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 이전의 침묵
페레 포르타베야 감독
The Silence Before Bach, 2007
크리스티안 아타나시우, 페오도르 아킨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은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 다큐가 교차해서 나오면서 바흐의 음악이 만들어지고 세상에 알려져 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바흐의 <D장조 트리오 소나타>가 작곡되기 이전에도 이 세상은 존재했다. <A단조 파르티타> 이전에도 그랬다. 그러나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을까? 아무런 울림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을 뿐이다. 무지한 악기들로 꽉 찬.... 아직 <음악의 헌정>과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건반을 거치지 않은.”
영화에 나오는 이 대사는 왜 이 영화의 제목을 <바흐 이전의 침묵>이라고 붙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바흐 이전에도 물론 음악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정한 음악은 바흐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이전의 작곡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바흐가 서양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바흐(Bach)'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시냇물’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베토벤이 “그는 시냇물(Bach)이 아니라 바다(Meer)다.”라고 했다는 말이 유명하다. 이 말처럼 바흐는 서양음악의 다양한 지류의 근원에 위치한 거대한 음악의 발원지였다. 하지만 정작 바흐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바흐 이전의 침묵>은 드라마틱한 에피소드와 다큐멘터리가 교차해서 나오는 매우 독특한 구성의 영화이다. 영화는 바흐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어떤 계기로 그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의 음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드라마와 다큐가 뒤섞여 있고, 가끔 얼핏 이해되지 않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나와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중간 중간 삽입된 주옥같은 바흐의 음악들은 이 모든 혼란들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영화는 시작부터가 독특하다. 첫 장면의 주인공은 연주자가 없는 자동 피아노다. 자동피아노가 혼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다. 자동 피아노는 인간의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기계이다. 어떻게 기계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가 객관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반악기는 하프시코드였다. 요즘은 바흐의 건반 음악을 피아노로 많이 치지만 피아노가 나오기 전인 바흐 시대에는 모두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역시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 그런데 이 하프시코드라는 악기 자체가 도대체가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는 악기이다. 하프시코드는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가 불가능하다. 피아노처럼 풍부한 잔향도 없고, 셈, 여림을 표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건반악기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하프시코드가 피아노에게 그 영광된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바흐 시대에 사용되었던 하프시코드
이런 악기를 위해 작곡을 했기 때문인지 바흐의 악보에는 레가토나 여리게, 세게, 점점 크게, 점점 여리게, 점점 느리게 등과 같은 악상기호가 전혀 없다. 그래서 참 심심하다.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은 악보에서부터 벌써 그 황폐함과 무미건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흐의 음악은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는, 비개성적이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영화에서 이 곡을 자동피아노가 연주하도록 한 것은 이런 바흐 음악의 객관적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자동피아노가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나면, 이번에는 화면에 인간이 등장한다. 바흐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다. 바흐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은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피아노 조율사는 바흐 음악의 연주를 위해 피아노를 조율하고, 트럭 운전사는 취미로 틈틈이 바흐의 실내악을 연주하며, 또 다른 트럭 운전사는 하모니카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한다.
그런 다음 드라마가 나온다.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수 세기 전, 바흐가 살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하고 있는 바흐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성가대 지휘자, 음악학교 교사, 교회 행정 업무 담당자로서 일인다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바흐의 바쁜 일상을 보여준다. 파이프 오르간으로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한 바흐가 이번에는 카피스트(악보 필경사)들이 일하고 있는 방으로 내려간다. 방에서는 사람들이 열심히 바흐의 악보를 베끼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바흐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제23번 변주곡을 들려주고,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 찬사를 보낸다.
바흐는 예배 때마다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위해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써 내려갔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흐는 교회의 음악 책임자로서 열심히 일했다. 작곡은 그에게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고단한 노동이었다. 왜냐하면 예배 때마다 새로운 곡을 연주해야 했고, 성탄절이나 부활절, 수난주간과 같은 절기에는 그에 맞는 대작을 또 작곡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흐는 요즘 우리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듯 머릿속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뽑아내야만 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수가 1000곡이 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장면은 다시 바뀌어 오늘날의 라이프치히이다. 관광 가이드가 바흐와 똑같은 가발을 쓰고 관광객들에게 바흐의 삶에 대해 설명한다. 라이프치히는 바흐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삶의 궤적을 따라 이곳을 찾는다. 유람선을 타고 도시를 둘러보는 관광객들 눈에 오래된 성이 들어온다. 안내원이 “이 성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올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 성은 바흐에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의뢰했던 백작이 살던 성으로 여기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탄생에 얽힌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이 성에 살던 카이제를링크 백작은 러시아 대사였는데,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골드베르크라는 하프시코드 주자를 고용해 밤마다 그에게 연주를 하도록 했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작은 바흐에게 자기의 불면증을 고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백작은 이 곡을 매우 좋아해서 밤마다 골드베르크에게 “나의 변주곡을 연주해주게”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백작이 바흐의 음악과 골드베르크의 연주에 무척 만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바흐의 대표작으로 영화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첫 장면에서는 자동피아노가 느리고 아름다운 주제 선율과 폭발적인 악센트를 자랑하는 제1변주를 들려준다. 그리고 바흐의 일상을 담은 드라마에서는 바흐가 카피스트들 앞에서 빠른 템포로 건반을 종횡무진 질주하는 제23변주를 연주한다.
영화에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눈과 귀로 바흐의 음악을 ‘체험’하게 한다.
