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여성작가선》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이선희, 임순득 저 | 문학과지성사 |
○책 소개
일제강점기 신여성의 사회적 저항과 소수자 삶의 성찰을 담아낸,
근대 여성 5인의 대표작 열다섯 편 수록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여성 작가 5인의 주요 작품을 모은 『근대여성작가선』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의 마흔일곱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태 전 백신애 중단편선 『혼명에서』를 마흔여섯번째 책으로 펴낸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은 이번 『근대여성작가선』에서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이선희, 임순득의 작품을 담아내며, 남성 중심 체제 속의 어머니이거나 아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독자성을 가진 개인이고자 했던 일제강점기 신여성들의 목소리를 더욱 다양하고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불합리함과 그에 기반한 가족 구조의 불안정성을 폭로하고 새로운 가족 관계를 모색하며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각종 질곡에 저항해온 당시 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는 일은, 우리 여성문학의 출발점에서 다시금 여성의 삶의 조건, 나아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삶의 조건을 성찰하는 뜻깊은 시간을 마련해줄 것이다.
○책 속으로
“오, 참, 그 『너희들의 등 뒤에서』라는 책은 우리 서모 집 사랑채에 셋방을 빌려가지고 있던 일본 청년이 쓴 것이라지. 그 주인공은 탄실의 행동과 말하는 것을 더러 묘사했었다지만 아주 다르지요. 그 책 가운데 주영이는 꼭 일본 여자지 어디 탄실이 같습니까? 그래도 그 작자는 탄실이보다는 그 책의 주인공인 주영이가 훨씬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선 사실부터 탄실이는 처음에 동정을 자기 스스로 깨뜨린 것이 아니고 앗긴 것도 또 일본 사람에게가 아니라 조선 사람에게 그랬으니까요. 참 말 못 할 표독한, 꼭 무엇과 같은 사람이지요. 그 어린것이 멀리 타향에 가서 그래도 저를 믿는데, 차마 그런 행동이 어떡해서 해졌는지, 도척이보다 더하지요. 그것도 웬 제가 사귄 것입니까? 내 삼촌이 시룽시룽 사귀어준 것이지요. 말하자면 내 삼촌이란 어른이 심사가 고약하지요. 그것을 다 말하면 집안 흉이 날 테니까 채 말은 못 하지만 그것참 불행한 운명에 빠진 여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즈음에도, 혹시 구할 수만 있으면 그 운명에서 구해주려고 하지만 어디 말을 들어요? 남자란 악마보다 더 거리낀다고 저주하니까. 본래는 아주 인정 많고 착한 여자였지만 그 타락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아마 자기도 온전치는 못하던 모양이었어요. 하나 어느 편으로 보든지 주영이와는 다릅니다.” --- pp.80~81 김명순, 「탄실이와 주영이」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칫한다.
과연 그렇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하나. 남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아아 과연 사람 노릇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남자와 같이 모든 것을 하는 여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닐 터이다. 4천 년래의 습관을 깨뜨리고 나서는 여자는 웬만한 학문, 여간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의 전 인심을 움직이게 하던 스탈 부인과 같은 미묘한 이해력, 요설한 웅변, 그런 기재(機才)한 사회적 인물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살아서 오를레앙을 구하고 사(死)함에 프랑스를 구해낸 잔 다르크 같은 백절불굴의 용진(勇進) 희생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달필의 논문가, 명쾌한 경제서의 저자로 이름을 날린 영국 여권론의 용장 허스트 부인과 같은, 어론(語論)에 정경(精勁)하고 의지가 강고한 자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아아, 이렇게 쉽지 못하다. 이만한 실력, 이러한 희생이 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 pp.194~195 나혜석, 「경희」
나는 자식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전 생활을 희생할 수는 절대로 없나이다. 자식의 생활과 나의 생활을 한데 섞어놓고 헤맬 수는 없나이다. 물론 남의 부모가 되어 자식을 기르고 교육시켜서 한 개 완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직무이겠지요. 그러나 부모의 한 사람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양육을 넉넉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는 모욕을 당하면서 자식 때문에 할 수는 없나이다.<br/>그러니까 아이가 자라서 어미라고 찾으면 만나고 아니 찾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 p.288 김일엽, 「자각」
나는 무엇을 받아야 할까. 이것은 내게 불구자란 약점이 생길 때부터 생각해온 문제다.<br/>나는 내 남편도 나와 같이 다리 하나가 병신 되기를 바랐다. 남편의 다리 하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다리 하나쯤으로는 엄청나게 부족하다. 내가 받아야 할 것은 그의 목숨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받아야 겨우 수지가 맞을 것 같다. 이것은 내 계산서뿐만 아니라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일 것이다. --- p.310 이선희, 「계산서」
“신혜원이라는 네 히로인에게는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남성이 있을 거 아냐. 그런 사람들 이름은 전부 뭐라고 부르니?”
