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설
허연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죄는 검은데
네 슬픔은 왜 그렇게 하얗지
드물다는 남녘 강설强雪의 밤, 천천히 지나치는 창밖에 네가 서
있다. 모든 게 흘러가는데 너는 이탈한 별처럼 서 있다. 선명해지
는 너를 지우지 못하고 고장 난 채로 교차로에 섰다. 비상등은 부
정맥처럼 깜빡이고 시간은 우리가 살아 낸 모든 것들을 도적처럼
빼앗아 갔는데, 너는 왜 자꾸만 강설 내리는 창밖에 하얗게 서 있
는지, 너는 왜 하얗기만 한지
아프지 말라고
아프지 말고 살아서
말해 달라고?
이미 늦었지
어떻게 검은 내가 하얀 너를 만나서 함께 울 수 있겠니
재림한 자에게 바쳐졌다는 종탑에 불이 켜졌다
피할 수 없는 날들이여
아무 일 없는 새들이여
이곳에 다시 눈이 내리려면 이십 년이 걸린다
-『시인수첩』,(2018 , 가을호 통권 58호)
'시인의 詩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시에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0) | 2018.09.14 |
---|---|
릴케의 시를 읽다 (0) | 2018.09.12 |
순수의 전조/ W. 블레이크 (0) | 2018.09.01 |
처마 끝/ 박남희 (0) | 2018.08.30 |
시가 막 밀려오는데/ 정현종 (0) | 2018.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