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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이모저모

Splendor in the Grass(William Wordsworth )

금동원(琴東媛) 2014. 10. 25. 02:42

 

 

Splendor in the Grass

/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하리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 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이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 주는 세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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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영국 시인 | 브리태니커

 

 

1770. 4. 7 잉글랜드 컴벌랜드 코커머스~ 1850. 4. 23 웨스트모얼랜드 그래스미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개요

 

1843~50년 계관시인을 지냈다. 테일러 콜리지와 공저한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1798)은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교육과 초기여행

 

  워즈워스는 존 워즈워스(후에 론즈데일 백작이 된 제임스 로더 경의 업무 대리인)의 둘째 아들로 잉글랜드 북부의 호수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앤은 인접한 펜리스의 직물상인 윌리엄 쿡슨의 딸이었다. 워즈워스가는 본래 요크셔 가문으로 시인의 할아버지는 컴벌랜드로 이주해온 첫 세대였다. 존과 앤 워즈워스 부부는 다섯 자녀(리처드·윌리엄·도로시·존·크리스토퍼)를 두었다. 윌리엄이 8세 때 어머니가 죽었고 그후 5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었으며 남긴 유산은 간신히 교육비를 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때 아버지의 고용주인 제임스 로더 경으로부터 약 5,000파운드의 받을 돈이 있었으나 1802년이 되어서야 로더 경의 후계자가 이 돈을 갚았다. 윌리엄 형제 자매들은 두 외삼촌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후에 윌리엄과 크리스토퍼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다닐 때 학비를 대주었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그보다 앞서 웨스트모얼랜드의 윈더미어 부근 혹스헤드에 있는 명문 그래머 스쿨을 기숙생으로 다녔으며, 이 기간을 '멋진 파종기'라고 불렀다. 그 학교의 젊은 교장이었던 윌리엄 테일러를 통해 18세기 초반의 명시와 최근의 시들을 알게 되었다. 이런 학교 교육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에스트웨이트 계곡과 그 주위의 초원지대였다. 바로 이곳에서 자연은 그의 교육을 이끌어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자신이 애정을 쏟아부은 여동생 도로시와 떨어진 채 황금 제일주의자들인 펜리스 친척들의 냉대 속에서, 그는 가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자연에서 발견했고 어린 나이에 '고독의 자족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워즈워스는 1787년 10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이것은 그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 있던 외삼촌 윌리엄 쿡슨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윌리엄 역시 특별연구원직을 취득하고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성격이 거칠고 의지가 강한 북부 청년 워즈워스는 자기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워즈워스의 학업 성적은 보통 정도였으므로 특별연구원이나 성직자가 될 수 없었다. 워즈워스는 편협한 교과과정, 경직되고 세속적이고 복잡한 그곳의 지적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는 친구들과 아주 기분에 맞는 '어슬렁거림'에 탐닉해 있었지만, 내적 자아는 고상한 고독의 분위기가 '속이 빈 요란함이나 피상적인 오락'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였던 외삼촌들은 그가 돈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워즈워스가 특별우등과정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특별연구원이 될 기회를 포기했을 때 분노했다. 워즈워스는 결국 1791년 1월 보통 학위를 받았다.

 

  워즈워스가 자신이 '시에 바쳐진 영혼'의 운명을 예감한 것은 1788년 마을의 무도회장에서 혹스헤드로 돌아오다가 본 한여름 새벽의 '잊지 못할 장관'에 의해서였다. 후에 발표된 워즈워스의 첫 장시 〈저녁 산책 An Evening Walk〉(1793)은 이 시기에 씌어졌다. 1790년 워즈워스는 한 친구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독일을 도보로 여행했는데 이 체험은 〈풍경 소묘 Descriptive Sketches〉(1793)에 칭송되어 있다. 1년 뒤 워즈워스는 장래의 교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구실로 다시 프랑스에 갔다. 그곳에서 1년을 보냈는데 이 체류는 그의 보호자들이 생각한 것과 다른 면에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갖고 있던 공화주의에 대한 공감이 후에 공화국 군대의 장군이 된 미셸 드 부퓌와 나눈 우정으로 새롭게 강화되었고,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캐롤라인이라는 딸까지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정치단체인 지롱드당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이나 아네트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자금부족과 외국에 더 오래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외삼촌들 때문에 포기되었다. 1792년 12월 워즈워스는 마지못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뒤 '가혹한 숙명'을 신의 섭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2개월도 채 못 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1802년 일시적인 중단을 제외하고 20년 이상이나 전쟁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795년말까지 3년간은 워즈워스의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그의 충성심과 애정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아무런 가망 없이 둘로 나누어져 있었고, 안정된 가정과 생계수단도 없었으며 보호자들의 냉대를 받았고,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진정한 소명의식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저작은 높은 인류애, 전쟁과 모든 부정에 대한 반대로 워즈워스에게 큰 매력을 주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순리성(純理性)은 워즈워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본능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워즈워스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마력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공화국과 싸운 자신의 조국 영국을 용서하고, 아네트와의 현명하지 못한 사랑에 빠져들어간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복한 과거와 영국의 전원(田園)과의 유대를 새롭게 해야만 했다.