“그녀는 말야, 형제도 없고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고독한 사람이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거야. 적어도 신격화되지 않은 모세(毛世)와 거만하지 않은 굴원(屈原)을 반씩 합한 것 같은 성숙한 인격이 아니면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
“만약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타협은 하지 않을 거야.” “오, 참, 그 『너희들의 등 뒤에서』라는 책은 우리 서모 집 사랑채에 셋방을 빌려가지고 있던 일본 청년이 쓴 것이라지. 그 주인공은 탄실의 행동과 말하는 것을 더러 묘사했었다지만 아주 다르지요. 그 책 가운데 주영이는 꼭 일본 여자지 어디 탄실이 같습니까? 그래도 그 작자는 탄실이보다는 그 책의 주인공인 주영이가 훨씬 낫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선 사실부터 탄실이는 처음에 동정을 자기 스스로 깨뜨린 것이 아니고 앗긴 것도 또 일본 사람에게가 아니라 조선 사람에게 그랬으니까요. 참 말 못 할 표독한, 꼭 무엇과 같은 사람이지요. 그 어린것이 멀리 타향에 가서 그래도 저를 믿는데, 차마 그런 행동이 어떡해서 해졌는지, 도척이보다 더하지요. 그것도 웬 제가 사귄 것입니까? 내 삼촌이 시룽시룽 사귀어준 것이지요. 말하자면 내 삼촌이란 어른이 심사가 고약하지요. 그것을 다 말하면 집안 흉이 날 테니까 채 말은 못 하지만 그것참 불행한 운명에 빠진 여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즈음에도, 혹시 구할 수만 있으면 그 운명에서 구해주려고 하지만 어디 말을 들어요? 남자란 악마보다 더 거리낀다고 저주하니까. 본래는 아주 인정 많고 착한 여자였지만 그 타락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아마 자기도 온전치는 못하던 모양이었어요. 하나 어느 편으로 보든지 주영이와는 다릅니다.”
--- pp.80~81 김명순, 「탄실이와 주영이」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에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 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에요” 하던 생각을 하며, 아버지가 담뱃대를 드시고 “뭐 어쩌고 어째, 네까짓 계집애가 하긴 무얼 해. 일본 가서 하라는 공부는 아니 하고 귀한 돈 없애고 그까짓 엉뚱한 소리만 배워가지고 왔어?” 하시던 무서운 눈을 생각하며 몸을 흠칫한다.
과연 그렇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하나. 남들이 하는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아아 과연 사람 노릇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남자와 같이 모든 것을 하는 여자는 평범한 여자가 아닐 터이다. 4천 년래의 습관을 깨뜨리고 나서는 여자는 웬만한 학문, 여간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나폴레옹 시대에 파리의 전 인심을 움직이게 하던 스탈 부인과 같은 미묘한 이해력, 요설한 웅변, 그런 기재(機才)한 사회적 인물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살아서 오를레앙을 구하고 사(死)함에 프랑스를 구해낸 잔 다르크 같은 백절불굴의 용진(勇進) 희생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달필의 논문가, 명쾌한 경제서의 저자로 이름을 날린 영국 여권론의 용장 허스트 부인과 같은, 어론(語論)에 정경(精勁)하고 의지가 강고한 자가 아니고서는 될 수 없다. 아아, 이렇게 쉽지 못하다. 이만한 실력, 이러한 희생이 들어야만 되는 것이다.
--- pp.194~195 나혜석, 「경희」
나는 자식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전 생활을 희생할 수는 절대로 없나이다. 자식의 생활과 나의 생활을 한데 섞어놓고 헤맬 수는 없나이다. 물론 남의 부모가 되어 자식을 기르고 교육시켜서 한 개 완전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당연한 직무이겠지요. 그러나 부모의 한 사람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양육을 넉넉히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는 모욕을 당하면서 자식 때문에 할 수는 없나이다.
