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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J.M.쿳시

금동원(琴東媛) 2018. 8. 25. 15:50

 

 

야만인을 기다리며

  J.M.쿳시 저/왕은철 역 | 들녘 |

 

   오래 전 공과 대학에 다니던 조카녀석이 학교 숙제라며 다급하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교양과목의 과제로 선택된 책이라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여받아 온 책을 내가 대신(?) 읽으면서 조카 녀석에게 새삼 고마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간단한 요약본을 만들어주고, 본인의 독후 소감에 참조하라고 했지만 내내 대신 써준 듯한 마음에 찜찜했었다. 다행히 그 교양과목이 시험으로 대체되었다고 하여 마음이 홀가분하였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잘 읽혀지는 가독성이 있는 책은 아니다. 의미를 자꾸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천천히 읽어보시라.  (참치)

 

  ○책소개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쿳시는 이미『추락』등의 작품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2회 수상한 바 있는 역량있는 작가다. 그의 작품에는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쾌락과 고통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주조를 이루는데,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저자의 분신인 주인공을 과감히 밀어넣은 후 길어낸 내적 고백이기에 그의 사유는 더욱 빛이 난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변경을 통치하는 한 치안판사의 내적 고백을 통해 제국의 모순 뿐 아니라, 제국의 일원으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판사 개인의 부조리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제국의 충실한 하인인 '나'는 주민 3천명이 사는 변경을 통치하는 치안판사로, 몇십 년 동안 자그마한 변경 정착지의 일들을 관장하면서 제국의 정책에 관한 것일랑 애써 무시하며 살아온다. 하지만 취조 전문가들이 도착하면서 무죄한 원주민들을 '반역자'로 몰아 잔인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목격한 후 희생자를 동정하게 되고 급기야 제국의 적으로 낙인 찍히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제국'이란 억압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 여부에 상관 없이 타자를 만들어내고 조작된 정보를 유통시키며 끊임없이 '상상'속의 '야만인'을 재생산해 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복잡한 문제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애쓰지만 종래엔 '정의'에 몸담고야 마는 치안판사의 행로를 통해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인간은 애초에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인간 본성'의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심층적인 추적이 시종일관 작품을 묵직하게 지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재미'라는 한마리의 토끼 또한 놓치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야만'의 자연과 문명에 대한 아련함, '관계와 소통'을 묻는 듯한 에로틱한 묘사까지, 아마도 그 모든 것이 그림자처럼 '인생'의 또다른 의미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에 더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 듯. 아름다운 묘사와 짧은 단문의 매력은 그의 작품을 만끽하게 하는 또하나의 요소다.

 

  ○저자소개 : John Maxwell Coetzee,존 쿳시

 

  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우스터에서 출생.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 백인으로, 여러 나라 말로 글을 써왔다.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영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기도 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3년여 동안 뉴욕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후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1984년부터 2002년까지 케이프타운 대학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애들레이드 대학과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치밀한 구성, 풍부한 대화, 정확한 통찰력으로 서구 문명의 위선을 비판하고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파헤쳐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마이클K의 삶과 세월』『추락』으로 한 작가에게 상을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전례와 불문율을 깨고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하고 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첫 작품은 『어둠의 땅들』(Dusklands)이다. 그 다음 작품은 『나라의 심장부』(In the heart of the Country)인데, 이 작품으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 및 CNA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s)는 CNA상, 제프리 페이버 메모리얼상, 제임스 테잇 블랙 메모리얼상을 수상했다. 『마이클 K』(Life & Times of Michael K)로 1983년 부커상 및 프리 에트랑제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이후 『포우』(Foe), 『철의 시대』(Age of Iron), 『페테르부르크의 대가』(The Master of Petersburg), 『추락』(Disgrace) 등을 발표했으며, 1999년 『추락』으로 다시 한 번 부커상을 받음으로써 최초로 부커상을 2회 수상한 작가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로 1987년에는 예루살렘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라난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을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같은 남아공 출신 작가 고디머나 브링크와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하찮고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소설을 '사유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인식의 지평 안에 있는 것은 어느 것이든 헤집어보고 회의하며 의심한다. 현재 남아공 케이프타운대 문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작품에는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쾌락과 고통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밀한 탐구가 주조를 이루는데,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저자의 분신인 주인공을 과감히 밀어넣은 후 길어낸 내적 고백이기에 그의 사유는 더욱 빛이 난다. '아프리카너(Afrikaner,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법제화한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라는 출신배경이 함축하고 있듯이, 저자는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혼란과 식민주의자들의 원죄 의식을 문학으로 형상화해온 작가이다.

