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지성들의 영혼의 뮤즈
루 살로메
Lou Andreas-Salomé(1861-1937)
니체와 릴케의 연인, 세기적 사상가와 시인의 창작 혼을 자극한 영혼의 뮤즈, 화려한 남성 편력의 팜 파탈,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루 살로메의 모습은 대충 이렇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한 부분일 뿐이다. 루 살로메는 소설과 문학평론을 여러 편 남긴 작가이고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정신분석가로 활약한 여성이다.
본명은 루이즈 폰 살로메. 루이즈는 1861년 2월 12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구스타프 폰 살로메의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살로메 장군은 독일인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독일과 덴마크 혈통을 이어받은 부유한 제당업자의 딸이었다. 루이즈는 차르의 겨울궁전 맞은편에 자리 잡은 장군 참모부 관사에서 동화 속 공주처럼 화려하고 평온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뒷골목에 가난과 질병과 무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루이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신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신이란 존재가 어린 마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첫 저서가 《신을 에워싼 투쟁》인 것은 이런 성장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루 살로메의 생애 첫 전환점은 17살 때 찾아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네덜란드 대사관의 루터 교 목사 헨드리크 길로트와의 만남이었다. 소녀 루이즈는 길로트 목사에게 종교, 철학, 논리학, 형이상학, 인식론, 문학을 배웠고 길로트의 설교문을 대신 쓸 만큼 지식을 쌓았다. 이런 루이즈를 길로트 목사가 사랑하게 되었고 급기야 청혼까지 했다. 길로트는 루이즈와 나이가 비슷한 딸을 둔 기혼남이었다. 길로트를 숭배하던 루이즈는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정신적 사랑과 육적인 사랑 간의 괴리와 갈등이 이때부터 루 살로메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루이즈는 길로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 유학길에 올랐다.
취리히 대학은 유럽에서 최초로 여학생 입학을 허락한 대학이다. 루 살로메는 여기서 비교종교학, 신학, 예술사, 철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훗날 호사가들은 루를 가리켜 ‘인류 최초의 여대생’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루는 이 무렵 철학도 파울 레와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니체를 만났다. 이때 니체의 나이는 38살, 루이즈의 나이는 21살이었다. 루의 지성과 아름다움에 매료된 니체는 두 번이나 청혼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니체와 파울 레 둘 다의 친구로 사귀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열정으로 다가갔던 니체는 루 살로메와 헤어진 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탈고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을 대표하는 이 책이 탄생하는 데 루가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니체의 고백을 들어보자. 니체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 ▲21살 때의 루 살로메, 1882
“이제까지 그 아가씨처럼 재능 있고 사색 깊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 우리는 30분만 함께 있으면 서로 크게 얻는 점이 있으므로 둘 다 행복해집니다. 이 마지막 1년에 내 최대의 저작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루 살로메는 베를린의 지식인 모임에 드나들며 독서와 토론에 열중했다. 모임에서 루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 약간 튀어나온 넓은 이마, 기이할 만큼 빛나는 깊은 눈은 루의 지식에 대한 열정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남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는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왼쪽부터 루 살로메, 파울 레, 프리드리히 니체, 1882
22살이 된 루 살로메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제목은 《신을 에워싼 투쟁》. 신앙과 이성 간의 오랜 갈등을 과감히 다뤘다는 호평이 쏟아졌다. 그 무렵 루는 갑자기 결혼했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젊은 지성인들을 매료시켰으면서도 그들의 구애를 모두 거절하던 루였기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상대는 베를린 동양어연구소의 페르시아어와 터키어 교수 카를 안드레아스. 41살인 안드레아스는 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칼로 자기 가슴을 찔렀고 놀란 루는 그만 결혼을 승낙하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얼마 안 가 루는 이혼을 원했으나 안드레아스는 거절했다. 두 사람은 타협점을 찾았다. 자신에게 아무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로 한 루는 마리라는 하녀를 고용하여 안드레아스의 실제 아내 노릇을 하게 했다. 마리는 아이를 둘 낳았는데, 하나는 어려서 죽고 살아남은 딸 마리헨은 루와 퍽 가까이 지냈다. 루는 죽을 때 마리헨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루 살로메와 안드레아스의 결혼은 43년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루는 언제든 자유롭게 여행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글을 썼다. 소설 《롬》, 《낯선 땅에서》, 《인간의 후예들》, 《중간 지대에서》, 비평서 《헨리크 입센의 여자들 모습》, 《니체의 편지》, 그 밖에 에세이와 논문, 서평 50여 편을 잇달아 발표했다. 루 살로메의 소설은 자전적 색채가 매우 짙다. 《니체의 편지》는 니체 사상 연구에 꼭 필요한 자료로 꼽힌다.