그러니까 아이가 자라서 어미라고 찾으면 만나고 아니 찾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 p.288 김일엽, 「자각」
나는 무엇을 받아야 할까. 이것은 내게 불구자란 약점이 생길 때부터 생각해온 문제다.
나는 내 남편도 나와 같이 다리 하나가 병신 되기를 바랐다. 남편의 다리 하나?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다리 하나쯤으로는 엄청나게 부족하다. 내가 받아야 할 것은 그의 목숨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받아야 겨우 수지가 맞을 것 같다. 이것은 내 계산서뿐만 아니라 모든 아내 된 자의 계산서일 것이다.
--- p.310 이선희, 「계산서」
“신혜원이라는 네 히로인에게는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남성이 있을 거 아냐. 그런 사람들 이름은 전부 뭐라고 부르니?”
“그녀는 말야, 형제도 없고 거의 고아나 다름없는 고독한 사람이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거야. 적어도 신격화되지 않은 모세(毛世)와 거만하지 않은 굴원(屈原)을 반씩 합한 것 같은 성숙한 인격이 아니면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
“만약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타협은 하지 않을 거야.”
--- pp.368~369 임순득, 「이름 짓기」
작가 소개
○김명순(1896~1953)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 1896년 평안남도 평양군 융덕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시부야 국정여학교에 편입하였으나 중퇴했다. 1917년 잡지 [청춘]의 현상소설 모집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19년에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도쿄에 체류 중인 소설가 전영택의 소개로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문학가들이 창간한 종합문예 동인지 [창조]의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한국 여성 시인 최초로 시집 『생명의 과실果實』을 간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단편소설 「처녀의 가는 길」(1920), 「칠면조七面鳥」(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돌아다볼 때」(1924), 「꿈 묻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같이」(1929) 등과 시 「동경」(1922), 「옛날의 노래여」(1922), 「거룩한 노래」 「시로 쓴 반생기」(1938), 시집 『애인의 선물』(1928) 등의 작품을 남겼다. 2000년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번역소설 포함), 수필·평론 20편, 희곡 3편 등이다.
그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고 있으며, 시 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탄실은 그의 필명이자 아명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 중 당한 성폭력 사건 이후 각종 스캔들에 휘말리다 끝내 가난과 정신병을 이기지 못한 채 1951~1953년 무렵 일본 도쿄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암울했던 식민시기와 더불어 기생의 딸이라는 낙인, 성폭력, 문단의 공격 등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활동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로서 5개 국어를 구사하며 서양 문학을 조국에 선보인 번역가이기도 하다. '자유연애'를 역설하며 여성해방을 꿈꾼 신여성이자 선각자이다.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김일엽(一葉, 원주元周)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 어느 호칭으로 불려도 좋을 만큼 전방위 글쓰기를 보여 준 사람이다. 또한 여성운동가, 계몽운동가, 종교인의 면모도 간과할 수 없다. 널리 불렸던 일엽(一葉)은,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유명 여성 문인의 이름에서 따와 지었다고 알려지기도 한 아호인데, 본명은 원주(元周)다. 후일 불가에 귀의하고 얻은 이름은 하엽(荷葉), 도호(道號), 백련도엽(白蓮道葉) 등이나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다.
1896년 6월 9일(음력 4월 28일) 평안남도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대 독자이며, 개신교 목사인 용겸(用兼) 씨와 이마대(李馬大) 여사의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구세학교와 진남포 삼숭여학교를 다녔는데, 신체시 「동생의 죽음」이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한 해 앞선 1907년에 창작되었다는 견해가 있어,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신체시 또는 신시의 효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09년에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이화학당을 다니던 1915년경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그사이 동생 넷도 세상을 떠나 가족을 모두 잃게 되었다. 이후 그의 가세를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이 무렵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되고 1918년에는 이화전문을 졸업하며, 이듬해 3·1 운동 때는 전단을 작성해 돌리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어 외할머니의 후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 영화(英和)학교에 다녔는데, 1920년에 이 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한 후 잡지 [신여자]를 창간해 4호까지 간행했다.