 

웨스트컨트리 시절

 

  한 친구가 남긴 유산의 도움으로 1795년 10월 워즈워스와 그의 여동생은 함께 가정을 꾸리려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싯에 있는 레이스다운라지에 정착했다. 벽지에서 도로시와 함께 지내면서 워즈워스는 예전의 조용한 명상과 회상의 습관을 되찾았다. 레이스다운에 있는 동안 워즈워스는 그의 유일한 희곡인 무운시격 비극 〈변경의 사람들 The Borderers〉을 썼다. 웨스트컨트리에 살게 되면서 워즈워스는 브리스틀에 살고 있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교제하게 되었고, 이들의 친분관계는 우정관계로 성숙되어 문인들의 전기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신적 유대관계를 이루었으며 여동생 도로시의 이름과 그들의 이름을 묶어놓았다. 그들의 성질은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콜리지는 격렬하고, 활기에 넘치고, 밝고,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 있었고, 워즈워스는 진지하고 내향적·내성적이며 신중했다. 도로시를 동반한 그들의 산책과 담화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했다. 이 세 비범한 인물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콜리지가 서머싯에 있는 네더스터이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을 때 워즈워스 남매도 그곳에 와서 바로 알폭스던(지금은 알폭스턴이라고 씀) 파크에서 살도록 설득했다. 콴턱 구릉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알폭스던 파크는 경관이 웅장하고 세상으로부터 낭만적으로 격리되어 있어 완전한 인간관계와 새로운 시파의 탄생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되었다.

 

  1798년 <서정 민요집> 이 익명으로 발표되었다. 그 중 4편을 제외한 모든 시를 워즈워스가 썼으며 콜리지의 주요한 기여는 그 책에 첫 작품으로 실려 있는 〈노수부의 노래 The Rime of Ancient Mariner〉였다. 역사상 영시의 전환점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서정 민요집〉은 거의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워즈워스가 예상했던 대로 많은 독자들이 〈사이먼 리 Simon Lee〉·〈백치 소년 The Idiot Boy〉 같은 시에 대해서 분노를 표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노수부의 노래〉의 탁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워즈워스의 무운시 〈틴턴 수도원을 거슬러 수마일 지점에서 Lines Written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는 진부한 시어를 완전히 벗어나 열정적이고 근엄하고 순수한 시로 인정받았다.

 

