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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파스칼 키냐르의 말

금동원(琴東媛) 2019. 6. 8. 21:51

 

 

파스칼 키냐르의 말』- 수다쟁이 고독자의 인터뷰

파스칼 키냐르, 샹탈 라페르데메종 저/류재화 역  | 마음산책

 

 

『파스칼 키냐르의 말』에서 키냐르는 “장르가 부재한” 작품들을 가능하게 했을 방대한 사유의 파편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또한 인터뷰어 샹탈 라페르데메종은 키냐르 못지않은 사유와 감수성으로 음악, 회화, 글쓰기, 언어, 역사와 철학, 인간의 기원 등에 이르는 주제를 대담 중간중간에 적절히 안배한다. 일체의 사회적 직책을 내려놓고 오로지 글쓰기에만 집중할 것이라 선언했던 고독한 독백자, 혹은 독백하는 고독자 키냐르. 그의 고독이 덧대어진 아름다운 말들을 이 책에서 한가득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파스칼 키냐르는 (Pascal Quignard)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레뇌유쉬르아브르(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에 첫 작품 『말 더듬는 존재』를 출간하였다. 어린 시절 심하게 앓았던 두 차례의 자폐증과 68혁명의 열기, 실존주의, 구조주의의 물결 속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와 함께한 철학 공부, 뱅센 대학과 사회과학 고등연구원에서의 강의 활동, 그리고 20여 년 가까이 계속된 갈리마르 출판사와의 인연 등이 그의 작품 곳곳 독특하고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개월 동안 죽음에 가까운 병마와 싸우면서 저술한 『떠도는 그림자들』로 2002년 콩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의 저서로는 『세상의 모든 아침』등이 있다

 

 

  ○책 속으로

 

 

  그를 사랑했던 자들에게 그는 식별 불가능한 사람이 된다. 아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죽이려 한다. 따라서 그는 얼굴 없는, 정통의 고독에 도달하게 된다. 다른 인물들처럼 그는 자신 안에 시간 영역 밖인 지하 납골당을 간직하고 있다. 바로 그곳에 자신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 p.14

  저는 일찍 일어나서 일찍 잠들어요. 사실 듣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듣는 것 자체가 싫다기보다 무리 지어서 함께 듣는 것이 싫은 거죠. 재채기가 날 것 같고, 숨이 막히고, 무리가 함께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청취잖아요? 딱 정해진 시간에, x라는 양에,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늘이는 y라는 소스테누토의 힘. 다 주문된 감동이죠.
--- p.50

  저는 쓰면서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아니면 읽으면서만 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책이 쑥 나와요. 마치 엄마 자궁에서 작은 태생동물이 쑥 나오듯이요. 읽으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요.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을 다시 삽니다. 읽으면서, 내 삶을 시험하면서.
--- p.81

  우리는 독서 위원회 내에서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죠. 전 도미니크가 가스통 갈리마르의 비서실에서 거의 눈물을 흘리며 오데트 레글에게 밤새워 읽을 원고를 제발 좀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어요. 제 사무실에 도착해 문을 밀 때면 지극히 겸손하면서도 대담한, 아주 묘한 몸짓으로 들어왔어요. 말할 때도 비슷했어요. 잘 쉰 듯한 좋은 안색과 밝은 표정에 기꺼이 제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려 할 때마다 단호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모를걸요.”
--- p.106

  저는 공자 같은 사람이었다가 장자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생의 전반부에서는 제게 최초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모두 해보려고 했습니다. 말하고 가르치고 세상을 만나고 끼니마다 식사도 하고요. 하지만 결국은 저를 구속하는 것들이었고, 25년 후에 저는 모든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 p.131

  파스칼 키냐르는 두 극단인 플로베르와 프루스트 사이에 있다. 키냐르는 글을 쓸 때 늘 “작은 구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적 세포 구멍” “리듬적 세포 구멍”. 키냐르가 짜는 피륙은 올이 성긴 편이다. 프랑스어 클레리에르clairiere는 녹음이 짙은 숲속에 햇빛이 살짝 들어와 어슴푸레하게 눈부신 작은 빈터를 뜻하기도, 천의 올이 성긴 부분을 뜻하기도 한다. 키냐르는 이 단어를 매우 사랑한다. 자신이 희구하는 글의 이데아를 형상화할 때도 자주 환기한다. 비어 성기면서도 원기를 찾아 질주할 수 있는 트인 공간. 빈 것 같으면서도 힘이 있는 부드러운 파격의 선율, 이것이 키냐르의 텍스트다.

