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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금동원(琴東媛) 2019. 8. 22. 00:07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존 버거 저/김현우 역  | 열화당

 

  책 속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화상」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에서

 만년에 이른 존 버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깊어진 눈매만큼이나 진하게 패인 주름과 하얗게 물결치는 머리털이 그간의 세월을 그러안고 있다. 그리곤 이 길에 들어선 이후 무수히 듣고 답했을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 “나는 왜 쓰는가?”

  그는 호칭된 작가(writer)보다 떠돌이 이야기꾼(storyteller)이 더 어울렸다. 경계를 넘나들며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잘라 보여 줬던 그의 이야기는 과격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비판적이었으며 다정하고도 온화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이야기꾼이기 전에 훌륭한 관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영장의 유리 지붕에 떠 있는 새털구름, 플라멩코 무용수의 흑백사진은 그에게로 와 새롭게 씌어졌다.

  그는 노래하는 새들이 그려진 성냥갑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인 친구 자닌과, 사십대까지 절도죄 등으로 감옥을 드나들다가 그림을 그리게 된 마이클 콴의 손을 끌어 무대로 안내했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이 책의 독자들은 코마키오의 구월 광장에 모여 발을 구르며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고, 아랍어로 노래하는 야스민 함단(Yasmine Hamdan)의 공연에 초대되며 눈, 입술, 볼, 손가락으로 대화하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존 버거는 영국 작가 저넷 윈터슨(Jeanette Winterson)의 말대로 “화가가 물감을 다루듯이 생각들을 다루고”, 빈 곳을 다채로운 색감으로 물들였다.

  11편의 짧거나 긴 에세이들에는 그의 드로잉과 메모, 회상은 물론, 알베르 카뮈부터 전 세계적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사려 깊은 생각이 담겨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놓지 않고 소리내어 부르려 했던 이름 없는 대상들은 그가 피워 놓은 모닥불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마른자리와 따뜻한 담요가 있는 그곳에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이들의 노래와 춤과 눈물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오늘처럼 바람이 짙어진 계절, 그는 한 걸음 앞선 시공간에서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존버거(John Peter Berger, John Berger)는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든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 『사진의 이해』 『스모크』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초상들』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이 있다

 

  ■[MD 리뷰 대전] 존 버거, 그가 남긴 모든 언어에 대하여

 

   하염 없이 읽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글 | 김유리(문학 MD)

 

  꼭 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읽는 건 소설이나 에세이를 제대로 읽는 방법이 아니다. 서점에서 일하느라 ‘문학 작품’ 읽기가 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 직업이나 이유 같은 건 잊게 되기도 한다. 그런 독서를 ‘하염 없이 읽다’라고 한다. 

  존 버거는 농사를 직접 짓는 손으로 드로잉을 그리고, 글을 쓰며, 무심히 살았던 사람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썼던 11편의 글 역시 그의 삶과 꼭 닮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는 존 버거의 선명한 「자화상」 그리기로 시작한다. 팔십 년간 글을 써온 그는 자신에게 문학이란, 글이란, 언어란 무엇인지 담담히 고백한다. '작가’처럼 꾸미지 않고 ‘이야기꾼’답게 편지를 쓰듯 간결하게 써내려 간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나는 시를 해독하는 마음으로 오래 머문다. 그 사이에는 세계를, 자연을, 인간을, 이방인을 사랑하는 숨결이 녹아나 있다.

  에세이 속에서 우리는 눈에 미처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을 능숙하게 끄집어 내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달인 존 버거의 안내를 받는다. 안내자로서 그는 희망을 말한다. 폴란드 출신의 이방인이자 독일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나는 있었고, 지금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를 인용하면서. 그리고 실패의 연속성을 찰리 채플린의 넘어지는 모습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불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뿐인가. 야스민 함단의 아름다운 목소리에서 노래의 언어를 감지하고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꽃을 오랜 기간 보고 그리며, 그 대상 자체가 되어 모국어로 자연을 말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이리저리 그를 따라가다 우리도 대상의 언어에 흠뻑 빠져 버리고야 만다.

  또한, 그는 연대의 매력적인 제안자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이. 그는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읽으며, 인간들은 모두가 고아이기에 공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고아인 우리는 모든 위계를 거부하고, 지금껏 당연하다 여겨온 기존의 질서를 무시하고, 세계를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당돌함을 가졌으니. 신기하게도 외톨이 고아들이 모여 연대하는 이 과정에서 계속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워나간다. 하나의 별의 반짝임도 아름답지만, 수많은 별들이 모여 만든 은하수의 광경에 모두 할 말을 잃어 버린다.

  아쉽게도 존 버거는 그가 살던 시골마을 시간대로 2017년 1월 2일에 세상을 영영 떠나고야 말았다. 새해가 얼마 지나지 않는 날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을 찾아 틈을 메우는 그의 작업과 시선을 존 버거라는 이름으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대한다.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이들이 오늘도 자신의 책상에서 본인의 언어로 발견되어야 할 것들을 묵묵히 쓸 것이라고.

 

 

 

  저명한 작가이자 사회비평가,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간접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치밀한 시각적 산문을 통해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 스스로 ‘포토카피(사진복사)’라고 이름 붙인 이 글들은, 세기말 인간사의 단편을 구성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상황과 내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포착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명성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그리기에만 몰두하는 무명 화가, 런던의 어느 광장에서 병든 비둘기를 돌보는 노숙자 여인, 아일랜드의 시골 버스에서 만난 수다스런 소녀, 라이플총을 빗겨 맨 열세 살의 인도 소년,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백스물네 번이나 옮겨 다닌 남자와 함께, 사바티스타의 마르코스 부사령관,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철학자 시몬 베유 등 저명한 인물들의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존 버거는 성실한 관찰자로서 일차적인 묘사와 설명만을 통해서 이야기 속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보여주는데, 바로 그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가 만난 인물들에게 애정과 존경을 느끼고, 나아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