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 시인의 TISTORY

이 곳은 시인의 집! 문학과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금동원의 우연의 그림 앞에서

詩 이모저모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안희연

금동원(琴東媛) 2021. 6. 8. 22:52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저  | 창비 |

 

 

○책 속으로

 

시소는 기울어져 있다

혼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

기침할 때마다 흰가루가 폴폴 날린다

이것봐요 내 영혼의 색깔과 감촉

만질 수 있어요 여기 있어요

(...)

저 개는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

제발로 흙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길 즐긴다

                                             ----「소동」 중에서

살아있음,

나는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은 내가 남아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업힌 」중에서

천사, 영혼, 진심, 비밀……
더는 믿지 않는 단어들을 쌓아놓고
생각한다,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을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이다

다 알 것 같은 순간의 나를 경계하는 일
하루하루 늑대로 변해가는 양을
불운의 징조라고 여기는 건
너무 쉬운 일
--- 「추리극」 중에서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중에서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 「역광의 세계」 중에서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 「표적」 중에서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 「스페어」 중에서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 「열과(裂果)」 중에서

 

 

○작가 소개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를 펴냈다. 장래희망은 알록달록해지는 것. 서둘지 않고, 숨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마음을 일으켜 길을 나선다

 

○출판사 리뷰

안희연의 시는 “쇠구슬 같은 눈물”(「연루」)이 차오르는 슬픔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라니. 시인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가엾은 존재들의 슬픔을 끌어안으며 대신해서 울어주고,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이야기들”(「구르는 돌」)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온 우주가 나의 행복을 망치려”(묵상」) 드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 있는 자체가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그러니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계속 가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구르는 돌」)다. 그리하여 시인은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열과(裂果)」) 다시 시작하고, 실패와 절망 끝에 남겨진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나”(「스페어」)를 사랑하며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시인은 그토록 오랜 세월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그러나 “미로는 헤맬 줄 아는 마음에게만 열리는 시간”(「추리극」)임을 알기에 저 너머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스페어」)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절망과 슬픔 속에 묻히기에는 “너무 커다란 우리의/영혼을 조망하기 위해”서 “뒤로 더 뒤로” “멀리 더 멀리 가보기로”(「자이언트」) 한다. 시인은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라 자탄하지만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슬퍼하다니. “물거품처럼 사라질”(「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이야기일지라도 절망 뒤에 오는 더 큰 절망을 기꺼이 껴안으며 “최선을 다해 산 척을 하는”(「업힌」) 마음으로 삶을 견디어가는 시인의 노래는 오히려 삶의 “고요한 맹렬”(양경언, 해설)이자 희망일 것이다.



○안희연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 ‘핀 시리즈’로 선보였던 소시집을 포함하면 세번째 시집인 셈입니다. 출간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시집이 나오는 일은 회를 거듭한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여전히 떨리고, 걱정스럽고, 아득합니다. 첫 시집을 묶을 때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 다신 그렇게 울 일이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시인의 말’ 마지막 문장을 쓰자마자 눈물이 터져나와서 스스로도 많이 놀랐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시집이 어떤 방향, 어떤 속도, 어떤 온도로 걸어가 어떤 이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에요.


- 〔문학3〕 기획위원, 304낭독회 일꾼 등 평소 바쁘게 지내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외적인 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과 동시에 시를 쓰는 일상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봄부터는 대외활동이 많이 줄었고요. 보통 집에서 한끼 식사를 정성들여 해 먹거나 동네를 산책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곤 합니다. 시 쓰는 일은 혼자 해야 하는 일이고 상당한 고립을 요하는 일이다보니 외로울 때가 많아요. 그럴 땐 또 사부작사부작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습니다. 안쪽과 바깥쪽의 균형을 잘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한데요, 그 균형을 유지한다는 건 언제나 어렵단 생각이 드네요.


- ‘시인의 말’ 중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이나 특징은 무엇인가요?


시집 제목처럼, 독자 분들을 ‘여름 언덕’으로 초대하고 싶었습니다. 첫 시집의 마지막 시가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인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어요.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고립된 절벽이 아니라 흐르는 언덕이라는 점이 제겐 중요했어요. 우리 삶의 기반이, 반복되는 하루의 끝이 매 순간 절벽 위라면 그건 너무 힘겨운 일이잖아요. 죽음의 기억에 지배당할 때, 세상이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 때, 무의미와 권태, 슬픔이 제집인 듯 맹렬히 들이닥칠 때 ‘나는 절벽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해보는 거죠. 여름 언덕을 오르는 일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무더위와 목마름, 그 밖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과 싸우는 일일 테지만, 언덕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릴 테니까. 언덕 위에서 세계를 바라보다보면, 무거웠던 것들이 조금은 옅어지기도 하고, 다시 힘을 내 언덕을 내려갈 시간이 찾아오기도 하니까요.
부디 이 시집이 여러분들의 언덕 행(行)에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시집을 덮은 뒤엔 틀림없이 무언가 달라져 있기를 바라요. 그것이 아주 사소한,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일 리 없는 변화라 하더라도.


-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와 이유를 부탁드립니다.


시집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열과」라는 시를 꼽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 한권의 시집은 「열과」의 첫 구절,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라는 문장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집 안에는 들끓는 마음을 가진, 어느 것도 용서할 수 없는, 한없이 공허한 채로 언덕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이 수시로 출몰하지만, 시집의 마지막 장에 도착했을 땐 그가 좀 가벼워져 있기를 바랐습니다.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도 함께 가벼워질 수 있기를 바라요.


-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나 삶의 계획 등이 궁금합니다.


계속 쓰는 사람의 자리에 있겠다는 다짐 외엔 어떤 말도 사족일 것 같습니다.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내어줄 수 있는 손.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 의자, 혹은 나무그늘 같은 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시집을 만나주시는 분들에게 미리 깊은 감사를 전해요.

 

'詩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학교수/ 강우식  (0) 2021.07.17
쉬!/ 문인수  (0) 2021.06.11
악의 꽃  (0) 2021.05.28
근대여성작가선  (0) 2021.05.05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0) 2021.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