이 무렵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여자 교육과 사회 문제’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동아일보』에 「여자 교육의 필요」 등의 계몽적 주제의 글을 싣는 등 여성 운동에 앞장섰다. 아현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잠시 재직한 적이 있으며, 첫 번째 결혼의 실패에 이은 ‘사랑’의 문제를 둘러싼 방황으로 세인의 주목을 크게 받은 바 있다. 이 무렵 단편소설로, 「계시」(1920), 「어느 소녀의 사」(1920), 「혜원」(1921) 등을, 시로는 계몽적 주제의 창가류에 이어 개인의 애욕과 정서를 표현한 「짝사랑」, 「그대여 웃어 주소서」 등을 썼다.
1923년 9월에는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고, 1927년에는 불교 기관지 [불교]에 관여해 1932년까지 문예란을 담당하면서 활발한 집필 활동을 보여 주었다. 1928년 금강산 서봉암에서 입산하고, 이어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법사 문하에서 수계를 했으며, 1933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득도한 후 이 암자의 입승(入繩)으로 25년 동안 머물렀다. 한국 비구니의 대모로서 1971년 1월 28일 76세에 입적했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 기슭에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생전에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 등의 산문집을 펴냈으며, 열반 직후 유고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1974)이 간행되었다.
12살에 역사적인 첫 국문 자유시라는 업적을 남긴 문인, 언론인, 여성운동가이자 승려. 1920년에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며 신여성 운동을 주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한국 근대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 이선희(1911~1946)는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원산에서 보내다가 1929년 서울로 상경하여 잡지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했다. 1934년 『중앙』에 단편 「가등」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소설 「계산서」 「매소부」 「탕자」 「처의 설계」 「창」 등을 비롯해 수필, 평론, 콩트 등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도 활동했다. 1946년 7월경 남편 박영호와 함께 월북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순득은
○출판사 리뷰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사회를 고발한 작가, 김명순
조혼과 자유연애의 과도기에 처한 희생양이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어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한 김명순은 자신의 비극적 삶 자체가 그대로 처절한 문학이었던 제1세대 신여성 작가이다.
1896년 평양의 갑부 김희경의 서녀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어머니가 기생 출신 첩이라는 배경은 평생 작가의 삶과 문학을 옥죄는 덫으로 작용했다. 1911년 12월 진명여학교 중학과를 중퇴한 작가는 아버지가 엽관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하면서 어려워진 집안 형편에서도 1913년 9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4년 도쿄 국정여학교 3학년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이듬해에 숙부의 소개로 알고 지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결혼도 거절당하면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이 일본과 조선의 언론에 실리면서 스캔들로 번져 결국 김명순은 졸업을 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 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 1917년 졸업하던 해의 11월에 『청춘』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특별대현상’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3등으로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선집에는 데뷔작인 「의심의 소녀」를 비롯하여 예술적 소양을 갖춘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성 ‘선례’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자아를 드러낸 작품 「선례」와 아름답고 능력 있는 영어 교사 류소련과 지식인 기혼 남성 송효순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그린 「돌아다볼 때」, 그리고 자전적 소설인 「탄실이와 주영이」가 실렸다.
특히 1924년 6월 14일부터 7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탄실이와 주영이」는 자신이 당한 ‘데이트 강간’을 고발하고, 자신의 인생과 예술 활동을 왜곡하고 조롱하는 남성 중심의 문단에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신여성’ 작가 김명순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나카니시 이노스케의 『너희들의 등 뒤에서』의 주인공 ‘권주영’이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소문과 남성 작가들이 자주 자신을 왜곡된 이미지로 작품에 등장시키는 데 맞서기 위해 김명순이 ‘되받아 쓰기’로 저항한 작품이 바로 「탄실이와 주영이」다. 이 작품은 나아가 남성 중심의 식민지 조선 문단에서 이루어지던 평론을 가장한 비방이 내포한 문제의 뿌리를 드러내 보였고,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성폭행’ 문제를 공론화시킨 최초의 사례로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기의 시대적 풍경을 여성 개인사의 차원에서 포착한 성장소설로서도 큰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김명순의 이러한 ‘고발’은 당시에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여성들에게서도 응원을 받지 못했고, 결국 그는 문단과 나아가 조선이라는 민족 공동체와도 결별을 하기에 이른다.
