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시하다
김혜순 저 | 문학과지성사
1979년에 등단해 12권의 시집을 펴내는 내내 김혜순은 남성 중심의 지배적 상징질서를 충실히 구현해온 언어에서 자신의 몸-말을 꺼내어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로 확장시켜왔다. 분열적이고 산포되는 이미지의 연쇄, 단어와 단어가 부딪쳐 일으키는 파동, 타자와 함께 자신을 재구축하는 다성적이고 역동적인 목소리의 형태를 띤 김혜순의 시는,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는 그 자명한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듯, ‘언어에 새겨진 문명과 문화의 기획, 권력과 체제의 논리, 통념과 관습의 폭력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러한 언어의 본성에 저항하며’(문학평론가 오연경) 길어낸 산물이다.
하여 김혜순의 시론은 그가 독창적이고 상상적인 언술로 갱신해온 한국 현대시의 미학이 도달한 지점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의 법과 문학적 보편성의 논리에 갇혀 해석되고 연출되고 박제되어온 여자의 몸, 여성시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제대로 된 독법의 필요성과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이 여성적 글쓰기의 원천과 욕망, 사랑과 숙명에 대해 절박하게 묻고 답했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 이후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여성이 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답하며, 나아가 여성시인과 작가의 목소리가 남다른 발성법과 언어 체계와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구체적 문학적 사례(강은교, 고정희, 김승희, 김정란, 최승자의 시와 오정희의 소설 등)를 들며 입증해내는 길고 짧은 글 10편이 시론집 『여성, 시하다』에 묶였다.
여성시인들이 쓰는 존재론적이고도 방법론적인 그 시적 발성의 주름 깊은 곳에 어떠한 심리적인 왜곡이나 피해자 의식, 악전고투가 숨어 있는지 따로 밝혀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나 교묘한 질시에 대한 내상을 드러내는 고백들 너머 여성시는 왜 가상의 피륙을 짜고 있는지, 텍스트의 짜임 속에 비밀을 감추고, 수치를 일구기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 위장하는지, 어떻게 다른 시적 영토를 발견하고 그 장소를 운행하는지, 화자의 설정과 그 문체의 결과 틀의 구축이 고백의 내용보다 더한 고백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방이 되는지, 심지어 그 장소 없는 장소에서 어떻게 탈주체화를 실현하는지, 혹은 그 자리에서 공동체마저 꿈꾸고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뒤에―한사코 사이에 있으려는」, 230쪽)
○책 속으로
귀는 어머니의 자궁 속의 산도처럼 나선 달팽이형으로 구부러져 있다. 시는 그 깊은 것, 앞으로 무한한, 여성적인 것이 말을 하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말을 하게 한다. 그것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서는 더 집중되고, 감정은 더 짙어지고, 이미지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한다. 그것이 공기 중에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면 몸이 반응한다.
시인에게 귀는 몸의 축소판이자, 몸 자체다.
---「귀, 안으로의 무한」중에서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 그것의 치환, 병치, 은유, 환유, 회피, 현미경적 접근, 망원경적 접근, 현실의 표면에서 살짝 포를 뜨기, 뼈째 우려내기 등등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현실을 요리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병적 징후의 터널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러한 병적 징후들과 들어맞는 스타일의 느슨한 정합성이 아니던가. 진정성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의 골목길에 버려진 토사물들, 쓰레기들, 나의 시들.
---「나의 지옥, 나의 뮤즈」중에서
시인이란 어떤 존재들인가. 그는 현실 속을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외줄을 타는 사람이다. 시는 유리보다 투명하게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매체다. 모방하면 모방을 비추고, 눈 감으면 눈 감은 그를 비추고, 폼 잡으면 폼을 비춘다. 시에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어야 하는 이행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시는 표현의 발명이고, 미학적 현상이다. 부재의 설계도 내지는 투시도를 넘어선 부재의 건축이다.
