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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원 시집 해설 -《시 속의 애인》

금동원(琴東媛) 2020. 6. 30. 23:09

[금동원 시집 해설]

 

몸, 시를 향하다

 

김 주 연(문학평론가)

 

1.

『육체의 고백』이라는 책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미셀 푸코의 저서인데「성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에 관한 소감을 물론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데, 다소 뜬금없이 이 책, 그것도 ‘육체의 고백’이라는 제목이 연상되었다. 육체가 주체가 된, 육체가 말하는 고백이 그 뜻일 터인데, 이 시집의 어느 부분이 그와 연관된 것일까. 시인 금동원에게서 그 관계는 시집 첫머리「달항아리」연작에서 포착된다.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부드러워진다

입자의 강렬한 엉킴은 집착처럼 느껴지다가

서로를 배려하는 연인처럼 다정하다

삶이란 적당히 서늘할 때 가장 원초적이고

안정적일 수 있다는 자각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였다고 했던가. 수성설을 떠올리는 구절로 시작되는 ‘연작1’의 출발 부분이다. ‘스며든다’는 것은 분명 물, 혹은 액체일 것이며, ‘강렬한 엉킴’과 ‘적당히 서늘함’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지금 무엇을 향한 공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아마도 무엇이 창조되고 있지 않을까.

 

물과 섞여 차오르는 탄력으로

치대면 치댈수록 속에서부터 배어나오는 물기

비밀스러운 샘물은

따로 함께의 정밀한 사랑싸움이다

 

‘연작1’은 ‘물을 품은 자’라는 소제목을 내걸고 이렇게 끝난다. 여기에는 이 시, 그리고 이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의 방향이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창조를 향한 형성의 물질적 과정이며, 말을 바꾸면 몸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그것을 ‘따로 함께의 정밀한 사랑싸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태의 핵심은 그에 앞선 구절, 즉 ‘물과 섞여 차오르는 탄력’, 그리고 ‘치대면 치댈수록 속에서부터 배어나오는 물기’에 있다. 그것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물리적 힘이며, 그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생물학적 성분이다. 요컨대,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인데, 물, 또는 ‘물을 품은 자’이다. 그것에 의해 달항아리라는 육체가 탄생하는데, 시는 달항아리 스스로 고백하는 자기형성의 물질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달항아리라는 육체의 자기고백이다. 이 시가 성공할 수 있었다면, 그 과정의 객관적 묘사가 달항아리 자신의 고백처럼 내면화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그 솜씨는 훌륭하다. 아니, 그냥 솜씨를 넘어선 깊은 성숙의 샘에서 길러 올려진 풍미의 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2. 불을 품은 자’로 ‘3. 달을 품은 자’로 발전하고 이윽고 달항아리라는 거대한 육체를 완성시킨다. 그 완성은 아름답지만 과정은 비극적이다. 모든 제조와 형성이 그렇듯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물질인 육체는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말한다.

 

물이 있어야 완성되는 비극

홀로 설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불지옥 속에서

생명을 얻고 끝까지 살아남아

뜨거움을 품어야하는 운명

 

물과 불이 섞여서 고통을 견딤으로써 태어나는 생명체- 육체의 현신이 달항아리다. 뒤를 이어서 이 시는 고통과 인내의 결실이 보여주는 새로운 물질의 출생을 이렇게 말한다.

 

온몸의 더운 피가 진액으로 녹아나

흘러내린 절망의 눈물이 말라갈 때쯤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이며 단단해진다

(...중략...)

물과 불이 일구어낸 쓸쓸한 환희의 완성이다

 

완성은 고통과 인내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과 인내 끝에 물과 불이 만약 서로 튕겨버린다면? 거기엔 다만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완성은 그러므로 반드시 상호수용을 필요로 한다. ‘서로를 받아들이며 단단해진다’는 고백은 여기서 완성된 육체가 내놓는 최대의 자랑이 된다. 다소 쑥스럽고, 다소 진부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자랑스러운 멍에’/ ‘담담하고 우아한 승리’는 아무리 뽐내어도 비난받을 수 없는 진리의 누설이다. 그리하여 이 시는 마지막 부분 ‘3. 달을 품은 자’에 도달한다.

 

(......전략......)

