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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나를 만지지 마라 /장 뤽 낭시

금동원(琴東媛) 2018. 12. 25. 13:27

 

 

나를 만지지 마라』-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장 뤽 낭시 저/이만형, 정명교 역  | 문학과지성사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예수의 몸을 만지려는 막달라 마리아와 그것을 금지시키는 예수의 말씀 “나를 만지지 마라”
 접촉의 욕망과 금지에 대한 낭시의 매혹적 사유

 몸, 공동체,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대해 독창적인 연구를 전개해온 프랑스의 철학자 장-뤽 낭시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상징적 장면을 분석한 에세이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가 출간되었다. 부활 첫날,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알아보고 몸을 잡으려 하자 이렇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낭시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장면, 특히 마리아의 접촉을 금지시킨 예수의 말에 각별히 주목한다. 그는 이 말이 발성되는 방식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모습과 동작, 그리고 이 장면을 그린 숱한 성상화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대조해가면서 그 한마디 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탐색한다.

 

 

 

 ○작가 소개

 

 장 뤽 낭시 (Jean-Luc Nancy) 프랑스 보르도 근처의 코데랑 출신으로 1968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쳤다. 낭시는 독일 낭만주의, 헤겔,니체,하이데거의 철학과 라캉의 사상을 재해석하는 동시에, 독일 낭만주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 등 독일사상으로부터 출발해 정치철학과 미학, 예술이론 분야에서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했다. 특히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가능한 공산주의와 공동체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다루었으며 이는 동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크 랑시에르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그의 저서들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현재는 국립대학연맹에서 철학분야, 그리고 모리스 블랑쇼 연구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문자라는 증서』(필립-라쿠 라바르트와 공저, 1973), 『철학의 망각』(1986), 『무위의 공동체』(1986), 『사유의 무게』(1991), 『코르푸스』(1992), 『세계의 의의』(1993),『뮤즈들』(1994), 『복수적 단수의 존재』(1996), 『이미지의 심연 속에서』(2003), 『데클로지옹』(2005), 『작가의 초상』(2005), 『민주주의의 진실』(2008) 등이 있다

 

 

 ○역자

 

 *이만영

충남 공주 출생.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10년간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하였다. 지금은 돌아와 양평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장 일과 목회를 겸하고 있다. 「한 많은 세상의 한없는 한의 욕망」(『문학과사회』 제15호, 1991년 가을) 등의 글을 썼다.

 

 *정명교(필명 정과리)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조세희론」이 당선되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부정기 문학지 『우리 시대의 문학』 편집동인이었으며, 1988년부터 2004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하였다.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책 속으로

 

 이게 믿음la foi과 신앙la croyance을 화해가 불가능하게끔 갈라놓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신앙은 타인에게서도 신앙이 증명되고 강화될 수 있는(그는 선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구원한다) 일종의 동일성을 제기 혹은 가정하는 데 비해, 믿음은 어떤 예기치 않은 부름이 타인으로부터 들려오는 걸 허용하는 것,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청취의 상황 속에 스스로가 놓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앙과 믿음을 갈라놓는 것은 똑같이 종교와 문학·예술을 갈라놓는 것이기도 하다._22쪽

 만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은 부활한 몸이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만지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져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몸은 만질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혹은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으로서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텍스트는 이 몸이 만져질 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혹은 차라리, 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_31~32쪽

 그를 만졌다고 착각함으로써,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접촉과 현존은 그 떠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말이다. “부활이 일어날 때, 그는 떠난다. 다시 말해, 부활은 현존에 무엇인가를 보태 그 한결같은 동일성을 영구화시키고 무한히 적용되게 하고 무한히 의미하게 한다는 뜻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resurrection”은 융기surrection이다. 즉,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surgissement하는 것이다._32~33쪽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서 자신의 나타남이라는 선물을 그녀에게 주긴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라고 그녀를 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가 떠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도 떠나 소식을 알린다. 바로 그녀가 최초로 파송된 사람이다. 예수의 말씀을 전파할 책임을 떠맡은 사람들, 즉 “형제들”을 제치고 그녀가 최초의 메신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두 손은 빈번히 두 개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여인을 멈춰 세워 그녀를 저의 소명 쪽으로 돌려놓는다._61쪽

