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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문학권력(강준만외 지음)

금동원(琴東媛) 2015. 6. 24. 00:29

 

 

 

『문학 권력 』

강준만외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책 소개

 

  "지금 한국 문단이라고 하는 '닫힌 종교'는 속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 그저 자기 패거리 키우기에만 바쁘다. 내가 문학을 아무리 몰라도 나에겐 지금 내가 이 책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수준의 개입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문학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문단이 상식 수준의 과오를 범할 때엔 그 누구건 상식의 힘으로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강준만-
'한국 문학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문학권력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당대의 지적 비판자들, 이 책은 자칫 그들 역시 문학권력로 만들 만큼 절대적인 힘을 품고 있다.

 

두 M신(神)을 섬기는 한국 문학.....27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인가.....53

'제도적 사기 혹은 권위훔치기의 합법화'.....73

문학의 본질은 언론플레이인가?.....97

『창작과 비평』의 절체성과 오만.....125

『문학과 사회』의 오만과 자기도취.....159

이문열과 '침묵의 카르텔'.....195

『문학동네』의 성장 신화를 해부한다.....207

심미적 비평의 파탄.....253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그간, 문학자본의 문제를 포함한 문학권력 논쟁의 와중에서 여러 문인들이 산발적으로 제기해온 비판적 견해들을 정리·종합하는 가운데 저자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미해가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따라서 거대담론적 비판의 '내용'에 주목하기보다는 실천 가능성 없는 '구조 탓하기'에 대한 비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더불어 문학 전체를 현실과 연계시켜 융성토록 하려는, 편협한 분업주의를 넘어선 학제적 상부상조로서의 새로운 시도라는 의미도 갖는다.

  '한국 문학 살리기'를 위한 작업

 

'한국 문학의 위기', 더 나아가 '한국 문학의 죽음'까지 운위되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그 원인의 일단이나마 적극적으로 규명해보려는 노력은 별반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한국 문학판의 기존 문법 속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노력은 격렬한 반발이 아니면 지독스런 냉소에 맞닥뜨릴 뿐이다. 

   저자 강준만은 이 책 역시 대다수 문인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에 부딪칠 것이라고 진단한다. 문단의 썩은 치부를 비판하는 문인들조차도 '밀실'에서나 그럴 뿐 그걸 공개적으로 하라면 "나만 희생양이 되란 말이냐"고 거절한다. 이게 현재 우리 문학판의 '마인드'이니, 이런 종류의 책이 문인 사회 내부에서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 문단 내부의 반성력과 자정능력에 비춰볼 때, 오히려 여기엔 문단에 깊숙이 발을 딛고 있지 않은 국외자(?)의 작업이 더 적실할 수도 있음이다.

  문학·문단 비판에 뛰어든 언론학자의 '개입의 변'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문학은 문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문단이 상식 수준의 과오를 범할 때엔 그 누구건 상식의 힘으로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문학자본과 문학권력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문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끔 돕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인 사랑'이요 '문학 사랑이 될 것이다."

 



  '작가의 사회학'으로서의 문학권력론
이 책은 문학 텍스트 안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론'이 아니다. 즉 '문학권력'의 문제를 매개로 하여 텍스트 생산자인 문인들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구조, 문학 텍스트 유통의 왜곡된 시스템, '문인 신비주의'와 같은 행태론적 문제 등 문학 텍스트 바깥의 세계에 주목한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 환기시키는 까닭은, 있지도 않은 허구를 가지고 소동을 일으키는 '가짜 논쟁'이라는 둥 "문학 텍스트 안으로 들어오라"는 둥 논의의 맥락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엉뚱한 반박들 때문이다. 따라서 "강준만처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의 영역에 함부로 개입하여 먼지와 소음을 일으키는 행태"(-남진우) 운운하는 식의 발언은 졸렬한 '분업주의'이자 '문학특권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니다.

  개 요 

  1. 테마별 비판: 한국 문학의 왜곡된 상업주의의 배경에 놓여 있는 '스타 문인' 시스템을 비판한 두 M신(money, massmedia)을 섬기는 한국 문학, '주례사 비평' 등의 문제를 통해 출판자본의 선전부대로 전락한 비평의 현실을 다룬 평론가는 출판자본의 '파출부'인가?, 나눠먹기식 배분으로 패거리짓기의 수단이 되어버린 문학상 제도 비판 '제도적 사기 혹은 권위훔치기의 합법화', 신문의 출판 지배 현상에서 비롯되는 문언유착과 비평의 악순환을 다룬 문학의 본질은 언론플레이인가?