--- p.233
 
 
  ○출판사 리뷰
 
  끊임없이 언어의 ‘메아리 방’에서 빠져나오다
  감각과 기원, 관능을 사랑하는 삶

  당신의 속은 너무 꽉 차 숨이 막히게 될 겁니다. 작품은 당신의 몸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므로 답답하고 불편해집니다. 배가 아플 수도 있고 쓴맛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사막 같은 공허 혹은 쓴맛.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166쪽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22장의 챕터로 구성된다. 제각기 다른 주제를 다루는 듯하지만 결국 키냐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언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다. 키냐르는 의식이란 그저 획득 언어가 메아리치는 방에 불과하고 독서의 원천은 잃어버린 목소리이며 따라서 독서란 곧 그 옛날 목소리가 생기기 이전의 듣기만 하는 상태로 퇴행하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키냐르는 자신 안에 쌓인 획득한 언어들을 끝없이 게워내고 또 채워 넣으면서 극에 이르러 아무 배움도 없는, 침묵과 고독의 상태로 침전하기를 욕망한다.

  그런 건 없을 겁니다. 제 유년 시절은 많이 힘들었어요. 신경쇠약에서 비롯한 우울증이 제 인생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말 맹신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건 ‘나는 작가야’ 하는 일종의 의식 상태가 제 흥미를 끌진 않는 것 같아요. 황홀경이나 시간을 의식하는 감각을 상실한 듯한, 뭐랄까 어떤 것 뒤에 있는 것, 뭔가의 뒤에 용이하게 숨을 수 있는 것에 흥미가 있으면 모를까요.
---97쪽

  키냐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아브르에서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악기 연주와 글쓰기, 독서로 지새우던 학창 시절부터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한 애정, 68혁명과 갈리마르 출판사와 연을 맺게 된 순간 등의 과거를 차례대로 짚어나가는 한편, 자신의 여러 작품 속 일부분을 인용하는 라페르데메종의 날카롭고도 돌연한 질문에 속에 품던 생각들을 기다렸다는 듯 쏟아낸다. 그의 말은 노련하고 다분히 문학적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와 작품들, 그리고 이들을 읽는 시간에 대해 찬탄을 금치 않다가도 금세 엄정한 태도로 언어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하기도 한다. 그는 끊임없이 언어의 “메아리 방”에서 빠져나오기를, 글 쓴 것을 “삼키기”를 갈망한다.
  이 책은 스스로를 고독 속에 유폐한 키냐르의 생활과 생각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글을 쓰면서도 글쓰기가 부과하는 체제, 의무 등에 예속되거나 이를 추종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진지하고 유쾌한 대화로써 드러낸다.

  작가가 아닌, 문인(文人) 파스칼 키냐르, 독서, 글쓰기, 궁극의 황홀경을 향해

  두려움은 결정적입니다. 그것은 오리엔트, 서광 같은 것입니다. 에스키모의 한 작은 공동체에서 어느 노르웨이 인류학자가 어느 날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십니까?” 모든 에스키모인들이 그에게 답했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118쪽

  파스칼 키냐르는 확신에 찬 어조로 문학을, 언어를, 문장과 단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겐 감각적인 것, 관능적인 것, 먹고 마시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는 “파스칼 키냐르만큼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동의하며 언어와 두려움의 기원에는 어떤 주저함이 있다고 말한다. 죽음과 언어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어떤 사물을 정말 분명하게 봤다면, 저는 그것을 재빨리 적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꿈속의 섬광처럼 스친 것을 요약하듯 적을 수 있을 거예요. 저에게는 아주 짧게 보이는 것이죠. 그건 항상 너무나 짧게 나타납니다. 저를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성적인 황홀경에 가깝죠. 저는 헌사된 것, 자동사적인 것,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경험과 관련한 것을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25쪽

  독자(읽기)와 저자(쓰기)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둘은 만나지 못하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키냐르는 말한다. 무엇을 쓰면서도 스스로 쓴 것을 도저히 읽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의 ‘말’을 ‘읽다’보면 독서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인간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 욕망은 대체 어느 방향으로 꿈틀대는지 궁금해진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은 말과 언어, 읽기와 쓰기에 관한 한 편의 긴 독백과 같다. 말에 대한 말인 셈이다. 이 말들에 빠져 정신없이 책을 읽다 보면 키냐르는 온 데 간 데 없고 사색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키냐르가 의도한 궁극의 “황홀경”, 언어로부터 멀어져 오롯이 홀로되는 경험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은밀한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