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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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詩를 읽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금동원(琴東媛) 2019. 2. 26. 23:50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쭈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문학과 지성사, 1996)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과 석사, 원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으며, 2008년 윤동주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와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