시는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이 지닌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여 무중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성, 시하다」중에서
시는 있음과 없음의 길항 속에서 파동으로 움직인다. 파동은 패턴을 갖기 마련이다. 패턴이 리듬으로 움직인다. 리듬은 사람이라면 모두 느낄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영혼 사이의 울림이다. 이 울림을 타고 시인의 삶이 누군가의 영혼을 친다. 그리하여 시는 메타포가 아니라 현전(現前)이다. 무언가 완성되는가 했더니 소멸하고 소멸하는가 했더니 다시 불길이 인다. 사물인가 했더니 사물 저편이다. 시는 단어와 단어의 만남, 그 파동을 통해 언어 속에서 수수께끼를 끌어낸다. 그 수수께끼의 지속적인 밀도, 그것이 시라는 것이다.
○
작가 소개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김혜순이 시를 통해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뜻없음, 지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개체의 종말로서의 현상적,실재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앉은 관념적,선험적 죽음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어느 별의 지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느 별의 죽음』은 세계의 무목적성에 대한 오랜 응시로 삶에 예정되어 있는 불행을 눈치채버린 이의, 삶의 텅 빔과 헛됨, 견딜 수 없는 지옥의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관주의적 상상력이 빚어낸 시집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자명한 것의 평화와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난폭하게 찌르고 괴롭힌다.
○출판사 리뷰
내/여성 몸으로 시를 쓴다, 나/여성은 ‘시한다’
―모국어를 위반하며 시 속 나의 ‘실존’ 찾기
김혜순은 여성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같은 땅을 딛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남성에 비해 늘 차별과 혐오, 폭력과 소외의 게토 상태에 노출되어온 여성/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독 한국문학에서 여성시인의 언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몸에 씌워진 배타적 억압과 구속을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타인의 편협한 이해를 요구받아왔다. 여성시인의 언어는 여성시인 스스로가 자신을 이방인, 난민으로 경험, 인식하는 것, 혹은 그에 따른 학습, 사유가 있지 않고는 발화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에게 부과된 정체성(남성들이 발명한 언어, 그 언어로 점철된 시사詩史, 수사와 기호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열되고 투명한 약동의 목소리로 언어를 ‘몸하고’ ‘시한다’.
내 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한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서 내 몸인 여자를 찾아 헤매고, 꺼내놓으려는 지난한 출산 행위와 다름이 없다. 나에겐 신화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이야기와 시들을 통해 의미를 주던 아버지들로부터 도망쳐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내 몸속에서 나오고 싶어 안달인 여자가 있다. 사랑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여자와 내 몸이 쌍둥이처럼 맞붙어 다시 태어나려는 몸짓, 그 자가(自家) 출산이 ‘몸하는’ 시다.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12쪽)
여성시인에게 자신의 육체는 하나의 텍스트다. 여성과 죽음과 몸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나 이후의 소리들이다. 모음이 폐와 횡격막, 콩팥, 항문과 생식기, 심장으로 낼 수 있는 소리인 것처럼 모음은 몸의 구멍들과 연결되어 있다. 여성의 텅 빈 몸은 마른 몸과 섞이면서 끝없이 변용, 생성되려고 한다. 다른 몸을 대상화하지 않고 섞이려 한다.
여성시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틈새이며, 말하면서도 말해지지 않는 언어적 모험이다. 언어적 주체를 탈주체화시킴으로써 모국어를 해체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기억에 대한, 타자의 혐오에 대한 방법적 대응이며 전투다. 곤경의 언어이고, 비언어다. (「책 뒤에」, 231~232쪽)
쓰레기와 유령, 여성시와 유령 화자
―“내 몸의 과거-기억-현재-죽음을 가로지르는 리듬으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진다”
앞선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에서 김혜순은 바리데기 신화와 여성시의 물의 언술, 들림, 영감, 공간, 증후, 사랑, 몸 등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어 이번 책에서는 바리데기가 겪는 세 번의 부재에 주목하여 여성시인만의 독특한 화자를 소환해낸다.
‘바리데기’는 이름 없는 자의 이름이다. ‘바리’라는 이름은 지금 이쪽 우리의 언어로 ‘쓰레기’다. 바리데기는 세 번의 버림을 받는다. 김혜순은 이 세 번의 부재(죽음) 경험이 바리데기의 시적 여정이자 여성시인으로서의 그의 시가 ‘시하는’ 경험들이라고 말한다.
