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산만했던 인간의 뇌, 책 안읽으면 원시인처럼 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뇌는 퇴화한다
인간의 뇌는 물렁물렁해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데,
책 안 읽으면 집중 못 하고
원시인처럼 뇌 산만해져
현대인, 디지털 정보에 중독돼
상시적인 주의력 결핍에 빠져
인간의 사유·행동,독서에 최적화
독서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뇌가 새로운 것을 배워 스스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인류의 기적적 발명이다.” 미국 신경심리학자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에 나오는 말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 위에 나타난 것은 약 20만 년 전, 문자가 발명된 것은 고작 8000년 전이다. 인류사 대부분은 문자 없이 살아왔다. 우리 유전자엔 독서 능력이 새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자원을 투자해 갓난아기를 ‘책 읽는 아이’로 훈육했다. ‘읽는 능력’이 우리 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독서의 전면 후퇴가 일어나고 있다. 독서율이 떨어지면서 서점은 무너지고 도서관은 비어간다. 한 문명의 퇴락이고 역사의 퇴보이며 인간의 퇴화이다. 읽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세상, 즉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수축하는 중이다. 유튜브로 대표되는 영상, 리니지로 표상되는 가상, 페이스북으로 상징되는 잡담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런데 읽기를 잃어도 인간은 괜찮을까. 혹여 인간 실존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화면으로는 얻을 수 없고 독서로만 얻을 수 있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한국 40대 이상 책 안 읽어
한국에서는 나이 든 사람일수록 ‘독서 불안증’에 걸리기 쉽다. 화면에 중독되어 글이 세 줄만 넘어가도 머리가 어질어질, 손이 움찔움찔하는 현상 말이다. 지난해 9월 이순영 고려대 교수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독자(讀者)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인 전국 10세 이상 남녀 1200명 중 책을 전혀 읽지 않는 독자가 23.0%, 책을 실제로 읽는다고 할 수 없는 한 해 한 번 읽는 독자가 15.4%로, 합치면 38.4%였다.
특히 중년 이후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40대의 43.9%, 50대의 53.0%, 60대 이상의 74.4%가 책을 전혀 읽지 않거나 일 년에 한 번 읽었다. 아이들 보기 민망하게 40대 이상 한국인 두 명 중 한 명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 속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아도 유튜브 등에서 얼마든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게임 등으로 시간을 보내도 좋으니 상관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인간과 화면을 보는 인간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화면 읽기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을 떨어뜨린다. 1989년에 실시된 한 연구에 따르면 하이퍼텍스트로 이루어진 문서들은 인간을 산만하게 만든다. 글에 몰입해 의미에 집중하게 하는 대신 제트자(Z)로 훑어 읽으면서 딸린 링크들을 클릭해서 새로운 문서를 내려받게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용자가 한 문서만 줄곧 읽으면 돈은 누가 낸단 말인가. 문서 사이를 한없이 이동하면서 새로운 광고에 노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즈음 유행 중인 SNS의 경우에는 유동성이 더욱 심하다. 이러한 정보처리 과정을 즐기다 보면 뇌의 신경망이 변하면서 독서를 통해 이룩한 문해력이 파괴된다.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지난해 발표되었다.
책 읽지 않으면 뇌 퇴화해
울프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시대에 책 읽는 뇌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기술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울프는 젊은 시절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를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어려운 단어, 꼬인 문장, 느려터진 전개를 견디지 못했다. 책을 읽는 동안 울프는 책장을 빠른 속도로 앞뒤로 뒤적이면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댔다.
울프의 뇌는 문장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야기의 심층을 살피는 데 필요한 ‘인지적 참을성’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을 모아 문장에 집중하는 대신 표층에 머물러서 핵심만 추리려 들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최고의 독서 과학자인 울프조차 책을 읽을수록 책이 점차 어색해지는 ‘독서 소외’에 빠져든 것이다. 디지털 정보 소비에 중독된 탓이다. 상시적 주의력 결핍 상태에 놓이는 것은 현대인의 무섭고 중대한 질병에 해당한다. 이는 독서가 힘을 잃자 우리의 자연적 본성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뇌는 본래 산만하다. 인류는 천적들로 가득한 사바나 지역에서 진화했다. 주변을 쉼 없이 둘러보고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행동하는 쪽이 생존에 더 유리했다. 갓난아기는 눈동자를 한순간도 가만두지 않는다. 천장에 달린 모빌의 운동을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작은 변화에 얼마나 열렬히 반응하는가. 한 현상에 집중해서 생각하는 일은 인간의 타고난 자질이 아니다. 오랜 문명화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뇌는 물렁물렁하다. 뇌에는 주변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성질, 즉 가소성(可塑性)이 있다. 덕분에 우리는 학습으로 뇌를 진화시킬 수 있다. 낯선 체험이나 자극은 뇌 뉴런의 새로운 연결망을 늘리고, 자주 쓰지 않는 연결망을 퇴화시킨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독서를 통해 뇌를 집중에 적합한 형태로 바꿀 수 있다. 또 얼마나 불행한가. 오래 책을 읽지 않는다면 뇌는 본래의 산만한 상태로 돌아간다.