  대표작『마이클K』는 한 편의 훌륭한 시대소설이면서도 한 개인의 치열한 존재론적 몸짓을 보여주는 내면소설이다. 역사와 권력과 정치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향한 갈망을 '정원'으로 표상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존재의 안식처를 상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억압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꿈꾸는지에 대한 쿳시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보여준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변경을 통치하는 한 치안판사의 내적 고백을 통해 제국의 모순 뿐 아니라, 제국의 일원으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판사 개인의 부조리를 묻고 있다. 쿳시는 이 책을 통해 '제국'이란 억압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의 존재 여부에 상관 없이 타자를 만들어내고 조작된 정보를 유통시키며 끊임없이 '상상'속의 '야만인'을 재생산해 내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복잡한 문제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애쓰지만 종래엔 '정의'에 몸담고야 마는 치안판사의 행로를 통해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인간은 애초에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으로는『더스크랜즈』『나라의 심장부에서』『야만인을 기다리며』『페테르부르크의 대가』『포우』『철기시대』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몇편의 언어연구서, 문학연구서와『소년기』(Boyhood: Scenes from Provincial Life)와 『청년기』(Youth) 등 두 권의 회고록이 있다.

 

 

  역자 :왕은철

 

  전북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클래리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와 메릴랜드 주립대에서 각각 영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이프타운 대학, 이어하트 재단, 풀브라이트 재단 등의 펠로 및 학술진흥 재단 해외파견 교수를 역임했으며,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2년간, 그리고 워싱턴 대학에서 1년간 객원교수로 있었다. 현재 문학평론가이자 전북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북대학교 학술상 및 수업상을 다수 수상하고, 2011년 제5회 유영번역상과 2012년 제2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쿳시의 『어둠의 땅』『야만인을 기다리며』『마이클 K』『철의 시대』『페테르부르크의 대가』『추락』『소년 시절』『엘리자베스 코스텔로』『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슬로우 맨』을 비롯하여 고디머의『거짓의 날들』, 브링크의 『메마른 계절』,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웰티의 『낙천주의자의 딸』, 응구기의 『한 톨의 밀알』, 하 진의 『니하오 미스터 빈』『카우보이 치킨』『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남편 고르기』『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전쟁 쓰레기』『광인』 등 30여 권의 역서와 『배반과 도덕적 상상력』『J. M. 쿳시의 대화적 소설―상호텍스트성과 탈식민주의』(문화관광부 우수도서), 『문학의 거장들』 등의 저서가 있다

 

 

 

  독자 리뷰

 

 

  ■야만인은 없다

   

themind | 2013-02-16

 

  '당신은 역사에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군.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줄까?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냐. 조금만 지나면 잊혀질 것이고, 변경은 이후 20년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거야.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 관심이 없거든.

