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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금동원(琴東媛) 2015. 8. 5. 00:39

 

지금이야말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한다!

전체주의 이론가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는 정치영역만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삶을 정치적으로 확장하면서 시대와 맞선 정치철학자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인간의 조건》으로 현대의 대표적 정치철학자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정치의 본질이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며 공동선에 대해 끊임없이 토의하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정치권은 단순한 논리를 들며 상대를 악으로, 자신을 선으로 포장하여 정치를 극장화하고, 대중은 사고정지 상태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했다. 민주주의 원칙과 공공성이 붕괴되는 지금, 정치가 희망이나 대안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문제 해결의 촉매제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 더욱 절실하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는 한나 아렌트의 저작 중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혁명론》, 《정신의 삶》을 중심으로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지금의 정치적 현안과 연관시켜 풀어낸다. 또한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한나 아렌트 사상을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이해시켜준다.

목차

추천의 글: 한나 아렌트, 나의 멘토|김진애
들어가는 말: 왜 지금 한나 아렌트인가?

1장 ‘악’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2장 ‘인간의 본성’은 정말 훌륭할까?
3장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까?
4장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될까?

맺음말: 생동감 있는 ‘정치’를 희망하며
옮긴이의 말
한나 아렌트 연보

책 속으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단지 특정한 체제가 초래한 잔학성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주의에 관한 그녀의 문제 제기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본질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사상적 핵이라고 파악한 그녀의 논의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결이 소멸했음에도 세계 각지에서 지역 분쟁이 계속 발발하고 민족(인종) 청소까지 벌어지는 포스트 냉전 상황에서 ‘좌파’에게 시사점을 주었다. -38~39

정치철학이 ‘현재 상태를 타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안해주기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그녀의 분명치 않은 자세에 매우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유일하게 올바른 대안’이라고 독자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는 자세를 줄곧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고유한 세계관, 가치관이다. ‘전체주의’를 서구 근대가 불가피하게 내포한 모순이 응축된 현상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일개 이론가가 턱하니 들이민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주제넘은 태도다. 한나 아렌트는 그 점을 숙지했기 때문에 감히 처방전 같은 것을 내놓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43~44

‘어느 쪽이든 극단으로 나아가면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 아니겠어?” 하고 일침을 날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대를 품는 것이야 얼마든지 자유지만, 사람들에게 방향성(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을 지식인의 사명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대학교수나 저널리스트, 작가 등 ‘지식인’도 뿌리 없는 풀이 된 ‘대중’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71

출판사 서평

왜 지금 한나 아렌트인가?
현대 정치철학의 거장 한나 아렌트 쉽게 읽기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고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투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런 이미지는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2014년 일본에서는 집단적 자위권 강행 등 우경화 폭주를 경계하면서 ‘아렌트 신드롬’이 일었다. 한나 아렌트 저서의 판매량이 늘고 그녀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한나 아렌트는 남의 사고를 따라가려 하는 사고정지 상태에 의한 ‘동조’가 ‘정치’를 무너뜨리고 나치즘이나 구소련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불러온다고 경종을 울려왔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은 죄’를 역설한 한나 아렌트의 철학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에게는 전체주의 사상가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그녀는 정치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공공성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 정치철학자다.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공성이 붕괴되고 정치가 희망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정치적 위기에 한나 아렌트는 문제 해결의 촉매제로써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이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 가운데 특히 중요한 내용을 현대 사회의 정치사회문제와 연관시켜 소개하는 일반 대중을 위한 한나 아렌트 입문서다. 저자인 나카마사 마사키는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소개하는 동시에 ‘한나 아렌트라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를 상상하여 아렌트의 대변자로서 발언하고자 한다. 1장에서는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소개하면서 “이 시대에 ‘악’이라는 이름의 적을 만드는 행태가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를 느끼게 한다. 2장에서는 『인간의 조건』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믿어도 될 만큼 우리는 서로 통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3장에서는 『혁명론』을 소개하면서 “온갖 자유를 구가하는 시대인 것 같지만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를 묻는다. 4장에서는 『정신의 삶』을 소개하며 “이 온갖 골치 아픈 문제들로부터 떨어져서 고고하게 살면 안 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제기한 철학적 의문이자 이 시대가 제기하는 원천적 질문이다.