그러다가 피아노가 슬로 모션으로 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피아노의 몰락일까. 아니다. 그 다음에 수십 대의 피아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악기점에 진열된 수십 대의 피아노 앞에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앉아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들이 연주하는 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에서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서정성을 자랑하는 제7변주이다.
그런 다음 음악은 제28변주로 이어진다. 이 곡은 매우 빠르고 역동적인 곡이다. 너무나 빨라서 피아노에 마치 자동 모터를 달아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역동적인 리듬에 실려 말이 달린다. 말리 달리는 템포와 음악의 템포가 절묘하게 일치한다. 장황한 설명이 아닌, 눈과 귀로 바흐 음악의 역동성을 ‘체험’하도록 하는 영상이다.
이런 독특한 ‘바흐 체험’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후 보다 대담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번에 동원된 악기는 피아노가 아니라 첼로이다. 수십 명의 첼리스트들이 지하철을 타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전주곡을 일제히 연주한다. 본래 혼자 연주하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여러 명이서, 그것도 지하철이라는 복잡한 공간에서 연주한다. 지하철의 소음과 함께 울려 퍼지는 바흐의 첼로 모음곡.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바흐 음악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런 다음 화면은 또다시 드라마로 돌아간다. 바흐는 두 번의 결혼으로 스무 명의 자식을 얻었다. 이런 대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끊임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녀들의 음악교육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집안은 200년 동안 음악가를 여러 명 배출시킨 유명한 음악 가문이었는데, 바흐의 아들 중에도 음악가가 나왔다. 영화에는 어린 아들 크리스토퍼 프리드리히가 아버지 앞에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번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흐는 어린 아들에게 자상하게 음악을 가르쳐주고, 그 자신은 <푸가>의 24번을 연주한다.
이렇게 성실하게 일했으나 주변 사람은 물론 바흐 자신조차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 알지 못했다. 바흐가 죽고 나서 그의 음악은 잊혔다. 그의 음악은 예배에 필요한 실용음악이었고, 그 당시에는 음악을 보존한다거나 악보를 보관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종이가 귀한 시대였기 때문에 한번 연주된 악보는 포장지로 팔려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흐의 위대한 작품이 이때 포장지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바흐는 음악사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런데 바흐가 죽은 후 80여 년이 흐른 후, 음악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하인이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 왔는데, 그 고기를 싼 포장지가 바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마태 수난곡>은 바흐가 살아 있을 때 수난주간에 한 번 교회에서 연주된 후 잊혀진 곡이었다. 바흐의 아내였던 안나 막달레나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연주된 후 그냥 사장되고 말았다.
멘델스존의 <마태 수난곡> 발견은 음악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작품이 탄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후, 우연한 기회에 이 곡의 악보가 멘델스존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위대한 바흐의 음악을 알리기 위한 신의 계시였을까. <마태 수난곡>의 발견은 음악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멘델스존은 1829년 3월 11일,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에서 성 토마스 교회에서의 초연 이후 한 번도 연주되지 않았던 <마태 수난곡>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마태 수난곡>을 듣고 사람들은 놀랐다. 세상에 이렇게 위대한 작품이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놀라웠지만, 하마터면 정육점의 포장지로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마태 수난곡>은 바흐 부활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바흐 음악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때 그에게 부여된 위대한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영화의 끝머리에 또다시 자동피아노가 등장한다. 이번에 연주하는 곡은 <환상곡과 푸가> g단조인데, 화면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자동피아노 악보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흰 종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악보의 모양은 놀랍게도 바흐 음악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정한 패턴으로 흘러가는 음악처럼 종이 위에 뚫려 있는 구멍들 역시 일정한 패턴의 무늬를 이룬다. 일정한 패턴의 반복, 같은 음형으로 상승했다가 하강하는 소리의 굴곡을 종이 위의 구멍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악보의 모양에서 보듯이 바흐의 음악은 견고한 구성과 형식미를 자랑하는 장엄한 건축물과 같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음들을 구축해 나가지만, 그렇게 아카데믹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음악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바로 여기에 바흐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8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성 토마스 교회 합창단
성 토마스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바흐의 위대한 예술혼은 오늘날 8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성 토마스 교회와 합창단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들은 바흐 시대의 전통을 굳건히 지키면서도 음악의 현대적인 수용에도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 성 토마스 합창단 지휘자가 바흐가 연주했던 바로 그 오르간으로 연주하는 곡이 바흐의 곡이 아닌 현대음악 작곡가 리게티의 곡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계속 바흐의 음악만 들려주다가 후반부에 마치 거대한 음향 실험과 같은 리게티의 오르간곡을 들려줌으로써 바흐로 상징되는 성 토마스 교회의 예술 정신이 과거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게티의 음악 못지않게 바흐의 음악 역시 현대적이다. 마지막에 성 토마스 합창단이 부르는 <마니피카트( Magnificat)> BWV.243 중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Fecit potentiam)’는 바흐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를 절감하게 해준다. 이 활기찬 합창곡은 균형 잡힌 구성과 단순 명료한 음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는다. 바흐 음악은 결코 ‘지나간’ 음악이 아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용한 ‘당대의(contemporary)' 음악이다.
글 진회숙 (음악 칼럼니스트)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음악의 선율>영화 속 클래식 2012.12.06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76&contents_id=17097
'문화예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ARARIO GALLERY (0) | 2015.01.16 |
---|---|
세바스치앙 살가두(GENESIS) (0) | 2015.01.13 |
풍자 일러스트 파웰 쿠친스키(Pawel Kuczynski) (0) | 2014.12.22 |
이명호 사진작가 (0) | 2014.10.31 |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 (0) | 2014.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