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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팡세/ 블레즈 파스칼

금동원(琴東媛) 2018. 8. 29. 22:49

 

 

《팡세》

 블레즈 파스칼/ 민음사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제로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갈파한 철학자.
  샤토브리앙, 생트뵈브에게서 찬사를 받고, 보들레르, 니체, 졸라에게 영감을 주고, 실존주의자들의 선구가 된 사상.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팡세』단장 391에서.

 

 

작가 소개

 

  Blaise Pascal - 1623년 6월 19일, 프랑스 오베르뉴의 클레르몽 페랑에서, 고등 세무원장인 아버지 에티엔 파스칼과 어머니 앙투아네트 베공 사이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가족이 파리로 이주하였다. 12세의 파스칼이 유클리드 제32명제를 푸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가 크게 놀라며, 그때부터 수학과 기하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4세 때부터는 당대 과학자들의 모임인 메르센 아카데미에 출입하였다. 1940년 17세 때에는『원추곡선론』을 발표하고, 2년여에 걸쳐 계산기를 제작하였다. 24세 때에는 ‘진공’에 관한 실험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진공에 관한 새 실험』에서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데카르트 및 노엘 신부 등과 일련의 논쟁을 벌인다. 그는 1654년까지 자연과학과 수학, 기하학 등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보였다. 파스칼은 제1차 회심(1646년), 아버지 에티엔의 죽음(1651년), 사교 생활(1651~1654년), 제2차 회심(1654년) 등의 일련의 체험을 통해 이후 기독교의 원리 탐구와 인간과 신에 대한 사색에 전념한다.

   1655년에는 포르루아얄 데 샹에 체류하면서, 철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를 드 사시와 주고받는다. 이때『그리스도의 생애 약전』과『기하...학적 정신』을 쓴 것으로 추정한다. 1656년부터 장세니스트들에 대한 예수회의 비난이 점차 격화되자,『한 지방인에게 보내는 편지』(일명『프로뱅시알』)이라는 글을 통해 장세니스트들을 변론하는 데 앞장을 선다. 1658년부터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 호교론’를 쓸 구상을 시작하였다. 1659년부터 건강이 현저하게 악화되었고 1662년 8월 19일 지병이 악화되어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다. 1670년에는 파스칼의 유고 출판이 성사되어, 그의 조카 에티엔 페리에가 서문을 쓴『종교 및 기타 주제에 관한 파스칼의 사상』(『팡세』초판본)이 출간되었다.

         

 

 

  자:이환

  서울대 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파리대학에서 수학. 문학박사.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 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불어문화권 연구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파스칼의 생애와 사상』,『파스칼 연구』,『근대성, 아시아적 가치, 세계화』,『프랑스 문학 사상의 이해』 등이 있으며,『붉은 백합』(아나톨 프랑스),『사회계약론』(루소) 등의 주요 프랑스 문학과 보들레르, 사르트르, 사강, 카뮈 등 주요 작가의 작품들을 다수 번역하였다.

 

 

 

  출판사 리뷰

 

  파스칼의『팡세』가 원로 불문학자 이환 선생님(서울대 불문학과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환 선생님은 해방 후 한국에서 불문학 연구 제1세대이자 파스칼 연구의 권위자이다. 이환 선생님은 1964년에 이미『팡세』(제일문화사)를 번역한 바 있고, 여러 권의 파스칼 사상과『팡세』에 관한 저서와 역서를 펴내었다. 이번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팡세』는 필생의 작업을 완료한 것으로, 한국에서의 불문학 연구사에 있어서 소중한 작업이 될 것이다.