‘악’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는 20세기 전체주의를 혁신적으로 설명해낸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서구의 근대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사회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19세기 유럽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국민을 영토적, 정치적으로 통합시키면서 타국민, 타민족과 같은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동료의식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독일은 독일사회에 동화되어가던 유대인을 ‘악’으로 지목하고, 제국주의 정책에 나선 국가들은 식민지인들과 대비를 통해 자신들의 동일성을 확신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국가는 시민사회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발달한다.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고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이며 복지와 공공사업이 정비되자, 계급의식을 가졌던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이자 계급의식을 상실하고 원자화된 대중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계급적 이익 대신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이야기하는 ‘세계관정당’이 등장한다. 대량실업이나 패전 같은 위기 상황으로 대중 사이에 불안이 퍼져나가면 세계관정당의 영향을 받기 쉬워진다. 세계관 정당은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공상세계를 구축하여 대중을 하나로 묶어내 조직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을 진실이라고 믿게 하여 대중이 전체주의 운동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게 몰아간다. 오늘날에도 어떤 특정 세력을 ‘악’으로 지칭하며 세력을 키우려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저자는 그 사례로 고이즈미 전 총리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며 당을 결속하려 했던 것을 지적한다. 아렌트는 이처럼 한 집단을 ‘악’으로 몰아 자기 집단을 강화하는 것이 전체주의의 양상임을 포착해낸다.

나치스가 유대인을 대량학살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살의 책임자들이 유대인에 대한 광신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의 지배를 통해 인간을 인격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제조 공정상의 물건으로 여기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구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덕적 ‘인격’의 해체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의 근원’으로 그리지 않고 유대인 절멸이라는 직무에 충실했던 평범한 관리로 묘사한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자신의 머리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은 무사유적 ‘인격’에 있으며, 평범한 사람도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기술한다. 전체주의의 정신구조를 분석하면서 한나 아렌트는 서구근대 철학과 정치사상이 전제로 삼아온 훌륭한 인간상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자유의지를 지니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며 스스로의 이성으로 선을 지향하는 주체”라는 서구적 인간상의 역사적 기원을 탐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의 본성’은 정말 훌륭할까?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기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노동’, ‘작업’, ‘행위’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행위’는 한나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서로의 인격에 영향을 주고받으려는 행동이다. 이러한 ‘행위’에 전제되는 것이 ‘복수성’인데, 세계에는 복수의 인격이 있고 언어를 매개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가능한 환경으로 한나 아렌트는 고대의 폴리스를 들고 있다. 폴리스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공적 영역’은 대등한 입장의 시민이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공동선에 대해 토의하는 정치의 장이자 ‘행위’에 의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유로운 영역이다. ‘사적 영역’은 ‘공적 영역’에서 ‘행위’할 수 있도록 경제적 생활을 보장하고 식욕, 성욕 등 사람의 생물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이다. 눈에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는 ‘사적 영역’과 달리 ‘공적 영역’은 공중의 눈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격’이라는 ‘가면’을 써야 한다.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시민을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이기 위해 각종 기법과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것이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폴리스의 인간상은 인간이 선을 추구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는 서구의 인간상으로 이어진다. 한나 아렌트는 각자가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하고 집단 속에 매몰되어 개성을 잃게 됨으로써 서구세계가 추구한 전통적 의미의 인간성이 서서히 붕괴했다고 말한다.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만인에게 보편적 인권을 부여하고 민주주의의 범위를 확대해온 서구의 시민사회가 전체주의를 배태한 원인이 일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성에 대한 순진한 신앙은 그 이상에 들어맞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까?
『혁명론』
‘행위’가 인간성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인간관에 입각하여 혁명의 계보를 논한 것이 『혁명론』이다. 한나 아렌트는 겉으로 보이는 위선의 가면을 파괴하고 본성을 해방시키자는 프랑스혁명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헌법과 국가체제를 통해 자유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미국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의 휴머니즘 사상이 억압과 빈곤에서의 해방을 자유와 혼동한다고 생각한다. 자유가 단지 누구에게든 물리적 구속을 받지 않는 것뿐이라면 야생의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자유는 폴리스적 의미의 정치와 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법과 국가체제를 통해 ‘구성’된다. 정치나 공공선에 관심을 갖고 공적 영역에서 ‘행위’에 종사해야만 자유로운 인격이라 할 수 있다.

