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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산책

프리다 칼로(1907~1954)

금동원(琴東媛) 2015. 3. 24. 23:01

 

프리다 칼로(1907~1954)

멕시코 화가

 

 

1929.8 일생의 연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에게 있어서 디에고 리베라는 배우자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에게 그는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이자 증오였으며 기쁨이자 지극한 고통이었고 갈망이자 짐, 희망이자 절망, 연인이자 적이었다.

리베라와의 결혼은 운명이고 필연이었지만, 그것이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리베라는 결혼생활 동안 칼로의 삶 전체를 지배했고, 고독과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칼로에게 화가로서, 혁명가로서의 인생도 함께 주었다.

코요아칸의 총명한 소녀에게 닥친 너무나 가혹한 사고

칼로는 1907년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 빌헬름 칼로(기예르모 칼로)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메스티조)인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세 살이 되던 해인 1910년 멕시코에서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보다 7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디아스 독재정권의 지나친 노동자와 농민 착취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칼로가 성장하던 시기는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칼로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자랐다. 그녀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에 진학했는데 이 학교에서 여학생은 전교생 2000명 중 35명에 불과했다. 그녀는 생물학, 해부학 등을 공부해 장차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렇다고 칼로가 공부벌레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카추차라는 학생 클럽에 가입하여 동료들과 청춘을 만끽하고 있었다. 클럽 내에서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첫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칼로는 이 학교에 다닐 때 강당에 벽화를 그리러 온 리베라를 처음 본다. 당시 리베라는 멕시코와 혁명을 대표하는 미술가라는 명성과 함께 분방한 여성편력과 돌발적이고 기괴한 행동으로 인해 식인귀라는 악명도 함께 드날리고 있었다. 그림에 관심은 있었지만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던 칼로에게 리베라는 자신의 인생과는 무관한 그저 괴팍한 예술가였을 뿐이었다.

칼로가 18살이던 1925년 9월에 일어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멕시코의 진보적인 여성 의사로 인생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운명은 계획한대로 그녀의 삶을 이끌지 않았다. 하굣길에 오른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면서 칼로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 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의사들은 아무도 그녀가 다시 걸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칼로는 꼬박 9개월을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녀는 이 사고로 자신은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고 표현했다.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는 시간들이 칼로를 덮쳤다.

잔인한 운명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다

칼로의 자화상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부모는 그녀를 위하여 침대의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마련해주었다. 누워서 운신할 수 없었던 칼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칼로는 자화상에 대해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고 말했다.

걷기 위한 수 차례의 수술 끝에 칼로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은 그녀를 평생 동안 괴롭혔다. 척추의 고통은 그녀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하였다.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칼로는 자신의 운명이 그림에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에 그림을 정확히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칼로는 리베라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칼로는 사회주의 사진작가인 티나 모도티를 통해 리베라를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평가 받고 싶어했다.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평했다. 리베라는 화가가 되겠다는 칼로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1929년 8월, 22세의 칼로는 그녀보다 21년 연상인 리베라와 결혼을 했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리베라와 칼로의 결합을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했다. 당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화가의 반열에 올라있던 리베라의 아내로서 칼로는 만족하는 듯이 보였다. 멕시코 공산당 입당과 탈당을 같이 했으며 함께 사회운동에 나섰고 그의 그림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었으며 영감을 주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조용하고 행복한 삶은 칼로와는 먼 것이었다. 이미 수많은 여성편력을 가지고 있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다. 남편 리베라로 인해 칼로는 질투와 분노를 넘어선 고독과 상실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칼로가 그린 결혼식 즈음의 리베라와 칼로(왼쪽)와 두 사람의 실제 모습

칼로는 리베라를 너무나 사랑하였고 리베라 또한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칼로에게 리베라는 인생 전체를 던져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리베라 또한 그녀가 영혼의 반쪽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칼로에게 리베라는 사랑으로 이념으로 영혼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결코 자기 것은 되지 않는 남자였다. 훗날 칼로는 리베라와의 만남을 자신이 10대에 겪은 교통사고에 이은 ‘두 번째 대형사고’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칼로는 리베라의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교통사고로 다친 그녀의 몸은 아이를 품지 못했다. 몇 차례의 유산은 '모성을 가진 여성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해주었다. 리베라와 아이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그림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칼로는 멕시코 전통 속에 고독과 고통을 녹여내어 그 어떤 미술 범주에도 들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일부 유럽의 예술가들은 그녀의 그림을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 걸작이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그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 트로츠키