  2. 문학지 비판: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는 오만한 침묵으로 대응하고 때로 진보상업주의적 탄력성도 마다않는 창비에게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창작과 비평}의 정체성과 오만, 언론개혁 논쟁을 '위선의 게임'으로 바라보는 정도의 극우적 면모까지 보이는 문지의 권력적 욕망과 패권의식을 비판한 {문학과 사회}의 오만과 자기도취, 문단의 스타 시스템과 관련해 출판자본 민음사와 이문열과의 밀월관계가 지닌 의미를 추적한 이문열과 '침묵의 카르텔', 다양성을 빙자한 잡식성 물량공세와 주례비평 행태를 비판한 {문학동네}의 성장 신화를 해부한다

  3. 권성우의 남진우 비판: 심미적 비평의 파탄은 [권성우에게 답함]({황해문화} 겨울호)이라는 남진우 글에 대한 재반론이다. 공저자 권성우는 "문학권력 논쟁의 진정한 의미는 문학장 내에서 비평계의 부정적 관행, 문학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 은폐된 모순, 왜곡된 역학관계 등을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만들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지엽말단적인 것에 대한 소모적 시비를 통해 문학권력 논쟁 자체에 이전투구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칠하는 남진우의 행태를 비판하며, 애초의 논점으로 돌아가 논리적으로 반박해달라고 요청한다. 예컨대, 문학권력 비판자들에 대해 "비판의 숨은 동기들이 적잖이 수상쩍다"거나 "사적 원한" 운운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구체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논리적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이 권력이 되다 

  옥이 | 2012-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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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서슬퍼런 검열이나 문학의 주제와 묘사에 대한 외압을 떠올린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학과 권력이라는 두 키워드가 합쳐진다면, 가장 무난한 상상이 그것일 테니까. 하지만 <문학권력>이 다루는 문학 세계의 권력은 그런 외부세력이 아니다. 엄연히 문학세계 내부에 있으며, 문학계 전체를 아우르고 호령하는 권력이다. 바로 기존 문학인의 권력인 것이다. 문학에의 권력이 아니라 문학의 권력, 문학에서의 권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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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춘문예는 OECD국가 중 오직 한국에만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고 꽤 충격을 받았더랬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것이기에 세계 문학계에서도 일상적인 것이리라 지레짐작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외국에는 따로 등단제도가 없다. 책을 쓰는 사람이 작가고 첫 원고를 탈고해 첫 책을 낸 사람이 신인작가다. 인기 없을 것 같아 출판을 거절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식 작가가 아니니 출판을 해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많은 책을 쓰고 책이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정식 등단하지 않은 이상 문학계에서는 인기 있는 아마추어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한국에서 판타지 소설 분야를 무시할 때 어떤 레퍼토리가 나오는지 보라. 정식 등단하지 않은 작가가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현실적인 가장 큰 원인이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세태라는 지적은 빠뜨려도, 저 레퍼토리가 빠지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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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이 제기하는 문학 권력의 문제는 문학계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미 리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자기 기준에 흡족한 신진을 리그 안에 받아들인다면, 인원이 새로 보충된다 해도 본질은 고인 물이 되어버리기 쉽다. 게다가 무명 문학지에서 많은 신인을 대거 등단시킨 뒤, 등단작이 게재된 문학지를 의무적으로 수십 권 이상씩 구매하게 하는 관행은 또 어떤가. 이런 상황을 두고 작가가 많아져 좋은 일이라는 사람은 없으리라. 첫째로는 등단 장사에 다름아니고, 둘쨰로는 등단자 중에서도 등단 매체에 따라 차등을 두는 사태를 빚게 될 것이다. 등단이란 결국 자격증인데, 글로 평가받는 작가에게 굳이 작가들이 자격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필요한 것일까? 독자에게 평가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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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권력'이란 예술 하나만을 바라보며 배굶는 사람들의 마지막 심리적 보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문학의 진입장벽을 터무니없이 높이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 성벽이 단순히 높기만 한 것이 아니라, 통과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점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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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대중문화의 예술성이 뒤떨어진다는 통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역사성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성을 유난히 의식하기 때문에 그렇다. 당대에는 깊이 없고 얄팍한 인기영합주의쯤으로 매도당했지만, 시대가 지난 후 당대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 얼마나 많던가. 중세 시대의 식자들은 아서왕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엉터리 거짓부렁으로 여겼지만, 오늘날 아서왕은 중세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아서왕 이야기를 제외하고, 중세 저작물 중 오늘날 대중적으로 유명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할 작품은 어차피 시대가 흐르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걸 당대 기준의 예술성의 잣대로 평가할 필요나 당위가 과연 있을까? 당대 기준에서의 예술성을 고집하다 보면, 대중문화와는 필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고 고답적인 분위기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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