인민은 스스로 정한 헌법의 틀 안에서 각자 자유롭게 활동하고 공공선의 탐구와 실현을 향해 토론을 거듭한다. 그러한 행위를 위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것이다. 단지 해방한다고 해서 사람의 자연적 본성에 뿌리 내린 질서가 자연스레 세워지지 않는다. 프랑스혁명이 잔혹한 숙청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인간의 동물적인 포악함이 나타날 뿐이다.

‘자유’를 위한 정치적 공동체를 창설하고 ‘구성’의 의미를 강조하는 한나 아렌트는 당사자들이 그런 것을 충분히 의식하여 시도한 ‘혁명’이라면 좌우를 불문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런 자유공간을 파괴하고 복수성을 쇠퇴시키는 전체주의 같은 사상에는 강하게 저항하며, 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사상이라도 ‘행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공화주의적 정신을 정체시키면 가차 없이 비판한다.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될까?
『정신의 삶』
서구에서는 공적 영역의 ‘행위’를 중심으로 한 ‘활동적 삶’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해 차분하게 숙려하는 ‘관조적 삶’을 우위로 보는 전통이 있다. 그러한 서구철학의 지배적 경향에 의문을 품은 한나 아렌트는 ‘행위’의 본래 의미를 탐구하면서 ‘복수성’을 증식시키는 ‘행위’의 의의를 재발견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발견이 ‘관조’가 필요 없다는 것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관조’하지 않으면 ‘행위’를 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관조’의 행위인 ‘철학’도 할 수 없다. ‘행위’와 ‘관조’는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정신의 삶』에서 관조적 삶에 대해 파고든다. 이 저작은 ‘사유’, ‘의지’, ‘판단’의 3부작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판단을 쓰기 시작한 시점에 한나 아렌트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아렌트 연구자들은 이 판단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 가까운 내용이지 않았을까 추측하며 이것을 ‘판단’의 대체물로 여기고 있다.

1부 ‘사유’에서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므로 ‘사유’가 ‘현재’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2부 ‘의지’에서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다룬다. 서양철학사에서 자유의지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 ‘자발적 의지’라고 여기는 것 대부분이 외부의 영향이나 신체의 생리적 욕구에 의한 복합적 효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나 아렌트는 판단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선악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공동체를 구성한 타자들의 관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거’를 배경으로 한 ‘판단’은 내가 행동하려고 할 때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사유’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형성할 때 기준이 된다. 한나 아렌트가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이유는 공화주의로 구성된 ‘자유 공간’ 속에서 ‘행위’함으로써 사람은 다각적인 시각을 획득하고 타자와 대비를 통해 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정신적 작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려면 한나 아렌트가 의미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에서 비당파적인 관찰자의 역할 또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사건의 의의를 역사적 관점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기억으로 남기려면 중립적 입장에 있는 관찰자이자 관조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은 서로 연계된다.

이 책은 ‘전체주의’와 ‘악의 평범성’으로 익숙한 한나 아렌트 사상을 전체적 맥락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아렌트처럼 생각하기’를 통해 그는 한나 아렌트의 사유체계를 입체적이면서 수월하게 풀어냈다. 그러면서 아주 쉽게 아렌트 정치 철학의 ‘전체주의 기원에 대한 진단,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 공공성과 다원성에 대한 추구, 관조적 성찰의 가치’의 맥을 따라 오늘의 현실 문제를 아렌트의 명징한 눈으로 다시 보게 해준다. 상대를 악으로 자신을 선으로 포장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가 횡행하는 정치권,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대중의 모습에서 보듯, 현대사회는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책을 통해 한나 아렌트의 사상에서 진정한 정치의 의미를 복원하는 ‘행위’를 다시 찾아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후퇴가 크게 우려되는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글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나카마사 마사키 님이 쓴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2015)를 읽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숲바람을 쐬면서 이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로 마실을 간 뒤, 아이들하고 한동안 물놀이를 하고 나서, 조용히 물가로 나와서 손을 말린 다음에 천천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책을 읽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저희끼리 신나게 놉니다. 몸을 담그면 이가 딱딱거릴 만큼 차가운 골짝물하고 하나가 된 아이들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 골짜기에서 노래하면서 웃습니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 내 팔뚝에 잠자리에 내려앉습니다. 나는 내 팔뚝에 앉은 잠자리를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잠자리가 날아간 뒤에는 멧제비나비가 팔랑거리면서 눈앞을 맴돕니다. 이제 나는 제비춤을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제비나비가 저만치 떠난 뒤에는 흰나비하고 노랑나비가 날아듭니다. 아무리 봐도 배추흰나비 같은데 이 깊은 골짜기까지 어인 일일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참말 나비를 쳐다보느라 책은 옆으로 밀어놓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로 짚어 보자면, 이해관계 때문에 ‘선’의 탐구를 내버리면 안 되고, 특정한 ‘선’의 관념에 지나치게 갇혀도 안 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쪽)

