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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힘이다 4 》

금동원(琴東媛) 2019. 12. 10. 22:15

 

 

 

자기 구원의 글쓰기

      

                    -이승우 《캉탕》을 읽고

 

  금동원

    

 

   우리는 모두 과거를 살아왔다. 타인은 알 수 없는 제각각의 비밀스러운 삶의 의미들을 품고 누구나 어제를 걸어왔다. 나는 잘 살아왔는가. ‘나’라는 존재는 과거를 관통해오면서 ‘현재’라는 시간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고 있는가. 오늘은 내일의 과거이자 어제의 미래다. 살아 있는 한 지나온 시간들로부터, 앞으로 살아갈 시간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상처와 흔적으로부터 도망쳐 아주 먼 곳으로 숨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가. 지금 살고 있는 ‘여기’를 떠나고 싶을 때는 없는가.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아예 돌아가지 않고 사라지고 싶었던 시간은 없었는가. 캉탕에 모인 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다른 세계로의 동경은 이 세계로의 귀환을 담보로 한다. 이 세계로의 귀환이 담보되어 있는 상태의 떠돎은, 그 시간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여행일 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낯선 세계는 동경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P 21)"

 

   “ 되도록 멀리, 그래야 있었던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되도록 낯설게. 그래야 낯익은 것들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되도록 깊이. 그래야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으니까.(P47)"

 

   캉탕은 대서양에 닿아 있는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없다고 해도 될 만한) 작은 항구도시다. 이곳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 캉탕의 조상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바다에 재물로 바칠 그 해의 희생자를 뽑고, 배돛대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게 해 바다(신)를 달랬다. 강탕의 오래된 이 전통은 축제로 편입된 현대의식의 행사로 발전하여 누구든지 스스로 파다*가 되어 축제의 마지막 날 바다 속에 뛰어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장편소설《캉탕》은 정신적 문제로 인한 두통과 이명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한중수가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인 J의 권유로 캉탕에 오면서 시작된다. 생존이외의 삶은 없었던 한중수는 일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왔다. 그의 일과는 머릿속에 가득 찬 먼지들이 씻겨나갈 때까지 걷고 보고 쓰는 것이다. 한중수에게 걷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다. 그는 매일 몇 시간이고 무작정 걷는다. 수행을 하듯 잡념을 버리고 마음의 거죽에 붙은 찌꺼기를 벗기고 다른 생각을 마음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두 발을 움직여 걸으면서 나는 현재를 밀어낸다. 걸을 때 현재는 나로부터 밀려난다. (...)밀어내어 도착하여 이르는 곳은 어디인가. 다른 도착의 자리는 없다. 번번이 떠났던 자리로 돌아오고 돌아온 자리에서 떠난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걸어서 거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 걸은 만큼 거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P134)

 

  한중수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이자 J의 외삼촌인 핍(일명 최기남)은 멜빌의 소설『모비 딕』의 고래잡이배에 대한 동경으로 배를 탔다가 캉탕에 정착한 인물이다. 어린 시절 고향집을 떠나 고래사냥에 나섰던 그는 스물다섯 살 되던 해 향수병에 지친 고단한 육체와 외로운 영혼을 품어줄 세이렌 같은 여자 나야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도망칠 수 없는 환대를 만나면 숙명인줄 알아야 한다. 숙명은 환대해야 한다." (p40)

"나야는 세이렌으로 유혹하고 피쿼드로 구원했다."(P201)

 

나야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선술집 피쿼드(『모비 딕』에 나오는 배의 이름)를 운영하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핍은 지금 혼자다. 몇 년 전 죽은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야에게 그랬던 것처럼 캉탕병원의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 주며 살아가고 있다. 고래에 미친 선장 에이브해가 틀어박혀 지낸 선실처럼 음침하고 불길해 보이는 어두운 집 1층에서 나야를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핍에게 나야는 "바다이자 자장가"였던 것이다. 핍은 읽는 행위를 통해 나야와의 추억을 마음에 새긴다. 떠나온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바다를 바라보고 동경하며 동시에 자신을 치유해 나간다.

 

  선술집 피쿼드 3층에 묵고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캉탕에 머물렀던 2년 동안 한 명의 개종자도 내지 못한 선교사 타나엘이다. 과거 열렬하게 사랑했던 여인의 이별통보를 받고 분노와 상처를 안고 고향을 떠나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애인을 암매장 시킨 살인 당사자로서 그날 밤의 사건을 경위서 작성 요청 문서로 해명해야한다. 이미 선교사 자격은 해임통고 받은 상태다. 참회의 회고록을 써야하지만 그는 기억하기 싫은 진실을 마주할 두려움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우연히 피쿼드 선술집에서 합석을 하게 된 한중수에게 타나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 같습니다. (...) 나를 해치는 이 맹수는 나입니까? 내가 모르는 이 맹수는 어떻게 내 안에 있었습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이 맹수를 끌어낼 권리가 나 아닌 누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내 과거는 나의 일부입니까? 아닙니까? 어디부터 나입니까?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의문덩어립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데, 그래서 글을 쓰지 못합니다.” (P104,105)

 

   그 순간 한중수는 갑자기 자기 머릿속 한복판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 이명증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 주었던 타나엘에게 고질이나 다름없는 자기 머릿속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대해, 여기까지 자신이 오게 된 사연에 대해, 타나엘에게 털어놓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상처와 증오, 고통스럽고 참혹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비밀은 끝내 털어놓지 못한다) 그러자 타나엘은 본인이 아직까지 회고록을 마치지 못한 이유를 한중수에게서 찾아냈다고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이 어렵습니다.(P139) 글을 꼭 노트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중수씨가 알게 했습니다.(..).한중수씨는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솔직히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왜 내게 한 것일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때 한중수씨가 글을 쓰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말을 하는 방식으로 자기 글을 쓰고 있었구나.(...)"(P140)

 

   타나엘은 글은 입으로 귀에 쓰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안전한 글쓰기를 시도한다. 한중수에게 입을 통해 말로써 자신의 과거를 쓰고, 한중수는 귀로 읽어줌(들어줌)으로써 타나엘의 고백은 휘발되고 사라져버리고 말테니까.