1925년 4월에 자신의 첫 창작집이자 여성 작가의 첫번째 창작집으로 의미가 깊은 『생명의 과실』을 상재하며 192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으로 활약했으나, 1927년 「은파리」 기사와 관련하여 개벽사의 편집자였던 방정환과 차상찬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으로 평판이 크게 악화된 김명순은 문단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해방 전까지 조선을 왕래하다가 1945년 이후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1951~53년 무렵 일본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적 경험을 공적인 담론으로 만들어낸 선구자, 나혜석
나혜석은 당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인습에 부딪혀 억압받고 고뇌하는 모습을 자신의 모든 소설 속에 담아내며 그러한 여성의 삶의 국면마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선언한, 근대 여성 문학의 선두에 선 작가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으며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사립 여자 미술학교를 다녔다. 당시 도쿄의 조선 유학생 사회에서 희귀하게도 여성 화가이자 여성 문인으로서 빛을 발했던 그는 1914년 재일본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에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계몽적인 논설을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1918년 도쿄여자친목회가 펴낸 『여자계』 제2호에 소설 「경희」를,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 여성문학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이번 선집에는 ‘경희’라는 신여성이 봉건적인 인습과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경쾌하게 묘사한 첫 소설 「경희」와 ‘돈’이 많은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 성격의 이중성을 포착한 「현숙」, 구여성인 어머니와 신여성인 딸의 결혼관을 둘러싼 갈등을 보여주는 「어머니와 딸」이 수록되었다.
일본 여자 유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여성의 이상을 조선적 현실에 구현하는 구체적 방법을 모색한 「경희」는 부르주아 계몽문학으로서 동시대 남성들의 소설보다도 사실성이나 구성력, 인물의 성격화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결혼 문제를 놓고 경희가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장면은 실제로 미술학교 2학년을 마친 뒤 귀향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명문가의 아들과 결혼할 것을 강요하여 학비도 주지 않았던 작가의 경험과 맞물리며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이혼과 함께 모든 친권이 박탈되고 돈 한 푼 없이 쫓겨난 이후 발표한 소설 「현숙」에는 작가의 파란 많은 인생살이가 배어 있고,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마지막 소설인 「어머니와 딸」은 변화한 나혜석의 처지, 변화한 세태가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삶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화가로서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문인으로서 자각한 신여성의 모습을 그렸던 나혜석은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말하기 어려운 감정과 고통을 앞장서서 글로 써왔으나 결국 이혼 이후 생계를 어렵게 꾸려가다가 1948년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신분을 감춘 채 홀로 눈을 감았다.
여성의 해방을 부르는 자각의 목소리, 김일엽
여성 편집진에 의한 여성 필자들의 글쓰기로 여성의 사상을 드러낸 최초의 본격 여성 잡지 『신여자』를 발간한 김일엽은 여성이 근대적 교육을 받고 자각해야 하며, 자각한 여성은 여성들에게 남아 있는 노예성을 타파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6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난 일엽 김원주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고, 이런 형편을 딱하게 여긴 주변의 권유로 22세 연상인 이노익과 결혼을 했으나 사랑과 이해가 없는 결혼 생활이라 감정을 누르고 개성을 죽이면서 살았다. 그러다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입센과 엘렌 케이의 사상에 공명하여 깨달음을 얻은 그는 남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1920년 3월 『신여자』를 발간하게 된다. 이번 선집에는 『신여자』 제4호(1920. 6)에 발표한 소설 「청상의 생활」과 1926년 6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자각」이 수록되었다.
청상과부가 되어 억지로 수절하는 여성의 비극과 자각의 과정을 보여주는 「청상의 생활」은 과부가 된 여성의 성욕이나 이성에 대한 갈구를 매우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자각」은 김일엽의 소설 중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으로, 구여성이었다가 ‘자각’을 통해 신여성으로 태어나는 여성의 고백을 서간체 형식에 담았다. 「청상의 생활」이 구여성이 신여성을 응원하는 목소리를 담았다면, 「자각」은 구여성이었던 여성이 아직도 과거 자기처럼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구여성을 향해 그런 생활을 깨뜨리고 나오라고 계몽하는 목소리다. 1922년 4월경 이노익과 이혼한 김일엽은 임노월과 재혼한 뒤 인간으로서 개인주의를, 여성으로서는 모성을 자각했으며, 예술적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연애와 결혼, 도덕, 정조 문제 등이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을 실감한 그는 각종 매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성해방의 주장을 담은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8년 삭발하고 수계를 받은 그는 1933년 만공선사가 있던 예산 수덕사에 입산해 본격적인 수도 생활에 들어갔으며, 한국 비구니의 대모로서 1971년 1월 28일 76세에 입적했다.