 대체로 보아, 한 그림의 고유한 힘은 이 만지는 동작과 이 만짐을 얼마나 자기 방식으로 과감하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여하튼 두 인물이 서로를 만지거나 스칠 때가 있는가 하면(폰토르모, 뒤러, 카노), 혹은 유사한 빈도수로 나타나는 경우에서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만질 때가 있고(티치아노, 지오토), 또는 예외적으로 예수가 여인을 만지는 때가 있다. 마지막의 경우 그 만짐의 방식에 대한 논란이 있다. 폰토르모의 그림은 마리아의 가슴에 닿은 그리스도의 집게손가락을 그리는 것으로 혹은 희미하게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그쳤다._63쪽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닿는 이가 누구든 물러서게 한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만지고 우리를 찌르는 것은 그것들이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것들이 우리 쪽으로 가까워지는 행위, 그것은 그것들의 멀어짐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그 멀어짐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이 감각이 그들의 의미 자체이다. 만짐의 감각이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_64~65쪽

 그것을 원하지 마라, 그것을 생각하지 마라. ‘그것을 하지 마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할 때조차도(막달라 마리아는 그것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녀의 손은 벌써 그녀가 사랑하는 이의 손에, 혹은 그의 옷이거나 그의 벗은 몸의 살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바로 잊어라.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_65~66쪽

 막달라 마리아는 가장 대놓고 예수를 만졌던 여자다. 향유를 그의 몸에 바른 여인이다. [……] 성유聖油는 감각을 자극하는 향유香油로 대체되고, 기름은 머리가 아니라 발에 부어진다. 진짜 기름부음인 건 맞지만, 그러나 죽을 예수의 몸을 미리 향기롭게 하는 기름부음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것, 그의 생애에서 품행이 의심스러운 여자로부터 도유를 받는 기묘한 축복을 통해서 기림받게 된 그의 몸을 예고하는 것이다._71~72쪽

 대관절 왜 몸인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_86쪽

 이러한 떨어짐, 이 물러남 혹은 이 거두어들임이 없다면 만짐은 더 이상 만짐이 아닐 것이다. [……] 그것은 어떤 포착, 고착, 접착, 더 나아가 그것을 특정한 사물 속에 가두고 사물을 그 자신 안에 가두어, 그것들을 맞물리게 하고 서로 상대방을 제것화하고 동시에 상대방 안에서 적응되는 응착 속에서 사물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동일화, 고정, 소유, 부동성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나를 붙들지 마라Ne me retiens pas”는 또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_88쪽

 우선 이 문장은 대면의 상황에서 위협적인 어조로 울릴 수 있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만지려고 들지 마라. 만지면 나는 너를 때리겠다.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마라. 너는 내가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경고이고 최후의 통첩이다. [……] 그리고 이 최후의 용맹한 맞섬 속에서 불시의 외침 혹은 명령은 그 자체로서 폭력에 대한 촉구의 형식을 띤다. 이 경보를 발하는 사람은 폭력을 원하는 사람일 수 있다._94~95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나를 만지지 마라: 놀리 메 탄게레
 예수는 왜 마리아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요한복음」을 따라 간단히 정리하면, 부활의 첫 장면(제20장 1~18절)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나서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이 빈 것을 알고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말하자 제자들이 와서 확인하고 돌아갔다. 막달라 마리아는 남아 있다가 뒤에 서 있던 정원지기에게 예수의 몸을 어디다 두었는지 물었는데, 그가 “마리아야” 하고 불렀다. 마리아가 그가 예수임을 알아보고 “라뿌니”(스승님)라고 답하면서 예수의 몸을 잡으려 하자,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만지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하였고, 이를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전했다.