루 살로메가 릴케와 만난 것은 1897년, 루의 나이 36살 때다. 22살 무명시인이었던 릴케는 유부녀임에도 루에게 열렬히 구애를 했다. 처음엔 경계하던 루도 젊은 시인의 정열에 차츰 감동하게 되었다. 루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랫동안 당신의 아내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서 당신은 첫 실재였으며, 당신을 통해 육체와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었으며, 생명 그 자체의 부정할 수 없는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한 말 ‘당신만이 진실입니다’라고 한 바로 그 말을 나도 그대로 당신에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라고 한 것처럼 릴케는 루 살로메에게서 누이이자 연인을 발견한다. 릴케의 문학이 성장하도록 도와준 것도 루이다.
루는 창작뿐 아니라 릴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릴케에게는 루가 여신 같은 존재였다. 루는 그의 신전이었다. 릴케는 연인의 조언을 잘 따랐다. 루는 릴케에게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시인의 본명은 ‘르네 마리아 릴케’였다. ‘르네’라는 이름이 프랑스 식 여자 이름 같다고 해서 루는 ‘르네’를 독일인들이 부르기 쉬운 ‘라이너’로 바꾸어 불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반은 부모가 반은 루 살로메가 이름을 지어준 셈이다. 릴케의 글씨체도 달라졌다. 비스듬히 쓴 듯한 글씨체가 루의 글씨체를 따라 우아하게 바뀌었다. 사랑의 힘은 글씨체도 바꾸게 만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가 클라라 베스트호프라는 조각가와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루 살로메는 ‘내면의 독립성을 얻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릴케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하지만 둘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릴케는 힘들 때마다 루에게 편지를 썼다. 릴케는 루와 이별한 뒤 클라라와의 사이에 딸 루트를 낳았지만 1년이 채 못 가 그들의 결혼생활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한편 루는 자기에게서 버림받은 파울 레가 투신자살하자 무척 상심하여 심장질환을 얻게 된다. 옛 애인인 의사 피넬레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두 사람의 애정 관계가 회복되어 아기를 갖게 된다. 피넬레스는 루에게 청혼하지만 루는 남편과 이혼할 뜻이 없음을 밝힌다. 아이는 유산이 되었고 피넬레스는 루를 떠난 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1926년 릴케는 51세로 세상과 작별했다. 시인의 운명은 생각보다 일찍 저물었다. 흔히들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걸로 알고 있지만 시인의 죽음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물론 가시에 찔려 패혈증을 일으킨 것이 죽음을 재촉하기는 하였다. 릴케는 죽기 2주 전 생의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루에게 보냈고, 임종의 침상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사람도 루였다. “루는 모든 걸 알 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 아마 루는 내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거예요.”
루 살로메에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 눈빛을 꺼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 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 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 제2부에서 (김재혁 역)
루 살로메는 릴케가 일생을 통해 가슴에 안고 산 깊은 불안의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신분석가 루는 이렇게 썼다. “자신의 자아 속에 자기 자신의 성(性)이 생겨나기 이전의 사춘기 소년들에게서 사람들은 때때로 꿈의 불안들과 뒤섞여 있는 고통과 박해의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또 창작욕이 강한 사람들은 에로틱한 사랑의 동반자가 되는 것으로는 확고한 존재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들의 생명력은 ‘현실 속의 동반자’가 아니라 ‘작품 속의 동반자’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루 살로메의 궁극적 관심은 ‘생의 근원’이었다. 루는 문학에서 충분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온 의문, 어린 시절 목사 길로트에게서 비롯된 육체와 정신의 괴리란 의문을 풀어줄 답을 찾고 싶었다. 이 생각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됨으로써 실현된다. 루 살로메는 정신분석에서 삶의 목표를 발견했다. 그때 루의 나이 50살. 루는 성본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한 욕구라고 생각했다. 성적 사랑과 예술적 창조, 종교적 열정은 생명력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고 보았다.