 

   “몸싸움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문득, 그 운명의 날 자기가 매장한, 매장했다고 믿은 것이 과거의 자기가 아니라 마리의 몸이었던가,(P163) 그러나 그는 과거의, 그 무덤에 묻힌 그에 대해 기억하기를 거부했다.(P164)

 

   진실은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 없으며 과거는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 속에 남겠지만 타나엘은 그 방법으로 글쓰기를 마친다. “그가 신과 양심 앞에서 정직하고 온전한 자신만의 글쓰기를 완성했는지.”(P214)는 알 수 없지만 캉탕축제 마지막 날 파다가 되어 바다 속으로 뛰어내린다. 그는 그런 행위를 통해 스스로 재물로 쓰이는 자(대속자)와 동시에 구원 받는 자로써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한중수 역시 걸으면서 쓴다. 걷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며 글을 쓰고 있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스스로 듣게 되고, 타인에게 읽히고 들리게 함으로써 자신도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난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끔찍한 상처를 대면하고 극복함으로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신과 의사 J는 캉탕으로 떠나기 전 한중수에게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매일 써서 보고서처럼 자신에게 보내라고 한다. J는 이 소설에서 한중수의 말을 들어주는 다른 영역의 인격처럼 존재한다.(이 책의 해설에는 J를 신(Jesus)의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한중수가 글을 쓰는 행위는 자기 고백이자 기도 같은 역할을 한다.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영혼을 구원받는 방식을 이 소설은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핍은 읽어주고, 타나엘은 말하고, 한중수는 걷고 보고 쓴다.

 

  " 내가 말하지 않을 때, 말하지 않았는데도 듣는, 들리는 말이다. 내부, 어디라고 말할 수 없는, 어디가 없는데서 나오는 말이다.(...) 영혼은 더 큰 귀를 가지고 있다. (P109)

 

   이 소설 안에서 선술집 피쿼드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핍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한중수와 타나엘이라는 선교사가 만나는 중요한 장소이다. 피쿼드는 『모비 딕』에 나오는 배 이름이지만 그곳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크다. 사람들이 만나는 공간,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공간, 글을 쓰지 않고 말하는 공간, 더불어 글을 읽지 않고 듣는 공간,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과거를 현재로 끌어내어 그 죄와 상처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는 곳이다. 숭고한 진리, 신화와 비현실의 공간이 아닌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적 삶의 공간이다.

한중수를 포함하여 J를 제외한『캉탕』에 등장하는 세 명 남자의 공통점은 모두 과거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망쳐 온 인물들이다. 숨거나 떠나려는 사람들은 “두려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외로움이거나 적개심이거나 죄의식이거나 다른 무엇이거나 숨게 만드는 것”(P55)이 있어야하는데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세상의 끝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캉탕에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다. 한중수는 두 남자의 과거를 우연히 알게 되고 그들이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된다. 그 역시 가슴 깊이 감춰두었던 엄청난 자신의 내면적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이들 세 남자는 과거의 고통과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가깝거나 먼 과거, 두껍거나 얇은 과거, 치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과거.”로부터 어떤 방식의 과정을 거쳐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

 

 

  “배는 내부에 온갖 것을 다 끌어안은 채 겉으로는 태연한 사람이었다. 너 또한 배가 아닌가. ...사방이 물인 어두운 바다를 소리 죽인 채 떠도는 큰 배,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캄캄하고 조용하기만 한 배."(P 215)

 

《캉탕》의 세 남자는 읽고, 말하고, 걷고 쓰는 각각의 글쓰기의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다. 자기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목소리(진실)를 들었고, 눈으로 읽고, 입으로 쓰고, 귀로 들으며, 걷고 또 걷고, 쓰고 또 쓰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 있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p.192)

 

   이 소설에는 여러 명의 작가들이 등장한다. 니체와 루소, 랭보 역시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걷는다는 것은 쓴다는 것의 다른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걷지 않고 멈춘다는 것은 안주하는 것이다. 랭보에게 걷는다는 것은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이다. 현재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퇴적물, 그 고정된 형태에 대한 거부라고 랭보는 말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해 걷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거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현실에서의 죽음은 과거로부터의 탈출, 영혼의 자유로움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비현실의 세계, 과거의 공간에서 현실로의 귀환이자 정착, 삶의 영역, 삶의 터전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아닌가. 또한 바다로 뛰어내린다는 것은 신에게로 돌아가는 구원의 행위이자 신의 영역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걷고 다가서는 쓰는 행위의 다른 모습은 아닐까. 한중수는 돌아가지 않고 캉탕에 머무르는 것으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진정 자유로워진 것은 아닌가.

 

  《캉탕》의 저자 이승우는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에 담긴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통찰과 구원의 의미를 묵직하게 질문한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신성성과 구원의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작가다. 신학 대학교를 나온 이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의 내면적 가치에 치중하는 형이상학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정차할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바다, 이 세상은 어디로 가는 중일까.”

 

  작가 이승우는 “어디부터가 나인지 어디까지가 나인지” (P125) 모르는 인생을 살며 글쓰기를 통한 자기 고백과 신을 향한 구원을 이 소설에서 묻고 답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파다: 캉탕 지역의 방언으로 ‘뽑힌 자’라는 뜻이다

    

- -2019 書로多讀 사화집 『독서가 힘이다 4』,(계간문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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