물과 불의 눈물이 섞인

단 하룻밤의 불구덩 화염 속에서

잉태와 탄생의 주문을 건다

재를 품고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고결하고 희뿌연 달은

하늘을 품고서야 단아한 달항아리로 승천한다

 

단아한 달항아리란 말할 나위 없이 백자를 가리키며, 지금까지 묘사. 서술되어 온 물과 불의 싸움과 화해는 그 빚는 과정의 이름이리라. 이때 결과로서 주목되어야 할 대목은 가장 끝 구절, ‘하늘을 품고서야 단아한 달항아리로 승천한다’는 부분이다. 물이 스며들어 질료들이 부드럽게 다루어지고, 알맞은 불의 화염이 그것을 익히는 시간의 작업이 이루어질 때, 시인은 거기에 ‘하늘을 품고서야-’라는 마지막 단서를 붙인다. 그렇다면 대저 하늘은 언제 어떻게 품는가. 하늘을 품는 행위는 앞의 순서, 혹은 과정과도 같은 별도의 거룩한 행위인가. 아니다. 그것은 물과 불이 얽혀서 함께 하는 ‘정밀한 사랑싸움’(1), ‘쓸쓸한 환희의 완성’(2), ‘잉태와 탄생의 주문’(3)을 통칭한다. 오직 인간의 힘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인간 바깥의 새 생명이 안고 있는 고통과 환희의 세계이다.

「달항아리」연작시는 1에서 8에 이르는 8편으로 되어있다. 그 전체가 달항아리라는 육체를 빚어 탄생시키는 과정을 고백의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고통스러운 모순의 모습이 흥미롭다. 마치 푸코가 예리하게 발견하고 진술하였듯이 육체는 그 스스로 쾌락의 즐거움을 지니면서도 고통스러운 압력을 받는다. 예컨대 이렇다.

 

물이 닿아야만 당신은 부드러워진다

소라모양으로 천천히 눌러 비틀 때 마다

빈틈없는 결속에 억눌렸던 아우성들이

숨구멍을 뚫고 터져 나온다

-「달항아리 2」

 

부드러운 육체가 고통스러운 억압을 만남으로써 완성으로 간다는 역설! 그러나 이때 가해지는 억압은 결과적으로 ‘정교한 힘’으로 명명된다. 그럼으로써 ‘삶은 어느새 완성된 한 덩어리의 반죽’이 된다. 금동원의 시세계를 잘 보여주는 ‘달항아리’는 이처럼 물질인 육체를 만들어 가면서, 그 육체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발언하는 일종의 알레고리적 방법을 보여준다. 그 물질과 생명의 경계에 말하자면 고개(嶺)가 있는데, 「달항아리」연작에서 그것이 ‘반죽’이다.

‘반죽’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흙덩이와 같은 질료가 물론 필요하지만 ‘둥근 원판 물레’와 같은 기구도 절대로 긴요하다. 또한 그 기구를 사용하는 기술 역시 반드시 갖추어져야 그 고개에 오를 수 있다. 이 같은 요소들은 물리적으로도 필요조건이지만, 거기엔 그것을 장악하는 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인은 그것을 ‘놀이’ 정신이라고 말한다.

 

속도를 줄여라

물을 발라 숨통을 열자

부드럽지만 넘치지 않게

온 몸으로 버티며 공평하게 힘을 주자

무너지지 않게 허리를 감싸 안고

매끄럽게 끌어 올리고 슬그머니 내리누르며

힘의 벅찬 소리도 여유 있게

 

믿어야만 가능한 균형이야

버티지 말고 나에게 모든 걸 맡겨봐

불신의 흙기둥은 비딱하게 균형을 잃고

확신의 흙기둥은 비참하게 무너져 내린다

 

한숨 소리가 정체를 물을 것이다

이걸 왜 하냐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가는 길이냐고

그냥 살다보면 알게 될거야

그러니 물레야, 제발 놀자

-「달항아리 3」

 

‘놀이Spielen’는 시를 포함한 예술의 중심개념이다. 과잉으로 떨어질 때 그것은 키치kitsch가 되지만 놀이 없이 예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그 맞은편에 있다고 할 ‘진지Ernst’ 또한 예술의 또 다른 중심개념이지만, 둘은 균형을 통해 조화를 이룬다. 바람직한 순간과 지점은, 놀이를 기법으로 한 진지함의 획득이라는 정신의 형성과정이 아닐까. 「달항아리」연작시들은 이런 면에서 시의 모범을 구현한다. 둥근 원판 물레에 흙덩이를 넣고, 물을 뿌리며 돌리는 작업이 온통 고통스럽기만 한다면 항아리는 과연 완성될까. ‘무너지지 않게 허리를 감싸 안는’ 맛과 ‘매끄럽게 끌어 올리고 슬그머니 내리 누르는’ 멋이 있을 때, 물레 돌리기는 한결 손쉬운 속도감과 균형감으로 완성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것은 놀이다. 아니, ‘놀이’라고 부르고 싶은 시인과 더불어 놀이가 된다.

