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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모저모

여기와 거기

금동원(琴東媛) 2014. 10. 25. 02:30

<시인의 말>

 

여기와 거기

 

김혜순

 

 

학생들이 이 시 참 좋습니다, 라고 하면, 왜 좋으냐고 물어 볼 때가 있다.

학생들은 대답한다.

시인이 솔직합니다. 자기 경험을 말합니다.

그러면 쪼다는 학생에게 되묻는다.

그 시인이 솔직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남의 경험을 듣고 자기 경험처럼 정렬한 것은 아닌지

시보다는 수기를 쓰는게 낫지 않은지

자서전, 전기, 역사 중에 가장 허황한 쟝르는 무엇인지

(쪼다는 자신의 인생을 재료로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서전에 쓰인 내용은 그의 실재일까, 아니면 그의 희망일까?)

시에서나 자서전에서 '나는 솔직하다'는 위선을 머플러처럼 두르고, 시적 자아를 조작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 많은 고백을 갈무리해서 서사를 꾸며낼 수 있단 말인가?)

쪼다는 자꾸만 물어본다.

우리는 묻고 대답하면서 '시'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문학은 본래적으로 솔직하지 않다.

시는 언어의 관습적인 사용에 대한 거짓말이며

소설은 현실의 관습적인 사용에 대한 거짓말이다.

시는 시적화자가 일상적인 자아와 한 몸임을 잊을 때.

그 일상적인 자아의 내장을 베어 냄새를 흩뿌릴 때.

(마치 몽골의 유목민 아내가 양을 잡은 다음

대장에 남은 똥을 나뭇가지 곁에 흩뿌릴 때처럼)

 

구축된 건축물이 말(언어) 아래에서 올라 올 때, 그러나 구축이 곧 파괴일 때.

그 건축물이 처음 본 세계를 그릴 때.

 

여기가 아닌 곳을 향해 한쪽 팔을 뻗칠 때,

여기가 아닌 곳에 닿은 한 쪽 팔이 기형으로 오그라들 때.

 

그것을 시라고 불러봐야 하지 않을까.

 

솔직하기 보다는 시인이 감수성으로 저 광활한 우주에 먹힐 때.

인생이 연결 고리에 주르르 꿰어지지 않을 때.

정신박약아들을 방문하고 나왔을 때처럼 개인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의미가

증발해버렸다고 느껴졌을 때.

개를 끌고 길거리에 무료히 앉은 아이가 세상 전부를 봐 버린 그 순간, 그

막역한 느낌처럼.

 

도대체 우리의 일상적 자아도 아닌 시적 자아가 무엇이 가치가 있고,

무엇이 가치가 없으며, 무엇이 솔직하고, 무엇이 솔직하지 않은지 어떻게 편가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시인 자신과 성격, 견해를 집필해나가면서 시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망각의 기계를 전속력으로 돌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바퀴살처럼

가운데 두어보는 행위다. 실용적인 잣대로 판단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의 재료로

삼을 수도 없는 부재를 생산하는 행위다.

 

김혜순/ 시인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michaux@hanmail.net

 

2014 가을호 <시와 세계>

소시집-이 시인을 읽는다 에서 발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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