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헤르만 헤세/ 전영애 역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내가 너무 많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너무 잘 연기하는 것과
또 나와 남들을 너무 잘
기만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 그 어떤 작은 움직임도
그안에 유희와 의도가 없는
그어떤 고통도 나를 동요하게 하지 않는다.
나 이제 이걸, 나의 비참이라 일컬어야 하리.
나 자신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모든 맥박을 미리 알아 버려, 이제
어떤 꿈의 무의식의 경고도
어떤 흥취도 어떤 고통의 예감도
더이상 내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것
늦은 시험
또다시 인생의 광야에서 나를 낚아 채어
운명은 모질게 좁은 곳으로 밀쳐 넣는다
어둠과 혼잡 속에서
내게 시험과 곤궁을 주려 한다
겉보기에는 오래전에 도달한 모든 것
휴식, 지혜, 노년의 평화
후회없는 삶의 고해-
그것이 정말로 내게 주어진 것이었을까?
아, 그건 저 행복으로부터
들고 있던 내 두 손에서 쳐내어 떨쳐졌다
재산에 재산, 조각에 조각
명랑한 나날은 끝났다.
세상은 사금파리 산과 폐허더미가 되고
내 인생도 그렇게 되었다
울며 몸을 맡기고 싶다.
만약 내게 이 반항이 없다면
나를 버티고 나를 지키려는,
영혼의 바닥에 놓인 이 반항이 없다면
나를 괴롭히는 것이 반드시
밝음 속으로 나오리라는이 믿음이 없다면.
어떤 시인들의 이 분별없이 질긴
어린아이 같은 믿음,
모든 지옥 위 높이 떠 있는
꺼지지 않는영원한 빛에의 믿음이 없다면.
밤에
생각으로 잠이 깨어 버렸다,
지금 배 한 척이 서늘한 밤을 뚫고 간다는 생각.
그에의 뜨거운 그리움이 나를 소모시키는,
바다들을 찾으며 물가로 달리고 있다는 생각.
지금 어떤 뱃사람도 모르는 곳에서,
붉은 북극광이 보이지 않게 불타고 있다는 생각.
지금 아름다운 이국 여인의 팔이
사랑을 찾으며 베개에 하얗고 따뜻하게 눌린다는 생각.
내 친구로 정해진 한 사람이,
지금 멀리 바다에서 어두운 임종을 맞고 있다는 생각.
나를 안 적이 없는 우리 어머니가
지금 어쩌면 잠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
- 《헤르만 헤세 대표시선》,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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