 

대중사회 안에서 지식인은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일반인’의 상담을 해 주면서, 다시 말해 세계적인 서사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 이상으로 알기 쉬운 서사에 민감하고, ‘시류에 편승하고 싶다’는 욕구에 말려들기 쉽다. (71쪽)

 

  2009년에 일본에서 처음 나온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는, 일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이야말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라고 한대요.

 

  골짜기에서 책읽기를 하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몰아서 가파른 멧길을 넘습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우리가 늘 노는 깊은 골짜기’에 닿으면, 자전거는 풀밭에 눕힙니다. 귀가 멍할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씻고 웃옷을 빨래합니다. 볕이 잘 드는 넓적한 바위에 옷을 올려놓으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옷이 다 마릅니다.

 

  참말 나는 이 시골자락에서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으려 하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씨앗 심기하고 나무 가꾸기하고 화덕 짓기 같은 책을 더 깊이 읽어야 할 노릇 아닌가 하고 되새깁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책을 넘깁니다. 글쓴이(일본 가나자와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한나 아렌트한테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엿봅니다. 글쓴이가 한나 아렌트를 일본에서 2009년에 ‘다시 읽자’고 말한 까닭은 바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 때문입니다. 이 책을 옮긴 분이나, 이 책을 한국에서 펴낸 출판사도, 2015년 오늘날 한국에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다 함께 키우자는 마음이리라 느낍니다.


 

‘전체주의’는 전근대적 야만의 발현이 아니라, 도리어 서구사회의 근대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41쪽)

 

19세기의 제국은 종주국인 국민국가의 번영을 위한 식민지 지배 시스템이다. ‘제국’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같은 ‘국민’이며, 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간단히 자기 편이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 주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폐쇄적인 제국이다. 더구나 이렇게 닫혀 있는 ‘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본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사회적으로 손해를 끼쳐 잉여인력으로 취급받는 사람을 동원한다. 이리하여 실업 문제 같은 국민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함과 동시에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56쪽)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삶을 짓는 모든 사람들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세상 흐름에 휘둘리면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사상식’을 알거나 외우거나 익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골든벨’ 같은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지식이나 시사나 상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괭이질을 할 줄 모르고, 호미질하고 낫질을 할 줄 모른다면, 씨앗을 심을 줄 모르고, 풀을 뽑을 줄 모르며, 나물을 무쳐서 먹을 줄 모르는데다가, 열매를 갈무리할 줄 모른다면, 수많은 시사상식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나무를 다룰 줄 모르고, 불을 피울 줄 모르며, 전기가 없을 적에 어떻게 살림을 꾸려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온갖 지식은 어디에 쓸 수 있을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분은 사람들이 ‘고인 지식’에 갇히지 않기를 바랐다고 느낍니다. 한나 아렌트를 우리가 다시 읽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글쓴이(일본사람)하고 옮긴이(한국사람)는 지구별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이 되어, 생각을 깊이 가꾸고 눈썰미를 너르게 살찌우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꿈꾼다고 느낍니다.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60쪽)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상품처럼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담담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말은, 물건을 다루는 자신도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73쪽)

  골짜기에 가면 더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은 한 겹일 수 있고 여러 겹일 수 있습니다. 고작 나무 몇 그루가 한 겹으로 그늘을 드리워도 더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는 그늘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 있어서 햇볕을 가려 준들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흙이 없고 풀이 없기 때문이에요. 숲에서는 흙이 볕을 빨아들입니다. 숲에서는 나무가 볕을 먹고 짙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은 풀하고 나무 사이를 흐르면서 싱그러운 기운을 베풉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골짜기를 누릴 수 있다면, 도시에서 한밤에 불볕더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잠 못 이루는 불볕더위가 생기는 까닭은, ‘흙이 있고 풀하고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은 싱그러운 터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햇볕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나 나무가 없으니 복사열이 고스란히 도시 한복판에 갇혀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로는 도무지 더위를 잠재우지 못합니다.