금동원 시인에게는 육체를 시라고 생각하는 철학 비슷한 게 있다. 둘 다 시인이 만들어 간다는 생각 때문에 나온 게 아닌가 싶은데 「달항아리 4」와 「달항아리 8」는 그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완성을 향해 치솟고 싶은

탐욕의 힘을 누르고

정교한 균형의 미를 외면한 채

찰진 흙덩어리를 무지의 힘으로 납작하게 눌러준다

펼쳐놓은 욕망의 몸들

둔탁하고 도톰한 형태로 남은 흔적은 욕망의 입술

부드럽고 건강한 달에게 입맞춤하며

나는 그것을 아름다운 욕망접시라고 부르고 싶다

- 「달항아리 4」

 

이 시에서 육체는 물론 달항아리인데 그것은 욕망에 의해 형성되는 물질 아닌 물질이다. 물질이라는 최초의 인식은 그것이 흙덩이, 혹은 물과 결합된 흙덩이라는 평범한 사실 위에 기초한다. 그러나 곧 그 대상에 시인의 욕망이 투사되면서 물질은 아연 육체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시인은 그 출발점을 ‘텍스트’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시인이 재빨리 그려놓은 머리 속의 그림이다. 위의 시 전반부에서 이미 시는 그렇게 시작된다.

 

언제나 시작은 텍스트야

정당한 무게와 논리적인 형태를 유지해야 마땅하다

비틀림을 풀고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아, 시인의 욕망은 파괴와 질주 아닌 텍스트였던 것이다. ‘정당한 무게’, ‘논리적인 형태’, ‘마음의 중심’과 같은 지극히 고전적인 로고스의 틀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시인 스스로의 표현을 빌면 ‘우아하게 쌓아올린 우리들의 욕망기둥’ 이어서 스스로 파괴와 생성을 거듭하는 저 낭만주의의 그것과는 애당초 다른 범주에 있었다는 점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욕망은 이런 것이다.

 

동굴 속을 파 들어가듯

넓게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

담담하게 기다려야만 만들어지는 넓이다

 

‘담담하게 기다리’는 욕망- 거기에 시인 금동원의 활달하면서도 차분한 모순의 시학이 있다. 그것은 욕망을 균제하고 조절하는 욕망이며, 소박한 질료와 신체를 의미 있는 육체로 창조해 가는 욕망이다. 그것은 곧 흩어져 있는 생각과 낱말들을 모아서 시라는 육체로 만들어내는 욕망이기도 하다. 시 쓰기의 깊은 고뇌와 환희를 이러한 시각에서 고백하고 있는 「달항아리 8」에서의 다음 싯귀는 이런 의미에서 탁월한 울림을 던진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갈증과 애욕의 기다림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흔적으로

흙이 달항아리가 되듯

습작은 온전한 시로 완성되어간다

어느 황홀한 불꽃으로 녹아 흘러야

투명한 너의 빛을 안을 수 있을까

 

달항아리라는 몸뚱이, 그 실감의 육체는 곧 시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시는 구체적인 몸의 현실이며 실체 없는 관념의 수식이 아님을 시인 또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당위의 인정과 사실의 획득은 다르다. 그 엄청난 거리 앞에서 시인은 몸서리친다. 과연 그는 생명으로서의 육체를 획득할 것인가.

 

가마 속의 불꽃으로 견디고 있는 너는

지금 몇 도의 숨을 쉬고 있는 것이냐

1250도의 뜨거움은 어떤 고통의 순간일까

온 몸이 완전하게 녹아 흘러

뼛속까지 모두 태우며 살신성인하는

등신불의 집념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유약의 흔적

모두 녹아 흘러내린 곳에서

얻고자 하는 빛은 무슨 깨달음을 주려는가

서늘한 그리움의 생명을 씌우고

다시 태어나는 너는 부활의 빛깔인가

-「달항아리 7」

 

그 획득과정의 고난, 그 불가피한 역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시행 하나하나가 뜨겁기 짝이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의 굴을 통과해야 하는 사즉생(死卽生)의 필연이 치열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 ‘죽음을 받아들이며 견뎌낸 뜨거움/ 영원히 살아있음을 믿었던 시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숨결이다.’라는 고백을 토해낸다. 결론은 고통이 생명을, 생명이 육체를, 육체가 시를 낳는 아름다운 회로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시7의 끝부분, 백자를 얻고 난 다음의 감회다.

