠는가? 그 시절의 삶이 어땠는지를 짐작이나 해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모’의 설명을 따라갈 수 있으며 그 시절의 삶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모’가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그 세상은 바로 지금 여기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2059년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과거에서 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정 관념과 가치들이 미래에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떠올릴 수 있는 부조리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디스옥타비아』는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몇 년 사이 페미니즘의 물결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 또한 여러 사건과 이슈 들을 거치며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확대되었다. 최근 페미니즘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문학 독자들은 묻는다. 왜 한국 문학에는 남성 중심적인 가치와 미학이 담긴 서사만 가득한가? 『디스옥타비아』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지닌 이야기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혐오와 차별 앞에서 한국 문학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이다.

  미래에서 조우하는 글과 그림들, 미래로부터 지금-여기로


  미래의 78세 노인이 남긴 한 권의 아름다운 일기, 『디스옥타비아』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18여 컷에 달하는 백두리 작가의 일러스트들이다. 초현실적이면서도 리얼하고, 명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백두리 작가의 그림들은 유진목 시인의 글과 마찬가지로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하나의 어머니를 두고, 유진목 시인의 글과 백두리 작가의 일러스트는 서로 다른 장르로서 교차하고 교감한다. 글과 그림은 서로 충돌하고 화합하며 리드미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을 통해 『디스옥타비아』는 훨씬 풍성해질 수 있게 되었다.

  구성상의 특이점 또한『디스옥타비아』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디스옥타비아』의 이야기는 역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모’가 남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시작하여 일기장의 첫 페이지로 흘러간다. 독자들은 가장 먼 미래에서 시작해 책을 덮고난 뒤 지금 여기, 현재로 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의 중간중간 조우하게 될, 수심 깊은 바다처럼 검게 물든 페이지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문장들을 차례대로 이어 나가다 보면 잠깐 시를 읽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먼 훗날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인생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다. 살아오는 동안에는 태어날 때 내 몫으로 주어진 불행을 감당하고, 인내하고,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뒤에는 없어도 좋을 나쁜 일들이 나를 찾아왔다. 불행은 행복이 마련해둔 빈 자리에서 살아간다. 그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글을 쓰다 말고 고개를 들어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앞에 살아 있고, 그는 그대로 내 곁에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나는 혼자였다가 우리가 둘인 때로 돌아온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가 죽는 사람이었다가 살아 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거슬러 이 세상에서 나를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I 중에서

            
  ■“詩는 SF와 닮았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입력 : 2017-11-13 22:30 

 
  SF소설 ‘디스옥타비아’ 펴낸 시인 유진목, 영화·다큐·소설 등 경계없는 탐구 이어가면서  시스템 바꿔도 여전한 디스토피아 그려내 

  “시쓰기와 SF(과학소설)는 닮은꼴 같아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시 속에 담긴 것은 현실에 드러나지 않는 것, 관계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니까요. 그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쓰는 SF와 비슷하다 생각했어요.” 

      

  시인이 SF를 쓴 이유를 묻자 솔깃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한국 최고의 연애시집”(황현산 평론가)이란 찬사를 받은 시집 ‘연애의 책’을 통해 감각적이고 대담한 시적 화술을 선보인 유진목(36) 시인이다. 그의 등장은 몇 편의 시로 운명이 갈리는 신춘문예, 문예지 등 기존의 등단 방식이 아니라 더 눈길을 끌었다. 시집 한 권 분량의 투고 원고를 검토해 ‘될성부른 시인’을 가려낸다는 출판사 삼인 시인선 첫 권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언뜻 시와 SF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시인의 설명과 이력을 되짚어 보면 납득이 간다. 2009년 1인 영화 제작사 ‘목년사’를 차린 그는 단편 극영화,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직접 시나리오도 쓰며 장편 영화감독 데뷔를 늘 마음에 품고 있는 그에게 ‘서사’는 놓칠 수 없는 꿈인 셈이다. 

      

 

  최근 펴낸 ‘디스옥타비아_2059 만들어진 세계’(알마)는 예술을 향한 그의 경계 없는 탐구 속에서 나온 작품이다. 흑인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인 미국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의 소설에서 빌려온 문장, 이미지 변주, 패러디들로 모자이크를 그린 소설은 2059년 노인 보호 시설인 ‘엘더’에 들어간 78세 노인 ‘모’의 목소리로 흐른다. 제목 ‘디스옥타비아’에서 짐작되듯, 소설은 억압받는 소수자였고, SF에서도 그들을 위한 목소리를 냈던 작가를 향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시인은 혼자 오랫동안 습작을 하면서 작가가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던 옥타비아 버틀러의 삶에자신을 포개며 “SF 속에서 당신은 상상 가능한 곳으로 얼마든지 떠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을 동력 삼아 소설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2059년의 ‘모’는 출산과 육아를 인류의 본성으로 여기고, 남자다운 것과 여자다운 것을 지키지 않으면 문제 삼고, 여성을 남성의 보호 대상으로 여기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 과거는 다름 아닌 우리의 현재다. 모는 “그 시절의 삶이 어땠는지 짐작이나 해 볼 수 있겠는가”란 물음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강요하는 관념의 부조리와 야만을 극대화한다.


  현재도 디스토피아지만 성차별, 혐오가 사라진 미래라고 유토피아는 아니다. 계층 간 이동이 원천봉쇄돼 있는 2059년은 또 다른 질곡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디스토피아다. 시대를 달리해도, 시스템을 바꾸어도, 여전히 디스토피아를 사는 인간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뭘까. 

  “어느 한 부분을 개선하려고 파고들다 보면 좋은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강제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죠. 서점(그는 지난달까지 제주에 살며 나흘은 원고를 쓰고 사흘은 서점에서 일을 했다)에서 일할 때 독자분들은 매번 ‘우울하거나 힘들지 않은 이야기를 추천해 달라’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문학이 그런가요. 어떤 것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고 어떤 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일러 주는 게 문학 본연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현재도 미래도 세계는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려냈습니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