  한 선배가 적어놓은 책의 구절이 와닿아 찜해놓았던 책. 찾아 본 다른 서평들도 마음에 들어 쉽게 집어들었지만 내게는 결코 쉽지 않았던 책

  익명의 변방 지역을 배경으로 평화롭던 그 곳에 야만인들에 관한 얘기가 떠돌기 시작한다. 그 지역의 행정 책임을 맡고 있던 주인공 치안 판사는 한가로운 시골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야만인 색출과 토벌을 목적으로 나타난 중앙정부의 군인들을 상대하기 시작하면서 단조롭고 평화롭던 생활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30여년을 그곳에서 지낸 주인공에게 제국의 중앙정부가 적으로 간주하는 야만인들, 즉 변방의 다른 부족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농사 짓고 고기 잡고 가축을 기르던 평화로운 사람들이었을 뿐, 오히려 제국에 밀려나 자기 땅을 잃고서도 군사적, 정치적 저항도 못한 채 때가 되면 찾아와 원시적인 교역을 요청하는....힘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어느 새 제국은 그들을 적으로 공포하고 잡아다 고문하고 살인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제국은 아무 힘도 없는 그들을 왜 적(야만인들)으로 만들고 제국의 국민들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심어주면서 그들과의 전쟁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야 했을까? 싸울 힘도 없고 싸울 의사도 없는 그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살인하면서까지 제국이 얻으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주인공인 치안판사는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군인들의 색출 작업에 암묵적인 동조를 하였고 일이 진행되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잡혀온 야만인 포로들이 거짓 증언을 강요 당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죽어갈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리길 그래서 다시 전처럼 한가로운 변방의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지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 물론 군인들의 그러한 행위에 심증적으로 동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비교적 자유로운 시절, 20-30대 초반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루했을 것이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다양한 인간 관계를 맺으면서 내 자신이 구속이나 억압적인 상황에 대해 매우 저항적이라는 사실 (그렇다고 대들며 싸우거나 논리적으로 비판하지도 못하면서)을 깨닫기 시작했는데...어느 순간....내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자의는 아니더라도 가해자, 아니 최소한의 공모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그래서 흑도 백도 아닌 회색지대에 엉거주춤 서 있는 내 모습...그래서 때로는 내가 속한 그룹의 악랄함, 추함, 비겁함 등을 폭로하고 싶으면서도...때로는 자의 반 타의반 그 inner circle의 공모자가 되어...그런데, 그러한 현상은 나 개인의 경험 (현실?) 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우리 공동체, 사회, 국가, 근래에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그게 실제하든 아님 정말로 허상이든)를 야만인으로 만들고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분노와 적개심을 심어주고 싸움을 하게 만들고...대부분의 연약한 사람들은 거기에 놀아나고 결국 남는 건 죽은 영혼들과 땅....야만인들도 죽고 제국의 국민들도 죽고 살아남는 건 오직 제국과 그 주동자들 뿐인....이전에는 땅과 권력을 놓고서 제국에게 야만인들의 존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은 돈을 놓고서 가진 자들에게 일도 안하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못나서 못사는 가난한 야만인들이 필요하고, 교회나 나라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교회나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종북의 야만인들이 필요한 건 아닌지.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야만인은 끊임 없이 만들어진다, 그 형태를 바꿔가면서.  

 

  주인공은 고문으로 아버지를 잃고 본인도 고문으로 몸이 다치고 눈이 멀게 된 남겨진 여자 야만인 포로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확신을 행동으로 점점 옮기게 된다. 결국에는 주인공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제국의 군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면서 모든 명예를 잃게 되는데....

  존 쿳시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지만 좋았던 것은....사람에 대해, 인간에 대해...매우 깊이 생각하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현실에 대해 실망과 절망이 쌓일수록 내게 남는 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 뿐이었는데(2012년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작가 같았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해가 될 줄을 알면서도 야만인 여자 포로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는 위험한 여행을 감행했던 건 타부족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이었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도리였을 뿐이기 때문이었고, 졸대령이나 중앙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면서도 야만인들의 무식함, 더러움 등등에 대해 역시 싫은 내색을 하는 것도 솔직한 접근이었다. 주인공이 하는 생각과 행동은 인간으로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저항감.....야만인들이라는 허상을 세워 제국의 권력을 지키려 하는 절대 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지 어떤 의협심이나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 저자(존 쿳시)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각각 대답한다고 한다. 정의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결국 이 책이 주고자 하는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 아닐까...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

 

 반면 주인공이 자신을 고문했던 만델 준위에게 나중에 묻는 질문,,,사람을 그렇게 짐승처럼 대하고도 바로 밥은 넘어가는지...손은 씻고 밥은 먹는지...하는 부분에 대해 저자도 뭐라고 답은 못하고 그냥 의문만 갖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듯이. 치열한 사유의 작가 조차도 도저히 이해 안되는 인간들의 행동이라는 게 있었던 걸까. 잔인함...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감각...

 

 

 

 이 책이 술술 넘겨가며 빨리 읽히는 책이 아니었던 건....한 구절, 한 구절이 치열한 작가의 생각을 깊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같이 생각하다 보면, 그 의미를 유추하다 보면 한 페이지 나가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 시대의 아픔, 모순에 대해 문제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위로와 도전을 동시에 주는 책이 될 것이다.    

 

 

  ■보편성 돋보이는 은둔의 소설가 쿳시의 작품 세계     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들      글 | 최성일 


