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교수》
강우식/ 리토피아
○책 속으로
지은이로 부터.2
누가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시도 끄적이다가, 시도 모르면서
시학교수질도 했다고 답하겠다.
신라의 영원성을 팔던 미당도
지조론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지훈도
경상도 가랑잎으로 흔들렸던 목월도
약력 끝줄에 아무도 안 달았던
이름 시학교수, 지나가는 개도 안 물어갈
허명뿐인 시학 교수였다고 실토하겠다.
시를 좀 아는 시인들은 詩場엘 가고
시를 모르는 무식한 강우식만 남아서
내 끄트머리 시집에 시학교수라는 이름을 단다.
-2021년 고향 봄바다가 그리운 5월에
꽃
꽃피는 거 비록 한때지만 눈보라 비바람 쳐도
꽃도 그 시절이 있어 사람처럼 추억을 먹고 산다
굴뚝 연기
눈이 온 저물녘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는
어느 집에서 옥동자 낳았다고
하늘에 알리는 것 같아
너무나 경사스럽다.
가정집에서 하늘에 알리는 일로
연기밖에 뭐가 있겠는가.
로마 바티칸 성당에서도
새 교황을 세웠을 때
하늘이 열리는 신호로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 성스러움이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저녁 한 끼를
오붓이 즐기기 위해
된장찌개라도 끓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피워 올리는
연기는 어떤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눈 내리는 저녁이면
어떤 연기든 다 받아줄 것 같다.
지금 같은 어스름으로 물들어가며 기우는
북녘 땅 어느 신간에서 피워 올리는
한 끼 조차 어려운 맥 풀린 굴뚝 연기 조차
긍휼히 여기면서 받을 것 같다.
여적- 구원救援으로서의 시- 중에서
(......)
대학을 물러나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작품을 열심히 써왔다. 그 한 편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에게 시 수업을 들으며, 시에 눈 뜨고 꿈꾸며, 창조하고 공유하고자 했던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되자는 스스로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정 수준의 근면성과 열정을 놓지 않고 나름 다양한 시적 실험과 모색, 성취를 위해 시를 써왔다. 시를 공부했던 학생들이 후일 시 강의를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부끄럽지 않게 대답되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나름 애써 왔다.
(......)
대학에 있을 때 나는 서정주의 시집 《산사山詩》를 텍스트로 논문 한 편을 쓴 적이 있다. 이 《산시》 라는 시집은 스스로 세계여행시라고 명명하진 않았지만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산을 중심소재로 하여 쓴 것이어서 세계여행시의 효시라고 할 만 하다. 미당은 산시를 쓸 무렵 서책으로 된 대형 세계지도를 구해서 서재의 책상에 놓고는 아침마다 독경讀經하듯이 세계의 높은 산 이름들을 순서대로 암송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스승의 모습에서 아, 시란 이렇게 시인과 소재가 하나가 되도록 몰두해야 좋은 시가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
앞에서 밝힌 내 시집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짐작하겠지만, 나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적 형식에도 천착해왔다. 이것은 내 시가 좋다 나쁘다 평가 이전에 내 시적 태도요 고집이다..... 두 권의 시집만 더 내고 절필하고 싶다. 일생 써 온 시니 절필하고서도 시가 써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쓰면 써지는대로 발표치 않고 그냥 그대로 둘 것이다.
○작가 소개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하여 1963년 《현대문학》 1회 추천 등단했다.
1990년 대만정치대학 한문조 1년간 교환교수와 성균관대학교 시학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시집으로 《사행시초》, (1974), 《사행시초.2》, (2015), 《마추픽추》(2014), 《바이칼》,(2009), 《백야》,(2020)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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