  파스칼이 죽은 지 3세기 반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팡세』만큼 널리 읽힌 고전도 드물다. 그러나 파스칼만큼 오해와 곡해를 받아온 사상가도 드물 것이다. 그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텍스트의 숙명적인 불완전성에 있다. 그는 자신이 오래전에 구상했던 <기독교 호교론>을 완성하지 못한 채 900여 개의 단편들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파스칼이 죽은 후 처음으로『팡세』가 출판되었을 때(1670년)부터 그것은 갖가지 요인들로 인해 본래의 텍스트와는 거리가 먼, 극히 불완전하고 왜곡된 것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 형태는 근 2세기에 걸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해 있었던 장세니즘에 대한 박해와 뒤이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냉대 속에서 파스칼은 흔히 비판과 야유의 대상으로 환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그에 대한 관심이 차츰 일기 시작하였고, 이 관심은『팡세』의 텍스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20세기에 들어와 몇몇 괄목할 만한 연구들이 파스칼의 텍스트 및 사상에 대한 이해를 전적으로 새롭게 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적어도 파스칼이 죽을 때 남겨놓은 상태 그대로의 텍스트를 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속에서 파스칼의 참모습을 찾아볼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번역한『팡세』 원본은 라퓌마L. Lafuma 판으로서 그것은 최근까지의 문헌학적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두고 새로이 편찬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파스칼의 진정한 의도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파스칼이 묘사한 인간의 모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 없는 인간의 비참>으로 요약된다. 이 비참은 그에 있어 매우 독창적이고도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인간의 무력, 다시 말하면 희구와 현실 사이의 모순에서 유래하는 무력이 바로 그것이다. 희구하는 진리에 대하여 오류, 행복에 대하여 비참, 정의에 대하여 변덕, 무한에 대하여 유한에 부딪칠 뿐인 인간은 영원히 분열된 극적 존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극의 묘사는 그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비극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환

 

 

  [독자 리뷰]

 

  팡세

  Elly | 2017-11-17 |

 

  파스칼은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고, 문학자이자, 철학자였다. 13세에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리를 터득하고 이후 다양한 원리를 밝히며 천재 소리를 들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모든 연구를 그만두고 기독교 교리, 신과 함께 하는데 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팡세는 파스칼 생전에 발간된 책은 아니고, 39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그가 "기독교 호교론"을 남긴 노트 묶음, 메모 등을 사후에 엮은 책이다. 총 900여개의 노트/메모가 순서도 없이 발견되었다는 걸 나중에 엮은 것이라 출판사마다 순서가 다르기도 하단다.

  기독교 호교론. 그러니까, 기독교 신의 존재 증명등 존재론과 교리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 가르침, 반대론의 분석을 호교론이라고 한다. 수업시간에 한번쯤 들어본 것 같기는 했는데, 실제 방대한 양으로 묶인 팡세를 보고야 이런 것이구나 알수 있었다. 사실 네이버 지식백과 설명에서처럼, 궤변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신앙 자체를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건 궤변처럼 들리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이런 논리가 아닐까? 모든 것은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식으로라도 신을 찾을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실제 궤변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본래 남들이 하는 한두마디 말로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것 자체가 모순이니까. 꾸준한 믿음으로 계속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신앙이다.

 

  양이 상당한데 그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독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런 인간에게 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매물차게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비참한지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런 비참한 존재에게 신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비참해 질지에 대해서도. 기독교인인 내가 읽기에도 상당한 양이었고, 중간중간 이건 억지같이 들릴 수도 있겠다 싶은 점이 눈에 띄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내용이었고, 이런 논리로 접근할 수 있구나 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무지했는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책 자체는 어려웠지만, 신앙인으로써 많은 부분을 되돌아 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쭉 이어진 형식이 아니라 요약을 할 수도 없고, 책을 읽으면서 든 그 수 많은 생각을 옮기기도 어렵다.

 신앙이 없거나, 다른 신앙을 가진 사림은 이 책을 어떻게 읽을지 굉장히 궁금하다. 

 * 여기 저기 밑줄을 많이 쳤지만 몇 가지만 옮겼다. 그래도 상당히 내용이 많네.

