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기어(綺語)
구상
시여! 이제 나에게서
너는 떠나다오.
나는 너무나 오래
너에게 붙잡혔었다.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불순해지고
너로 인해 나는 오히려 허황해지고
거짓 정열과 허식(虛飾)에 빠져 있는 나,
그 불안과 가책에 떨고 있는 나,
너는 이제 나에게서 떠나다오.
그래서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
그 천진 속에 있게 해다오.
그 어떤 생각도 느낌도 신명도
나도 남도 속이지 않고 더럽히지 않는
그런 지어먹지 않는 상태 속에 있게 해다오.
나의 입술에 담는 말이
치장이나 치레가 아니요
진심에서 우러나오게 되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에서
너의 색안경을 벗어 버리고
세상 만물과 그 실상을 보게 해다오.
오오, 시여! 나에게서 떠나다오.
나는 이제 너로 인해 거듭
기어(綺語)의 죄를 짓고 짓다가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까 저어하노라.
-한국대표시인101 인선집 『구상』,( 2002,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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