 

  발전소를 지어서 전기를 많이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도시를 에어컨으로 식힐 수 있어야 여름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발전소를 지을 돈으로 도시 한복판에 있는 ‘금싸라기 땅’을 사들여서 너른 숲으로 가꿀 수 있을 때에 도시에서도 즐겁고 시원한 여름을 누립니다.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나 아렌트는 자유 공간을 파괴하고 ‘복수성’을 쇠퇴시키는 사상에 강하게 저항한다 … 일견 ‘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사상에 대해서도 ‘행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공화주의적 정신을 정체시키는 측면은 가차 없이 비판한다. (143쪽)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3쪽)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를 오가면서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한 대조차 안 다니는 논둑길하고 숲길을 자전거로 다니자면 싱싱 내달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운 어버이가 자전거를 싱싱 달릴 까닭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느긋하게 달릴 만한 자리가 넉넉하다면, 굳이 자가용을 몰아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전철도 나쁘지 않지만, 바람을 가르면서 한들한들 달리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자전거마실은 아이와 어버이 모두한테 기쁘리라 느껴요.

  어쩌면 꿈 같을는지 모르나, 버스전용차선이 아닌 ‘자전거만 달릴 수 있는 찻길’이 도시 한복판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는 그만큼 훨씬 줄어야겠지요? 골목길에는 자동차를 세울(주차) 수 없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골목에서도 마음껏 놀 수 있고, 어른들은 골목에 평상을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삶을 누릴 만하겠지요.


 

한나 아렌트는 ‘관객 = 관찰자’가 지금 ‘행위’하는 사람들보다 사태를 ‘공평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연극의 메타포를 통해 설명한다. 연극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과 일체화되어 있는 배우는 이야기의 흐름을 자기 역할의 입장에서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지 않고 연극 전체를 바깥쪽에서 보기 때문에 이야기의 맥락 전체를 조망하면서 극 속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을 비역할적으로, 즉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다. (237쪽)

 

‘현장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풍조가 강해진다면 (그 문제에 관련하여 무척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하여) 방관자는 발언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이래서야 ‘정치’의 ‘복수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240쪽)


 

  문화나 복지는 꼭 돈을 들여야 이룰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은 돈이 많아야만 즐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어야 할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지식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를 다시 읽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너와 내가 서로 아끼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랑’을 가꾸는 길에 이바지할 수 있는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정치철학’이라고 하는 틀거리로 마련해서 책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골짜기에 언제 가요?” 하고 묻습니다. 낮 한 시 반에 자전거 타고 가기로 했는데, 그만 두 시가 넘습니다. 아이들한테 미안합니다. 얼른 가자고 하면서, 아이들더러 갈아입을 옷을 스스로 챙기도록 합니다.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마저 읽고 덮습니다. 오늘은 골짝마실을 가면서 다른 책 한 권을 챙기려 합니다. 이 깊고 고즈넉한 시골자락에서 살면서 나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꿈을 키우는 보금자리에서 길동무가 될 어여쁜 책 하나를 가방에 꾸리려 합니다. 골짜기에 닿으면 먼저 삼십 분 동안 아이들하고 물놀이를 즐긴 뒤, 삼십 분 동안 조용히 책을 읽고, 다시 삼십 분 동안 물놀이를 즐기고는 집으로 돌아와야지요. 4348.7.1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저자 : 나카마사 마사키

1963년 히로시마 현에서 태어났다. 도쿄 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고 잠시 언론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독일 만하임 대학에서 수학하고, 1996년 도쿄 대학에서 ''숨은 신'의 흔적 독일 근대의 성립과 횔덜린'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나자와(金澤) 대학 법학류(法學類) 교수이다. 전공은 정치사상사와 비교 문학. 저서로 '포스트모던의 좌선회'(2002), ''부자유'론'(2003), '돈에 '올바름'은 있는 것인가'(2004), ''모두' 바보!'(2004), '데리다의 유언'(2005), '일본과 독일, 두 개의 전후 사상'(2005), '일본과 독일, 두 개의 전체주의'(2006), ''알기 쉬움'의 함정'(2006), '사상의 사상(死相)'(2007), '지금 아렌트를 다시 읽는다'(2009) 등이 있고, 안토니오 네그리, 페터 슬로터다이크 등의 책을 번역했다. 잡지 '조쿄(情況)'의 편집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