 예수는 왜 마리아의 접촉을 금지시킨 것일까? 본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몸 자체가 먹고 마실 것으로 주어진 이래 만질 수 없는 것이란 없다. 예수는 어떤 순간에도 사람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을 들고 제자들에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했고, 부활을 의심한 도마에게는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허락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나를 만지지 마라’ 장면은 일종의 예외, 신학적 유일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활과 함께 “주님의 오른편에 앉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 예수를 만진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암시, 혹은 신성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간의 오만이 야기할 수 있는 재앙에 대한 경고인가?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이 말의 문화사회적 의미를 민주주의로부터 신정사회로의 퇴행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낭시의 분석을 따라가려면, 예수가 구사했던 ‘비유parabole’의 기능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낭시는 예수의 ‘비유’가 통상적인 비유들과 달리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능력의 진화를 ‘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예수가 “귀 있는 자 들어라”라는 말을 통해 귀를 갖추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비유는 의미가 아니라 계시가 되고, 형상은 재현이 아니라 실천이 된다.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말 역시, 이 말을 듣는 자는 그 직접적인 의미의 이행뿐만이 아니라 그 말이 속에 부화시키고 있는 가외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다가감이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비유가 새로운 삶에 대한 계시라는 것은 그것이 “과잉-의미”로 넘실댄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넘어, 현존 너머, “주어진 것,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 여기에 놓인 것을 넘쳐나는 어떤 과잉의 광채” 속에서 열린다. 따라서 예수의 말은 이중적으로 읽혀야 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는 접촉을 금지하는 바로 그 작용으로 동시에 접촉에 대한 욕망을 유지시키는데, 여기서 만지면 안 되는 것은 ‘부활한 몸’이다. 그의 몸이 공기화된 육체, 비물질적인 몸, 유령의 몸, 환영의 몸이 되어서 만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몸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접촉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를 만지지 않으면서 그에게 다가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접촉이 실질적으로 유발하는 만짐의 동작과 만져서는 안 되는 실체 사이의 분리를 둘러싼 끝없는 밀고 당김. 낭시는 예수의 말을 이렇게 변주한다. “나를 만지려면 제대로 만져라, 떨어져서. 전유하려고 하지 말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말고.”

 

  부활한 예수를 만지는 일이 진리에 다가감을 뜻한다면, 중요한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다가감’이다. 끝없이 다가가되 미치지 못하는 삶, 끝없이 감행하되 항상 반성하는 삶의 일상적 실행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의 장면에서 예수를 건너 두 사람(정원지기와 마리아)에게로 의미를 이월시킨다. 예수가 정원지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낭시는 이렇게 말한다. 부활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성시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깨닫는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돌이킴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의 생명의 일어남이다. 다시 말해, 유한자로 하여금 그의 유한성을 수락하는 자세로 무한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는 마리아가 그를 잡으려는 걸 물리치는 동시에 마리아에게 가서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알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손은 빈번히 두 개의 방향을 암시적으로 표시한다.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여인을 멈춰 세워 그녀를 저의 소명 쪽으로 돌려놓는다.” 해선 안 될 일을 통해서 부활의 진실은 확정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통해서 그것은 어떤 고정된 의미에 머무르는 대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사정을 기술하는 낭시의 문장은 아름답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 혹은 낭시의 예술론

 

 이 책의 번역은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초역을 하고, 목회 활동을 하는 이만형이 영어 번역본을 참조하여 종교적인 부분을 유의하며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책 말미에는 옮긴이들이 각각 쓴 해설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정과리는 “현대 사회의 개인의 윤리학” 혹은 “민주주의 사회의 존재론”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며, 이만형은 복음주의가 지배적인 우리나라(‘만지지 마라’보다는 ‘만져라, 거침없이 만져라’가 그 슬로건이라 할 수 있고, 신성에 접하고 신성을 소유하고 스스로 신성화하려는 대중적 열망이 들끓는)에서 이 책이 어떤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인가에 주목해보자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사랑 혹은 진리(에 다가감)에 대한 이야기로도, 혹은 낭시의 문학론, 예술론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자에게 직접 그를 대행하게 하는 것은 “[부활은] 그[예수]의 내부에서 일어난 타자의 들림”이라는 이 책의 궁극적인 전언과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옮긴이들이 강조했듯, 낭시가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이야기의 뿌리를 이루는 생각을 더듬어 다시 보면, 발견과 경이의 폭죽이 사방에서 터지며 이야기가 열려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 “나를 만지지 마라” 혹은 “붙들지 마라”는 그리스어로는 “Me mou haptou”, 라틴어로는 “Noli me tangere”이다. 그리스어에서는 ‘만지다’와 ‘붙들다’의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었는데 라틴어에서는 ‘만지다’라는 뜻으로만 축소되었다. 그래서 불어로는 “Ne me touche pas”로 번역되었고, 영어 킹 제임스 판에서는 “Touch me not”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영어 표준번역에서는 “Do not hold on me”로 번역되었고, 그 영향인지 한국어 성경에서는 “붙들지 마라”로 번역되었다(“붙잡지 마라” “만지지 마라”로 번역한 한국어 성경도 간혹 있다). 이 책에서는 ‘만지는 감각’을 이 말의 핵심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낭시는 이 점을 특별히 고려해 라틴어 번역 문장 Noli me tangere를 제목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