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글쓴이/ 이권우(도서평론가)
화이트헤드가 일갈했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이 말에 동의하는 이라면, 다음의 말에도 고개를 주억거릴 터다. 무릇 빼어난 여행서 역시 먼저 나온 여행서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 애써 찾아간 곳에 사는 이들은 그곳에 대해 심드렁하다. 너무 익숙해 그곳에 배어 있는 가치를 모른다. 자고로 그곳에 사는 이가 쓴 여행서는 없는 법이다. 낯선 눈으로, 집요한 눈으로, 황홀한 눈으로 바라본 이만이 여행지의 가치를 찾아낸다. 그러나 여행자는 오래 머물지 못한다. 다시 짐을 꾸려 다른 곳으로 가거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다녀온 이가 쓴 책이 흠 없을 리 없다. 여행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다른 이의 여행서에 기꺼이 영향 받으려 하고, 그 글에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을 메우려 할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여행의 기술>은 목차가 ‘출발’에서 시작해 ‘귀환’으로 끝난다. 모든 여행이 그런 것처럼. 그 사이에 ‘동기’ ‘풍경’ ‘예술’이 있다. 이것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행은 유목과 같지만 다르다. 떠나 방황한다는 점에서 유목이지만, 다시 돌아와 현실의 문법대로 산다는 점에서 유목과 다르다. 그런데 왜 여행할까. ‘동기’에 나오는 대로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현실의 삶을 일시 중지하고 전혀 다른 삶의 문맥에 자맥질할 리 없다. 그 이국적 풍경에서 여행자를 사로잡는 것은 숭고함이다. 압도하는 것에 질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감동과 희망을 얻는다. 삶은 이토록 역설이다. 다시 돌아가야 하기에 숭고한 것을 소유하려 한다.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것을 무엇으로? 쓰거나 그리거나,로. 예술이 여행에 틈입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보통은 여행서가 앞선 책들과 그곳의 풍광을 그린 그림에 대한 주석서임을 예민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이미 다녀온 이들의 글과 그림을 참조한다. 그가 호출한 작가들의 면모는 화려하다. ‘출발’에서는 J K 위스망스, 샤를 보들레르, 에드워드 호퍼를 돛으로 삼는다. ‘동기’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참고한다. ‘풍경’에는 윌리엄 워즈워스, 에드먼드 버크, 욥이 등장하고, ‘예술’에는 빈센트 반 고흐, 존 러스킨이 나온다. ‘귀환’에서는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를 닻으로 삼는다. 여행서 쓰기는 높이뛰기가 아니다. 홀로 몸을 날려 인식의 지평을 훌쩍 넘어서는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행서는 장대높이뛰기다. 앞서 다녀온 이들이 남겨놓은 잠언을 장대로 삼아 더 높이 뛰어올라 더 장엄한 것들을 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니 말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여행의 기술>은 여느 여행서와 달리 차례대로 읽어야 한다. 아무데나 펼쳐 읽으면 지은이의 의도를 놓치게 된다. 다 읽고나서 특별히 감흥 있던 부분만 따로 순서와 상관없이 읽으면 좋다. 만약, 이 책을 제목대로, 그러니까 ‘연애의 기술’이라고 할 적에 그 ‘기술’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리라. 이 책에는 여행에 대한 사유의 결정체들이 가득 담겼다. 남는 것은 결국 사진뿐이라 여기는 이는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여행이 더 깊은 사유를 자극하는 것이라 믿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토록 진지하면서도 짓궂고, 깊으면서도 가벼운 것들을 공감 가는 글로 쓴 여행서는 드물다. 그러니, 연필을 들고 읽을 것. 글귀에 줄을 긋고, 빈 곳에 자신의 말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절로 일어날 터이니.