대등한 남녀 관계의 등가 교환을 주장하는 작가, 이선희
이선희는 191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12월에 개벽사에서 발행하는 『신여성』지의 기자로 들어가 1934년 6월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최영주와 함께 편집을 담당했다. 1934년 12월 단편소설 「가등」을 『중앙』에 발표하면서 등단했지만 임신과 출산으로 약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1936년 중반부터 작가로, 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연애든 사랑이든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문제로 삼고 여성의 입장에서 그 관계를 냉정하게 분석한다. 이번 선집에는 등가 교환이 이루어지는 대등한 남녀 관계를 주장하는 작품 「계산서」와 역시 인간관계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소설 「매소부」, 모든 것을 계산하면서도 현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낭만’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여주는 「탕자」가 수록되어 있다.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 사산과 함께 자신의 다리 한쪽을 잃은 아내가 저녁에 새 넥타이를 매고 나가는 남편을 의심하면서 그에게 청구할 계산서를 작성하던 중 남편도 자기와 똑같이 한쪽 다리가 없어져야 되는 것 아니냐고 절규하는 작품 「계산서」는 여성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도발적인 계산을 재기발랄한 필체로 그려내어 호평을 받았다. 「매소부」는 자기 잇속에 따라 ‘조강지처’를 내세우는 이들의 이중성과 조강지처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여성이 그들의 이중성을 차갑게 바라보는 심리를 해부한다. 이것은 어느 한쪽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각자 마음속의 계산을 드러내 보인다. 마지막으로, 약혼자가 있는 화자 ‘나’가 생전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나 섬에서 만난 등대지기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내용을 담은 「탕자」에서 작가는 남녀 사이 욕망의 등가를 주장하며 여성에게도 ‘일탈’의 욕망이 들끓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방 후 이선희는 남편 박영호와 함께 월북했는데, 최정희나 김사량의 전언에 의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저항의 자세를 견지하는 성숙한 여성 주체를 그리는 작가, 임순득
1930년대 초 격렬했던 학생운동권 출신인 임순득은 양심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전향의 논리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 편에서 자기 세대 여성들이 도달한 지성과 감성을 대변했던 작가이다.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임순득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192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학년 때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을 겪었다. 그 후 3학년 때인 1931년 6월에는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주도하여 퇴학을 당했고, 1932년 동덕여고보에 편입을 했다. 이곳에서 교사 이관술과 그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는 여성 동료들을 만난 그는 독서회를 꾸려 활동하다가 193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피검되고, 다시 학생자치단체 구성을 시도했다가 1933년 7월에 결국 퇴학을 당했다. 이런 여학생기를 거친 뒤 작가이자 평론가의 길을 걷게 된 임순득은 일제 말기까지 굽히지 않고 저항의 자세를 견지했던 경성콤그룹의 사람들을 접하거나 의식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작품 활동의 중요한 동기이자 배경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일제 경찰의 고문과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1939년 2월 둘째 오빠인 임택재가 사망했는데, 오빠의 활동과 이른 죽음 또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선집에는 인간의 해방을 말하면서도 성별 분업과 여성에 대한 도구적 관점에 고착되어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 여주인공 혜영의 모습에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는 등단작 「일요일」, 일제의 창씨개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당시 운동권의 가부장적 관습과 거기에 순응하는 여성의 의존성까지 비판하는 문제작 「이름 짓기」, 딸의 혼사에서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으나 아들의 혼사에서는 봉건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가 딸과의 대화를 통해 정신 교육을 받는 내용의 「딸과 어머니와」가 수록되었다.
「이름 짓기」에서 조선이란 여성이 자립하기 가장 어려운 공간이라고, 조선 민족이면 누구나 어렵지만 여성은 더 어렵다고 간파했던 임순득은 당시 교육자와 문인 등 여성 지도자들이 신체제론에 발맞추어 내세운 ‘생활 개선’이라는 것이 가진 반민중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작품 「달밤의 대화」를 끝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침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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