리베라의 수많은 여성편력을 인내했던 칼로였지만 그녀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리베라의 외도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와의 관계였다. 남편과 여동생으로부터 동시에 배신당한 칼로는 리베라의 성실한 아내 역할을 그만둬 버렸다. 그녀는 남편을 떠나 자유롭게 여행을 하였으며 조각가, 사진작가 등의 애인을 두기도 하였고 동성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였다. 별거하는 동안 칼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가뜩이나 좋지 않은 건강마저도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방황하는 육체에 비해 정신은 더욱 더 리베라에게 집착했다. 리베라를 증오하면서도 떠나지 못했고 사랑하면서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상황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다만 한 순간, 칼로에게 남편 리베라를 대신할 만한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상대는 스탈린에게 쫓겨 멕시코로 망명 온 트로츠키였다. 레닌이 죽은 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던 트로츠키는 1927년 당에서 제명되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전전하고 있던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부른 것은 리베라였다. 리베라는 당시 대통령이던 카르데나스에게 청하여 트로츠키 부부가 멕시코로 망명할 수 있도록 적극 주선하였다. 그리고 트로츠키 부부의 거처로 칼로의 친정집인 ‘푸른집’을 제공했다.

칼로와 트로츠키. 칼로의 오른쪽이 트로츠키. 왼쪽은 트로츠키의 아내이다.

칼로는 트로츠키라는 이 지치지 않는 시대의 혁명가에게 매료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트로츠키 또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강렬한 개성을 가진 칼로에게 이끌렸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연인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단순한 동지애에 그쳤다는 의견도 있다. 그것이 애정이었든 우정이었든, 칼로가 트로츠키에게 선물한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밝고 신선하며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리베라에 얽매여 있었을 때 그린 어두운 분위기의 자화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으로 표현된 칼로의 감정은 분명 연모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1월 망명한 후 ‘푸른집’에 기거하던 트로츠키는 그 해 7월 서둘러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서로에게 끌리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트로츠키의 이성적 판단이었던 것 같다. 1년 후 칼로는 뉴욕과 파리로 전시여행을 떠났고 트로츠키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무너지는 육체, 고통 받는 영혼

1940년 즈음 정원에서 강아지와 함께한 칼로 부부

트로츠키와의 만남 이후 자신에게서 마음이 일시적으로 떠나버렸던 칼로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당시 열애 중이던 미국 여배우와 결합하기 위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칼로를 오래 붙잡고 있던 리베라는 1939년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리베라의 수많은 외도와 배신을 참아가면서도, 자신도 다른 사람과 애정을 나누면서도, 언제까지나 리베라의 곁에 있고 싶어했던 칼로의 바람은 무너졌다. 이혼을 받아들이고 칼로는 분노와 상실감에 피폐해져 갔다. 비록 질투와 배신감에 온 몸을 떤다 하더라도 리베라의 곁이 아니면 자신의 삶은 어둠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즈음 늘 그녀를 괴롭혔던 척추의 고통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대수술을 했지만 그녀의 육체는 계속 무너져 내렸다. 이혼한 지 1년 후 미국에서 수술을 마친 칼로에게 리베라가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경제생활과 성생활을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재결합했다. 리베라와 두 번째 결혼 후의 삶은 겉으로는 비교적 평온했다. 고향 코요아칸에서 앵무새와 원숭이, 개를 기르며 칼로는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림을 계속 그렸고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뉴욕과 파리 전시 이후 국제적으로도, 국내에서도 명성이 쌓여갔다. 리베라의 독특한 아내가 아닌 화가 칼로의 입지도 확고해졌다. 리베라의 외도는 여전했지만 그건 이제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은 육체적 고통이 그녀를 내리 찍어 오로지 자신의 척추와 그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이미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194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칼로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칼로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1948년 멕시코 공산당에 다시 입당한 뒤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말년에 그린 그림들에 표현되었다.

미술관이 된 칼로의 '푸른집'

1953년 멕시코에서는 처음으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리베라와 친구들이 열어준 전시회였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된 칼로는 침대를 그대로 전시회장으로 옮겨 개막식 축하연에 참석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전시회를 보러 온 군중들 앞에서 노래하고 마시며 함께 기뻐했다.

1년 후인 1954년 7월 칼로는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면서 한 달 여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게 먼저 주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칼로는 폐렴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년의 슬픈 생을 마쳤다. 일기 마지막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글로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칼로가 죽고 1년 후 리베라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집’을 나라에 기증했다. 그녀의 집은 이제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어있다.

1954년에 죽은 칼로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었다.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다.

 

글: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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