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부터 英시인 셸리까지… 서두록 할머니 암송회서 큰 박수
17일 열린 시 암송회에서 서두록 할머니(오른쪽)와 맏딸 이순희 전 부산대 불문학과 교수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두록 할머니 가족 제공
대구 중구의 한 호텔. 100세를 바라보는 할머니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천명의 시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를 나지막하게 읊었다. 청중 50여 명은 눈을 감고 옛 추억을 생각하며 이내 감상에 젖었다.
시 암송회의 주인공은 바로 대구 서구에 사는 서두록 할머니(96). 17일 2시간여 동안 20편의 시를 실수 없이 줄줄 외워 참석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시를 전공한 젊은이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문학소녀’의 꿈을 잃지 않았던 서 할머니는 막힘이 없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하는 대목에서는 눈시울을 붉힌 참석자도 적지 않았다.
서 할머니가 암송한 시는 한국 시에 한정되지 않았다. 영국 시인 셸리의 ‘비탄’,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쌍학명’도 서 할머니의 암송 시 목록에 올랐다. 주변에선 그를 ‘시 외우는 할머니’로 부른다. 2009년에는 애송시 20개를 추려 시 낭송 CD를 내기도 했다.
행사는 맏딸 이순희 전 부산대 불문학과 교수(76)가 마련했다. 유달리 시를 좋아하는 노모에게 뜻깊은 선물을 해야겠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프랑스에서 살다 보니 마음과 달리 실천할 길이 없었다.
이 전 교수는 “어머니가 100세를 얼마 안 남겨 더이상 늦춰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남세스럽다고 거절하는 어머니를 겨우 설득해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여성 교육에 부정적이던 시대에 태어난 서 할머니의 학력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다. 70세가 되던 해 노인대학에 들어가면서 배움의 목마름을 조금씩 해소했다.
노력파인 그는 시뿐만 아니라 글짓기, 그림 등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특히 시를 많이 좋아해 지금도 매일 새벽에 시를 외운다. 서 할머니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시를 읽고 또 외우고 싶은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대구=장영훈 기자 j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