  2권으로 된 〈서정 민요집〉의 2번째 증보판은 1801년 1월 워즈워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발행연도는 1800년으로 기록됨). 그러나 콜리지의 시들도 전부 그대로 실렸으며 〈사랑 Love〉이라는 그의 시가 첨가되기까지 했다. 콜리지는 자신의 친구를 부각시키기 위해 표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2판에는 중요한 해설이 실린 〈서문 Paace〉이 실려 있었다. 실제로는 워즈워스가 썼지만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반은 콜리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콜리지는 '워즈워스와 끝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다'. 몇 년 뒤 〈문학적 자서전 Biographia Literaria〉에서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일부 이론과 그 이론을 구체화한 몇몇 시편에 대한 반대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그 〈서문〉은 콜리지도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즈워스는 시의 본질에 관해 상술하거나 시작(詩作)과정을 묘사할 때, 그리고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밝힐 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그뒤에 시와 시인에 관한 다른 의견을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워즈워스의 설명은 시대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영원한 진리와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시는 모든 글 중 가장 철학적이며……시의 목적은 열정으로 진리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또한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연적인 유출이며 평정 속에서 떠오르는 감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워즈워스와 그의 누이동생은 콜리지와 함께 1798~99년 겨울을 독일에서 보냈다. 이것은 원래 독일어를 배우고자 했던 콜리지의 생각이었다. 그는 독일어를 배우는 데 성공했지만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고슬라라는 먼 작은 도시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해 〈콜리지에게 바치는 시 Poem to Coleridge〉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격리상태를 활용했다. 이것은 워즈워스 자신의 시심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결국 후에 〈서곡(序曲) The Prelude〉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여러 편의 회고록과 서정시들을 썼다. 〈루시 Lucy〉 시리즈와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곳에 살았네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내가 겪은 이상한 열정들 Strange Fits of Passion Have I Known〉·〈선잠이 나의 영혼을 봉해버렸다오 A Slumber Did My Spirit Seal〉·〈3년간 그녀는 태양과 소나기 속에서 자랐네 Three Years She Grew in Sun and Shower〉 등이 그의 가장 섬세한 서정시에 속하는 것이었다. '루시'가 누구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콜리지의 생각처럼 도로시가 죽는다면 자신이 겪게 될 상황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일부 내용이 유래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워즈워스의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2년 뒤에 쓴 〈나는 낯선 사람들 사이를 여행했네 I Travelled Among Unknown Men〉는 이 〈루시〉 시리즈와 유사한데 워즈워스가 이전에는 프랑스에 동조했지만, 망명생활을 통해 진정 영국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레이크디스트릭트 시절

 

 1799년 12월 21일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레이크디스트릭트로 돌아와 웨스트모얼랜드 그래스미어에 있는 도브 카티지를 구입했다. 그후 1802년 10월 워즈워스는 자신의 신부를 그래스미어로 데려왔는데 그녀는 메리 허친슨으로 학창시절의 친구이자 그를 사랑하는 숭배자였으며 도로시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 도브 카티지에서 그들의 세 자녀가 태어났다. 이곳 생활은 평범한 삶과 숭고한 사색 및 산책·담화·독서·시작·손님접대 등 일상의 순환이었다. 도로시의 아름다운 〈그래스미어 일기 Grasmere Journal〉에는 이 생활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평가들은 대략 이 시기(1796~1806)를 워즈워스의 '위대한 10년'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그의 걸작들은 거의 모두 〈서곡〉과 〈영혼불멸송 Ode:Intimations of Immortality〉이 완성된 시기(1805~06)에 씌어졌다. 그러나 그후 워즈워스는 〈서곡〉을 크게 수정했으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인 1850년에 발표되었다.

 

  1808년 워즈워스는 그래스미어에 있는 집이 늘어나는 가족에 비해 협소했으므로 앨런뱅크로 이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1811년까지 지내다가 그래스미어 목사관에서 잠시 체류한 후 라이덜마운트에 자리를 잡았는데 워즈워스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시 창작력이 왜 쇠퇴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를 단념하고 아네트를 마음에서 몰아내고 정착하여 점차적으로 영국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자신의 상상력도 억누르게 되었음을 시사해왔다. 그러나 모든 희화화처럼 이런 생각은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다. 워즈워스가 주장했듯이 변한 것은 그가 아니라 사회였다. 그가 프랑스를 단념한 것은 프랑스인들이 '차례로 압제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를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아네트를 포기하지 않았다.

 

  워즈워스는 아네트와 딸을 부양하기 위해 양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는 메리 허친슨과 결혼하기 전 1802년 그들을 만나러 갔는데, 이 방문은 잠깐 동안 효력을 발휘했던 아미앵 평화조약에 의해 가능했다. 보수적이 되었다는 학설에 관해서는 워즈워스가 노령에 이르도록 살았으며 그가 누리던 영감은 청소년 시절 및 활발한 감각에 연관되어 있던 만큼, 중년이 지난 후 오래도록 그대로 존속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워즈워스 자신도 1805년 또는 그 전에도 자신의 상상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 그의 가장 위대한 단시 〈영혼불멸송〉은 '환상의 빛'이 사라져가는 것을 애도한 시이다. "내가 보아왔던 것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네." 1813년 워즈워스는 웨스트모얼랜드 지방 우표 배급직을 수락했는데 이것은 연봉 400파운드의 봉급을 받는 한직이었다. 1814년 〈소요 The Excursion〉를 비롯해 계속해서 많은 양의 시를 발표했으나 오직 가끔씩 초기 작품의 독특한 영감을 되찾을 뿐이었다. 1843년 친구인 로버트 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고 7년 뒤 죽었다.

 

  B. Wille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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