‘출발’에서는 보통의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여행을 나서기 전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잘 잡아냈다. 떠나면 행복할 듯싶고, 실제 기쁨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 시간에는 모처럼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들이 형성되고, 불안이 완화된다.” 그러나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지” 않던가. “10분 이상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여행을 꿈꾸는 이는 유혹을 받는다. 위스망스의 말대로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 귓전에 맴돈다. 이름하여 구심(求心)에의 유혹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침내 여행을 떠난다. “그냥 집에 눌러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항공 비행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이름 짓자면 원심(遠心)에의 유혹이 더 힘이 세서 그러하다. 보들레르가 읊지 않았던가.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비행기를 타고 구심의 자장을 벗어날 적에, <장자>에 나오는 물고기 곤이 붕새가 되는 장면을 떠올려 보길. 보잘것없는 것에서 우러러보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는 놀라운 변화! 이륙의 쾌감은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는 원근법의 교훈을 배운다. 아등바등 살아왔건만 구름 위에서 보니 보잘것없는 것일 뿐. 기쁨과 슬픔, 분노와 허탈이 다 소용없어 보이는 탈속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기차 타고 간다면, 생각의 산파와 동행하는 여행이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아무래도 배나 비행기는 단조로운 풍경을 안겨준다. 고여 있다. 기차는 여행자에게 풍요로운 볼거리를 준다. 흘러가면서 보여주는 것들이 변화무쌍하다. 창밖으로 풍경을 보다, 거기에 비친 자신을 보며 삼매경에 빠진다. 보통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이 어려운 관념에 부딪혀 텅 비어버릴 때마다 의식의 흐름은 창밖의 대상에 고정되어 몇 초 동안 그것을 따라간다. 그러다보면 또 새로운 생각의 똬리가 형성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고 말한다.
‘동기’에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공통으로 품음직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만약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 먼 여행을 나서지 않으리라. 먼저, 다른 것을 꿈꿀 터이다. 내가 있는 곳에 없는 것이 거기에 가면 있어 우리는 달려간다. 보통이 적절히 지적했듯, 말들이 뛰어놀 만한 곳에 낙타가 느릿느릿 걷는 장면을 보려 우리는 국경을 넘어선다. 두 번째는 비로소 나와 맞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이다. 전통과 관습이 옭아매고 있다고 느낀다면, 다른 곳으로 달아나 숨통이 트이길 바란다. 플로베르만큼 이국적인 것에 열망이 강한 이가 있었을까 싶다. 프랑스와 그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사춘기 이후로 자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태어난 곳에 충성을 바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회의하곤 했다. 여행은 새로운 국적을 얻는 행위다.
‘풍경’에서는 숭고미를 누릴 수 있다. 경탄할 수밖에 없는 대자연 앞에서 우리는 숭고함을 느낀다. 보통은 시나이 사막에서 체험했다. 자연이 “종교와 시를 잉태”하는 순간을. 자연이 주는 숭고는 심오하다. 그것은 너무 크고, 너무 오래되고, 너무 강렬한 것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과 충돌해 빚어낸 것이다. 도저히 도전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숭배감이 들 적에 숭고미가 퍼져 나온다. 일상의 경험과는 사뭇 다르다. 나보다 강한 것은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압도적인 자연은 우리에게 경외감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감정을 불러올까. 보통은 말한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중략)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우리를 초월한 것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러한 장대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고 돌아올 수 있다.
‘예술’은 더 잘 보고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한다. 여행하며 불현듯 아름다움을 느낀 이들은 안다. 그 아름다움은 여행 안내책에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을, 같이 간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장면이란 것을. 그러니 안달이 날 수밖에. 지금 붙잡아두지 않으면 결국 잊히고 말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어서. 방법이 있을까?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라 귀띔해준다. 찍어온 사진만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이들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듯. 많은 사람이 왜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제 너그러워지길.
이제는 돌아와야 한다. 여행은 떠남과 돌아옴의 진자운동이다. 그래야 두 가지 의미의 신화가 이루어진다. 여행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神話)의 세계다. 그 세계에서 새로워지고 치유받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여행은 늘 신화(新話)를 낳는 법이다. 돌아온 이들을 떠올려 보라. 얼마나 신나게 떠벌이는가를.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 외치지 않던가. 그 진자운동이 어느 날 멈춘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유목이나 정주가 된다. 그러면 신화(神話/新話)의 세계는 무너진다. 삶의 주춧돌이 허물어지는 셈이다. 보통은 ‘귀환’에서 여행에서 돌아온 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말한다. 우리 삶의 주변이 따분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거기에 담긴 가치가 무엇인지 곱씹어 보란다.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넌지시 옆구리를 찌른다.
공항에 가면 여행하는 이들이 무리지어 있는 장면을 본다. 그럴 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저들 가운데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라고. 반론이 있을 터다. 비우기 위해 가는데, 그런 무거운 질문을 할 필요가 있냐고. 장담하건대, 그런 이는 외려 더 큰 마음의 짐을 지고 올 터이다. 어디 가서, 무엇을 보고 마실 것인지보다 왜 떠나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가 돌아올 때 달라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이가 던진 질문이 답으로 가는 길을 열어보여 줄 터이니 말이다. 여행에도 분명히 기술이 있다. 더 싸게 더 많이 더 즐겁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런 것과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자체가 여행의 진정한 기술이다.
[경향신문 2011-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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