  이름이 꽤 낯설다 싶은 해외 작가의 번역서가 적잖이 나와 있다면, 그 작가는 십중팔구 노벨상을 받은 작가이기 쉽다. 저작권에 구애됨이 없었던 예전일수록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농후한데 체슬라브 밀로슈, 엘리아스 카네티, 옥타비오 파스 등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이들이 쓴 책의 한글판 번역서는 노벨상 수상 연도와 그 이듬해에 출간이 집중된 경향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작품이 여러 군데서 나오는 중복 출판도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이러한 마구잡이식 출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1994년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해적판이 나돈 거의 마지막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노벨상의 후광은 여전히 대단한 것이어서 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나오기가 무섭게 수상 작가의 책이 서점에 깔린다. 그런데 이제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 우리 출판?독서계에도 익히 알려진 작가의 수상이 잦은 까닭에 기 출간본들이 새 단장을 하고 출시되는 상황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귄터 그라스와 A.S. 네이폴이 그러한 가까운 예에 속하고, 2003년 수상자인 존 쿳시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에는 노벨 문학상을 떨떠름하게 여기는 풍조가 없지 않다. 노벨상에 열광하는 태도가 지닌 이른바 '문화사대주의'의 측면을 비판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노벨상 수상작의 '문학성'을 문제 삼는 것에는 선뜻 맞장구를 치기 어렵다. 사실, 노벨 문학상에 대한 출판계의 열기와 독자들의 반응은 예전만 못하다. 시인이나 제3세계권에 속한 소설가는 노벨상의 후광 덕을 못 본 사례가 허다하다.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는 대부분은 영어, 불어, 독어권 작가들이다. 그나마 이제는 그것도 제한적이다.

필자는 노벨 문학상이 적잖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해도, 일년에 한번 세계적 수준의 해외문학을 접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소중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문학이 침체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근자에는 우리 독자들에게 수준있는 문학을 향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각별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전인류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존 쿳시의 작품들은 더욱 곱씹어 읽을 가치가 있어 보인다.

  존 쿳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강한 인상은 그것들이 결코 남의 얘기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왕은철 옮김, 들녘, 2003)와 『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이 특히 그랬는데, 이것은 소설의 밑바닥에 깔린 식민 지배 의식과 특정 계층의 권력 행사 같은 것을 우리도 겪어서일까. 물론 소설의 배경을 이루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갈등은, 우리에게는 지역간?계층간 갈등으로 나타난다.

  한국과 남아공은 한때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한 아픈 기억을 공유한다. 한국은 그 기간이 짧았고, 남아공은 꽤 길었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우리나라는 대만, 남아공, 이스라엘 등과 함께 초청 받지 못했다. 한국이 '반둥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북한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서였겠지만, 미국 블록의 일원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아무튼 제3세계에 속하는 네 나라가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제외된 것은 반공, 호전성, 인종차별주의가 그 이유였다. 백인정권이 흑백 분리정책을 밀어부친 남아공은 만델라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국제 사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가상 제국의 어느 변방 도시를 무대로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는 그 도시의 치안 책임자인 무사안일의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다. 그의 직책과 업무와 일상, 그리고 바람 따위를 서술한 대목을 보자.

  "나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敎區稅)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고 여기에 있는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1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또, 그는 평화를 선호한다. "나는 평화로운 게 좋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게 어쩌면 좋은 것일 게다." 도시에서 남쪽으로 2마일쯤 떨어진 곳의 모래로 덮혀 있는, 폐허로 변한 집들의 흔적을 발굴하는 게 취미다. 지위를 적절히 활용해 여자를 밝히는 늙은이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고생으로 편하게 먹고"산다는 것은 인정한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그는 원주민 소녀를 고문했던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는 것도 잘 안다.

  수십년간 이어진 변방 도시에서의 그의 평온한 일상은 제국의 수도에서 파견된 고위급 보안 요원 죨 대령의 출현으로 무참히 깨진다. 포로로 끌려와 고문을 당해 눈이 먼 원주민 소녀에게 동정심을 느낀 그는, 소녀를 보살펴 주고 원주민들에게 그녀를 데려다 준다. 이러한 그가 사관학교를 나온 젊은 장교에게 다음과 같이 비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맟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 하는 위태로운 생각을 하는 한심한 민간인 관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는 야만인과 내통한 죄로 치안판사직에서 쫓겨나고 갖은 곤욕을 치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변방 도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받는 도시 행정 책임자로 복귀한다. 치안판사가 했던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는 더 이상 권위적이지 않다. 소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묘하게 읽히는 힘이 있다. 다만, 흡인력이 강한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로 갈수록 늘어지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

  이 소설의 번역자는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이 소설이 마치 이라크 전쟁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통렬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고 했지만,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소설의 내용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도 그대로 투사할 수 있다.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에서 찾지 못한 대량살상무기만이 '야만인'은 아니다. 예전의 '야만인'이 북한의 침략 위협이었다면, 요즘의 우리에게 대표적인 '야만인'은 해외 신용등급 하락일 것이다.