 

선명하고 고귀한 백색의 철학

코발트빛 짙은 바다의 슬픔을 담은 문학

투명하게 빛나는 사랑의 승리

인내의 어울림으로 다시 태어난

새 생명의 환희

가슴 벅찬 단 하나의 육체이자 생명이다

 

 

2

이제 생명의 육체를 얻기 까지, 그러니까 전(前)육체는 고통의 회로를 거쳐 왔음을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때 시인의 고백은 곧 육체 자체의 고백임을 잊지 말자. 말을 바꾸면 시 스스로의 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결정적 요소가 떠오른다. 그것은 물질이 생명의 육체로 승화, 혹은 변전하는 데에서 필수불가결로 지나가는 고개(嶺)에 관한 관심이다( ‘여보령’이라는 작품이 이 관점에서 흥미롭다 ). 앞서서 그것은 기술, 그리고 기구였음을 주목하였고, 놀이 정신에 의해서 포괄되었음을 보았다. 「달항아리」연작 시들을 제외한 금시인의 다른 작품들도 사실상 이와 같은 관심에 의해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다른 시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달항아리 5」, 「달항아리 6」에 나타난 놀이정신의 구체적 모습, 그러니까 시인이 넘고 있는 고개에 함께 올라보자.

 

둥글고 각진 칼들은

한 겹 한 겹

제 몸의 아픈 살들을 자해하며

어떻게 살아요? 침묵의 비명을 지른다

고통과 아픔의 자리에서 빛나는 원형의 빛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 든든한 뿌리

중심의 힘으로 버틴 삶의 성찰

온 몸을 받드는 굽이라는 희생의 무게

아름답고 견고한 항아리의 뿌리다

-「달항아리 5」후반부

 

생명의 빛을 품고 하나, 둘, 셋

건조된 알몸의 서사

황홀경의 짜릿한 마법 같은 변신

뽀얀 유약의 세레나데

-「달항아리 6」후반부

 

앞의 시5에서 고개는 ‘둥글고 각진 칼’ 놀이다. 이 칼놀이를 거치지 않으면 흙덩이에서 한치 앞으로도 나갈 수 없다. 칼놀이의 고개를 넘으면서 ‘원형의 빛’이 보이고 ‘굽이라는 희생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이 작품에 ‘굽깍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다음 시6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아름답게 육체가 생명을 입어가는 생명이 나타난다. 그것은 고개를 넘고 있는, 그리하여 마침내 고개를 모두 넘어선 상태의 시현이다. ‘휘감아 돌리고 돌려 하나, 둘, 셋’이 넘고 있는 모습이라면 ‘건조된 알몸의 서사’는 드디어 눈앞에 현존하는 육체의 실상이리라. 그 모습은 ‘황홀경의 짜릿한 마법 같은 변신’이지만 ‘뽀얀 유약의 세레나데’가 가해지지 않았으면 도달되지 않았을 생명 이전 물질의 세계이다. 이렇듯「달항아리」연작시들에서 인식되고 체험되고 연습된 금동원의 시세계는 그의 작품 전반으로 확대된다.「냉동인간」,「디지털 치매」,「부드러움」등등에서 확인되고 있는 ‘육체’에 대한 관심은 급기야 시 자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 그러니까 「시 속의 애인」,「시를 굽다」,「시의 비밀」,「시의 일과」등에서 주제의 자리에 올라선다.

 

사랑은 언제나 그림처럼 액자에 묶여 벽에 걸려있고

사람들은 서성인다. 무언가를 탐문하듯

-「시 속의 애인」중간부

 

사랑은 여기서 생명을 지닌 애인이 아니다. 고통의 과정을 거쳐 육화된 육체가 아니다. 사랑은 그저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이다. 애인은 그렇다면 있는가? 물속에 있다고 시인은 말해준다. 물은 시인이 ‘좋아하는 푸른 빛’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밖으로 나올 수 없이 갇혀 있다는 점에서 육체가 없다. 육체가 없는 자를 시인은 애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갇혔어요

삶과 죽음 사이에

시와 시인 사이에

치마와 바지 사이에

과거와 미래 사이에

마지막까지 물속에 있다

시 속의 애인이여

- 「시속의 애인」 끝부분

 

그러나 시인은 다시 애인이 갇혀 있을 뿐 육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다만 그는 삶과 죽음 사이, 시와 시인 사이, 치마와 바지 사이, 과거와 미래 사이 등 사이에 있다. 말하자면 고개에 앉아있는 형국이다. 왜냐하면 ‘시 속의 애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시 밖으로 나와서 육체를 가질 때, 그는 현실의 애인이 되고 시는 소멸한다는 것인가. 그는 고개를 넘지 않고 시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시는 미완의 육체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밀을 들어보자.