첫번째 부재의 시는 자신이 버려짐, 부재, 쫓겨남에 처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시다. 이런 유형의 시는 대개 독백적 진술을 주로 하며, 소녀나 미성숙한 화자를 내세워 자아를 극적인 무대에 세운다. 두번째 부재의 시는 가정과 체재, 공동체 내에서 잠식당한 자아 정체성을 노래한다. 한결 성숙해진 시적 화자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시의 배면에 품고서, 모성성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결혼, 관계, 노동을 화제로 삼곤 한다. 세번째 부재의 시는 분열적이고, 산포되며, 공동체의 주문에 대해 분열된 자아 정체성, 분자화된 언술을 들이미는 발명자들의 시다. 이런 유형의 시의 화자는 어떤 복수(複數)성을 내포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 유형의 시들은 언어의 운용, 모국어 문법에 대한 파괴에 열중하기도 하고, 남성과 여성으로 환원되는 은유 체계에 대한 전복, 다성악적 파동의 언술을 내보이기도 한다.(「쓰레기와 유령」, 18~19쪽)
한편, 김혜순은 우리나라 여성시인들의 시 속에서 각기 다른 유령 화자의 목소리를 발견해낸다. 여성의 공간으로 규정된 부재, 결핍, 침묵, 죽음, 수동, 어둠을 스스로의 몸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그것을 전복시키는 언어적 이행이자 시간과 공간의 교차 속에 빚어지는 간격으로 유령적 해체를 규정한다. 이 유령적 해체의 문법은 기존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성적 목소리, 복수 화자의 목소리, 화자들을 품었다가 다시 내뿜는 기괴한 모성의 목소리로 구현된다.
여성시인에게 쓰레기는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며 장애물이다. 쓰레기는 일견 가난한 자, 이방인, 고아, 난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스스로 쓰레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은 내가 비참하게 버려졌을 때, 죽음에 다가갔을 때, 국가의 무기력함으로 지뢰처럼 터지는 재앙들 앞에서 목격한, 마주한 이웃의 얼굴이며, 나의 국가 공동체 혹은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내가 감당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구멍인 어둠이다. 그들은 바로 ‘바리’라는 이름처럼 이름 없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 부재하는 이름이 나를 시의 장소로 움직이게 한다. 암컷이라는 그 어둠 속에서 여성인 나의 시는 발진한다. 이름 없는 주체, 의도나 행위의 기원도 갖지 않은 주체,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감정이나 어떤 내밀성만을 가진 몸, 혹은 무명의 시적 행위, 그 발견인 나의 시가 탄생한다. 여성시인에게 요구되는 수치, 배려의 감정, 모성성, 나이별로 부과되는 동일성 대신에 어둠 속에 기거함, 쓰레기처럼 버려진 채 한 덩어리로 존재함, 거기에서 상호 반응하는 쓰레기의 무늬를 그리는 나의 시가 탄생한다. (「쓰레기와 유령」, 27~28쪽)
유령적 해체의 목소리는 여성의 몸에 내려진 천형인 죽음의 언어 체계를 자발적으로 전유함으로써 발생된다. 죽음의 기계를 스스로, 온몸으로 작동시키면, 그 자리에서 피 묻은 옥시모론의 언어들이 흩어져 내린다. 그 언어는 자신들의 몸을 해체함으로써 얻어진 피의, 물의, 젖의, 그물의, 백설 난분분의 언어다. 이 언어가 여성 화자로서의 장소를 확장한다. 그러기에 유령적 해체의 목소리는 타자들과 함께 거주할 공간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생성의 언어이며, 그 타자들과 경계 없이 접촉하는 언어다. (「여성시와 유령 화자」, 191~192쪽)
이 책 『여성, 시하다』는 김혜순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실한 안내서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랫동안 여성과 여성시, 여성문학을 굳게 가둬온 체계와 편견을 벗고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읽어보려는 모든 이에게 흥미롭고 의미 있는 공감 지대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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