독서에서만 인간은 깊어질 수 있어
독서의 일차 목적은 정보의 획득이지만, 독서의 효과는 앎 자체에만 있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은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몰입 상태’에 돌입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니컬러스 카는 말한다. “독서가 열어 준 조용한 공간에서 인간은 연관성을 생각하고, 자신만의 유추와 논리를 끌어내며, 고유한 생각을 키운다.”
글을 읽어 지식을 얻는 일보다, 이 일을 계기로 뇌를 특정 상태로 가져가는 일이 더 중요한 듯도 하다. 생물학적 뇌를 인문학적 뇌로 진화시키는 일이야말로 독서의 진짜 효능이다. 인간은 깊이 읽을 때만 깊이 생각할 수 있다. 검색이나 영상으로는 깊이가 불가능하다. 느리고 집중된 공부를 추구하는 독서에서만 인간은 깊어질 수 있다. 그런데 ‘집중하는 뇌’를 만들기에 좋은 시기가 정해져 있다.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 갓난아기의 뇌에는 이미 언어를 처리할 수 있는 신경회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회로는 태어난 지 몇 년간만 잘 작동하며, 이 시기를 지나면 인간은 언어를 쉽게 배우지 못한다. 야생에서 발견된 ‘늑대 소년’들은 신체에 별 이상이 없는데도 끝내 말을 배우지 못했다. 사물에 이름 붙이기를 시작하는 생후 18개월 무렵, 아이의 언어 능력이 폭발한다. 이 시기에 아이가 듣고 기억한 단어들과 문장들은 나중에 사고·독서·학습으로 이어지는 기초 자원이 된다.
부모가 책 읽어준 아이, 학습 능력 높아
2008년 미국 보스턴대 연구팀은 18~24개월 사이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면 학교에서 높은 학습 능력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책 속 낱말들이 평소 쓰는 말들보다 다양하므로 인지능력 발달에 도움을 준 덕분이다. 2015년 미국의 한 연구를 통해 부모 무릎에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이 이를 시각화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문장을 듣거나 읽으면서 이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능력이 상상력이요, 이는 문해력 증진의 문턱이다. 주목할 것은 7살 이전에 글자를 배워 스스로 책을 읽은 경험은 별로 큰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부모 등 어른과 함께 책을 읽은 경험만이 큰 영향을 끼쳤다. 혼자 읽을 때보다 어른이 읽는 것을 들을 때 아이들은 상상하는 것이다.
아이가 자란 후에는 문학 작품을 천천히 읽는 게 좋다. 뇌는 백색질과 회색질로 나뉜다. 창의력이나 사고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백색질이다. 미국 카네기멜런대 연구원들은 독서를 많이 한 아이들의 백색질에 신경망이 더 많이 형성된 것을 발견했다. 이러면 뇌 전체를 사용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특히 문학 작품을 묵독할 때 뇌 전체가 활성화되면서 백색질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아이들한테 핸드폰을 쥐여주고 동영상을 보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영상 시청으로는 백색질을 충분히 발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사유·행동 독서에 최적화
독서는 우리의 감각 자체를 발달시킨다. 2006년 스페인 연구자들은 “커피 향이 좋다” 같은 문장을 읽을 때 뇌의 후각 피질 영역이, 프랑스 연구자는 “파블로가 공을 찬다” 같은 문장을 읽을 때 운동 피질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뇌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구별하지 않는다. 독서를 통해 인간이 다른 이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자신이 직접 탐구하지 않은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독서는 같은 이유로 인간의 사회성을 증진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낯선 환경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배우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타인의 마음을 알아내는 훈련을 한다. 독서는 친구를 찾아내고 적을 판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목록을 늘어놓으면 한도 끝도 없다. 인간과 독서의 관계는 너무나 긴밀하다. 우리의 사유와 행동은 모두 독서에 최적화되어 있다. 자신과 세계의 의미에 집중하는 시간 없이 인간은 인간으로 존립할 수 없다. 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독서는 분명히 되돌아온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리셋 코리아 문화분과 위원
-[출처: 중앙일보] 본래 산만했던 인간의 뇌, 책 안읽으면 원시인처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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