 

베일을 벗겨라

너의 고백을 들어보자

불에 데인 듯(인두로 지진 듯)

얇게 박피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시의 진물

(...... 중략......)

 

환희에 차서 허공을 휙휙

스치고 사라지는 시의 냄새

시큼하기도 한 쓴 맛

-「시의 비밀」전문

 

시의 맛은 쓰기 때문에, 시인은 거기에 살아있는 육체의 옷을 입혀주지 않는다. 애인도 그 속에 가두어 둔다. 아, 그러고 보니「달항아리 1」에서 처음부터 시인이 달아 놓았던 단서가 생각난다. 잠시 돌아가 보자.

 

찬란하게 빛나는 자랑스러운 멍에

담담하고 우아한 승리

물과 불이 일구어낸 쓸쓸한 환희의 완성이다

 

왜 시인은 그토록 격렬한 고통과 아픔의 과정을 딛고 육체로 탄생한 완성을 가리켜 ‘쓸쓸한 환희의 완성’이라고 했을까. 완벽한 완성의 모습으로 우아하게 서 있는 육체에게서 시인은 쓸쓸함을 느낀 것이다. 쓸쓸함이 배어있는 완성=육체로부터의 슬픔에서 시를 바라보는 시인의 일과가 다소 시니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시의 일과에 대해 말하자면

아, 시(詩)잖아요?

산다는 게 너무 시시(詩詩)하다는 걸

시시(詩詩)해서 시를 쓴다는 걸

아, 시(詩)잖아요?

-「시의 일과」끝부분

 

그러나 금동원은 냉소주의자나 육체주의자는 아니다. 시와 관련하여 다소간의 페이소스가 그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완성에의 길보다 부족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탄력적 사고가 있다. 그것이 그의 시를 이따금 재미있게 만든다.

 

매일 아침

바삭하고 고소하게 시를 구워내고 싶다

그리움으로 발효된 반죽은

설렘으로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짭짤한 연민과

땅콩처럼 으깨진 고소한 담론

계피가루 향취 가득한 사유를 담아

비틀린 삶의 입구는

세상 보자기를 싸매 듯 침묵으로 묶는다

- 「시를 굽다」전반부

 

아득하면서도 맛있다. 이 시는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완벽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완성으로의 길이 워낙 고통스럽고 짜임새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힘든 완성이 이루어 놓은 육체와 생명의 균형이 숨 가쁜, 빈틈없는 결속을 뽐내고 있어서일까. 인내와 결속의 완성미에서 차라리 쓸쓸함을 느끼기에 시인은 한 음계 낮춘 자리에서 고소하고 짭짤한 연민을 즐긴다. 완성과 미완의 두 범주를 드나들면서 두 곳 모두에 시의 이름을 붙이고 다니는 금동원 시인-「사이」를 비롯하여 유독 경계에 관한 시가 많은 것도 따라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경계에 도전하는 두 범주의 싸움이 치열해진다면, 시의 긴장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김주연 문학평론가(1941~)는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대학과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독문학을 연구했다. 『문학과지성』 편집동인으로서 『상황과 인간』, 『문학비평론』, 『변동 사회와 작가』, 『새로운 꿈을 위하여』, 『문학을 넘어서』, 『문학과 정신의 힘』, 『문학, 그 영원한 모순과 더불어』, 『사랑과 권력』, 『가짜의 진실, 그 환상』, 『디지털 욕망과 문학의 현혹』, 『근대 논의 이후의 문학』, 『미니멀 투어 스토리 만들기』, 『문학, 영상을 만나다』, 『사라진 낭만의 아이러니』, 『몸, 그리고 말』, 『예감의 실현』(비평선집) 등의 문학평론집과 『고트프리트 벤 연구』, 『독일시인론』, 『독일문학의 본질』, 『독일 비평사』 등의 독문학 연구서를 펴냈다. 한국독어독문학회 학회장,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역임했다. 30여 년간 숙명여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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