  84 - (172)  (...) 현재는 흔히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현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둔다. 그리고 현재가 즐거울 때는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아쉬워한다. 우리는 이것을 미래에 의해 지탱하려고 노력하고 또 우리가 도달하리라는 아무 보장도 없는 한때를 위해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있지도 않은 일들을 안배하려고 궁리한다.
각자 자기의 생각을 살펴보라. 우리 생각이 온통 과거 또는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거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는다. 혹 생각한다면 미래를 사용하기 위한 빛을 그것에서 빌려오기 위해서일 뿐이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고 단지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행복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p.63

  167 - (323) 나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행인들을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는데 내가 그곳을 지나간다면 그를 나를 보기 위해 창가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는 유독 나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그 사람의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만약 천연두가 그를 죽이지는 않고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을 죽인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까.

 

  만약 나의 판단력, 나의 기억력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고도 이 특성들을 잃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육체 안에도 정신 안에도 있지 않은 이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특성들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특성들에 의하지 않고 어떻게 육체나 정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한 인간의 영혼의 실체를 추상적으로, 그 안에 있는 특성과는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도 없고 또 옳지도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성만을 사랑한다.
그렇다면 지위나 직책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단지 빌려온 특성들로 인해 사랑하므로. - p.94-95

  218 - (397) 인간의 위대는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점에서 위대하다. 나무는 자기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위대함이다.  - p.115-116

  235 - (148) 온 땅위에, 심지어 우리가 죽은  후에 태어날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고 싶어할 만큼 우리는 오만하다. 그런가 하면 주위의 대여ㅕ섯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을 느낄 만큼 공허하다. - p.121

  245 - (420)
  그가 자만하면 나는 그를 낮추고
  그가 낮아지면 나는 그를 추어올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와 반대로 말을 한다,
  마침내 그 자신이
  불가해한 괴물임을 깨달을 때까지. -p.124

  309 - (430) P-R 에서 (불가해성을 설명한 다음, 서두) 인간의 위대한 비참은 그처럼 명백한 것이므로 참된 종교는 인간 안에 위대의 대원리와 비참의 대원리가 있다는 것을 기필코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또 이 놀라운 상반된 것들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참된 종교는 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행복은 신 안에서 사는 것이고 우리의 유일한 불행은 신을 멀리하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종교는 우리가 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가로막는 암흑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의무는 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지만 정욕이 우리를 신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므로 결국 우리는 불의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종교는 우리가 신과 우리 자신의 선에 대해 품고 있는 이 반항심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세계의 모든 종교를 검토해 보고 이 조건들을 만족시킬 다른 종교가 기독교 외에 또 있는지 보기 바란다. 
-p.163-164

  336 - (257)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있다. 신을 발견한 다음 신을 섬기는 사람들, 신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온 힘을 다하여 신을 찾는 사람들, 신을 찾지도 발견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첫째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행복하고, 마지막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불행하다. 중간 사람들은 불행하지만 합리적이다.
- p.178 

  383 - (527)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중간이다. 그 안에서 신과 우리의 비참을 동시에 만나기 때문이다.
-p.200

  466 - (...)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였다는 소문.
  나는 그 권위와 존속과 영속성과 도덕과 행위와 영향력 등등에 있어서 전적으로 신성한 최초의 위엄 있는 종교를 찬양한다.
이렇듯 나의 구주에게 두 팔을 내민다. 그는 4,000년 동안 예언된 끝에 예언된 때와 모든 상황 가운데 이땅위에 내려와 나를 위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은총에 의해 나는 그에게 영원히 결합되리라는 희망 가운데 평안한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에게 주고자 한 복 안에서나, 나를 위해 내게 보내온 불행 안에서나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의 본을 따라 참고 견디라고 그가 가르치는 그 불행 속에서도. p.245

  667 - (537) 기독교는 기묘하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기가 천하고 가증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명하는가 하면, 하느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라고 명한다. 이와 같은 평형추가 없다면 이 상승이 인간을 끔찍이도 공허하게 만들거나, 이 하강이 끔찍이도 비천하게 만들 것이다. p.348

  668 - (526) 비참은 절망을 갖게 한다.
  교만은 자만심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의 크기로써 인간의 비참의 크기를 보여준다. p.348

  944 - (23)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p.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