루 살로메는 정신분석가로 일하는 한편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악마와 할머니》라는 7장짜리 시극을 쓴 것도 이즈음 일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정신분석의 ‘산문가’라면, 루는 정신분석의 ‘시인’이라고 했다. 루는 프로이트에게 ‘두려움을 느낄 만한 지성을 갖춘 여자’라고 찬사를 보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1921
루 살로메가 추구한 것은 자아였다. 루는 관습과 도덕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아에 몰두했다. 그랬기에 루의 사랑 법은 동시대 여성들과 아주 달랐다. 남성들은 루의 폭넓은 지식, 작가로서 지닌 재능에 우선 놀라고 이어 그녀의 육신이 내뿜는 매력에 정신없이 사로잡혔다. 하지만 정작 루 자신은 ‘정신의 일치’를 사랑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겼다. 루는 이렇게 말했다. “감각적인 사랑에서 정신적 유대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정신적 흥분에서 육체적 사랑에 이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신이 일치하면 육체관계가 가능하지만 육체관계로부터 정신의 일치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의 남성 편력은 이런 그녀의 사랑 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루 살로메는 일과 사랑을 마음껏 누렸다. 그 대신 비싼 대가를 치렀다. 부도덕한 여자라고 비난했던 생전의 손가락질에서부터 팜 파탈이라고 찍어버리는 현세대의 낙인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루 살로메처럼 기존 도덕과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이 자아를 추구하는 여성들이 두드러지게 등장했다. 구시대의 유산을 거부한 이들은 남성의 전유물이던 학문 세계에 뛰어들거나, 타고난 재능을 살려 예술가가 되거나 했다. 결혼과 관계없는 자유로운 연애는 이들이 기존의 질서에 던지는 도전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루 살로메와 안드레아스의 기이한 결혼생활은 루가 당시의 완강한 관습과 도덕을 피해서 자신의 길을 추구하기 위한 한 가지 타협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루 살로메는 기존 여성상을 과감히 깨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해내진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회개혁운동이나 여성운동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귀족 아닌 서민들의 삶에 눈을 돌려 그들을 이해하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생애 말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녀에겐 걱정거리였을 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였고 ‘자기’로 대표되는 추상적인 ‘인간’이었다. 루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잘라냈다. 뒤이어 안드레아스가 세상을 떠났다. 루는 하인베르크의 집에 머무르면서 회고록 《생애의 회고》를 집필했다. 이것이 그녀가 쓴 마지막 책이다.
1937년 1월, 히틀러의 광기가 독일을 휩쓸고 있을 무렵 루 살로메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화장해서 정원에 뿌려 달라는 그녀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 법률에 사람의 재를 뿌리는 일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루의 유골을 담은 단지는 괴팅겐 시립묘지에 있는 남편 안드레아스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생전에 자유로이 떠돌다가도 남편에게 돌아가곤 한 루는 죽어서도 역시 남편 곁으로 돌아갔다.
루 살로메 -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
프랑수아즈 지루 저
함유선 역
해냄
2006.02.05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완전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여자가 프리드리히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당대의 천재들을 몸서리치게 만들며 그들의 운명을 가로 질러 갔다면 믿을 수 있을까. 러시아에서 태어나 스위스 취리히에서 철학, 신학 ,예술사 등을 두루 섭렵한 루 살로메는 20세기 유럽 지성들을 매혹시킨 전설적인 여인이었다. 긴 다리, 가는 허리, 크고 맑은 눈, 작고 뾰족한 코, 매력적인 입술, 황금빛 긴 머리칼, 넓은 이마. 그러나 가슴은 납작했고 젊은 여인이라기보다 청소년과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던 루는 어떻게 당대의 사내들을 사로잡았을까.
언론인 출신으로 프랑스 최초의 여성 장관을 지낸 프랑수아즈 지루는 루 살로메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자유를 향한 한 영혼의 고투라는 시각에서 재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적이 없는 임신과 유산, 근친상간이라는 미스터리에도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니체, 릴케, 프로이트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덧붙여 그들이 나눈 영혼의 교류를 엿보게 한다. 과연 루의 매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예컨대 페미니즘의 선봉에 있었던 시몬 드 보부아르나 시몬 베유가 존재 의미를 자신의 작품이나 활동에 몽땅 바쳤다면 루는 우선 자신에게서 그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루 살로메는 존경받는 작가였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인간이었으며, 남성이나 가족의 굴레에 연연하지 않은데다 온전히 자신의 창작 활동을 통해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자유로운 영혼에 걸맞은 자유로운 현실까지 쟁취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랑수아즈 지루가 19세기 말이라는 역사의 격동기에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한 자유인으로 루 살로메를 평가하는 이유다. 저자가 "그녀의 걸작은 그녀 자신이다"라고 쓴 것처럼.
출처 : 네이버캐스트>기획물 전체>인물과 역사>인물세계사 2010.09.14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5&contents_id=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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