  제국에 충성하는 군인과 관리들은 야만인의 침략을 '학수고대'하지만 야만인은 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야만인은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를 닮았다. 쿳시는 베케트 전문가이기도 하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법적 절차라는 건 단순히,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라거나, "돈도 없고 줄도 없고 학벌도 변변치 않은 젊은이들이 정상에 이른다는 건 힘든 일"이라는 지적은, 이것이 제국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 우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영 헷갈린다. 

 『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의 주인공인 영문학자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와 닮은꼴이다. 우선, 연배가 비슷하다. "그는 이혼까지 한, 쉰 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의 몸은 건강하고 정신은 맑다. 직업상, 그는 학자다. 혹은 그래 왔다. 가끔씩은 그의 중심부는 학문적인 일에 관련돼 있다. 그는 그의 수입과 기질과 감정적인 수단의 반경 내에서 살아간다. 그는 행복한가? 대부분의 척도로 보자면 그렇다. 그는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가  『추락』(왕은철 옮김, 동아일보사, 2000)의 주인공인 영문학자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 후렴구를 잊은 건 아니다. 죽기 전에는 누구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윽고 그의 행복한 삶은 파국을 맞는다. 그는 추문에 휘말려 대학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교수라는 직위를 앞세워 제자인 여학생을 농락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기에 동정의 여지는 별로 없다. 그는 대학 당국의 타협 제안을 거절하고 깨끗이 물러나 남아공의 동부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는 딸을 찾아간다. 그는 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청교도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일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그의 딸 루시는 흑인들의 땅에서 농장을 일군다. 그녀는 흑인 세 명의 습격을 받아 윤간을 당하고 임신까지하게 되지만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루시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여기 머무는 것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며, 평화를 위해 치러야 할 희생 정도로 여긴다. 데이비드 루리는 딸이 선택한 삶과 행동에서 약간의 자극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삶의 행로를 완전히 뒤흔드는 차원은 아니다. 

 『포 』(조규형 옮김, 책세상, 2003)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왕은철 옮김, 책세상, 2001)는 '소설가 소설'로 부를 만하다. 물론 전형적인 소설가 소설은 아니지만 말이다. 두 소설에는 공히 소설가가 등장한다.  『로빈슨 크루소』를 독특하게 패러디한  『포』에 나오는 바로 『 로빈슨 크루스』 의 원작자인 다니엘 디포다. 글쓰기의 자의식을 주제로 삼은 듯도 하나, 이 소설을 통해 쿳시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포는 이런 말을 한다.

  "책을 쓰면서, 참으로 자주 의심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지요. 내가 터득한 비결은 서 있는 곳에 표시나 표지를 달아 놓아, 다시 모색의 길에 나설 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만들어 길을 잃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지요. 일단 표시를 하고 나면, 모색을 계속하지요."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다름 아닌, 도스토예프스키다. 왕은철 교수(전북대 영문학)는 이 작품이 "쿳시의 개인적인 숨결이 가장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아니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어서 더욱 가슴 아프게, 배어 있는 소설"(『현대문학』2000년 9월호)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양아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쿳시의 아들은 자살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5』(범우사)의 2001년 6월 18일치를, 장정일은 쿳시의 소설들에 할애하고 있는데, 그날 독서일기의 끝에 붙은 사족이 재미있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계 백인인 J.M. Coetzee는  『야만인을 기다리며』(두레, 1982-인용자)에서는 쿠찌,『마이클 케이』(정음사, 1987-인용자)에서는 코에체, 『추락』에서는 쿳시로 불리웠다. 세 사람 모두 좋은 번역자들이어서 어떤 이름을 사용할까 고심하다가, 작가와 친분을 가진 『추락』의 번역자를 따라 쿳시라고 쓴다(왜냐하면 그의 이름을 직접 불렀을 테니까. 이를테면 "헤이, 쿳시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하세.")"

  그런데 더 정확한 발음은 '쿳시이'인 모양이다. 한국인 친구와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정확한 발음은 쿳시이(kut-SEE)입니다. 두 번째 음절에 강세를 주면서 '시이'라고 길게 발음하고, 첫 음절은 풋(put)과 운이 맞는 쿳(kut)으로 발음하면 됩니다."(『21세기 문학』제4호, 1998년 가을-겨울호)

  서면 인터뷰이기는 해도 국내 문예지에 실린 쿳시와의 인터뷰는 아주 귀한 자료다. 쿳시는 은둔자로도 유명한데,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지금까지 그는 어느 매체와도 인터뷰를 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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