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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금동원(琴東媛) 2016. 2. 9. 22:23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2007년(2004년 초판)

 

  책 소개

  이미지 과잉의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에 대해 도망갈 곳이 전혀 없을 만큼 통렬한 질문을 쏟아 붓는다.

 

  지은이 수전 손택 Susan Sontag 
  1933년 1월 28일 뉴욕에서 태어난 손택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이다.
손택의 저서로는 '해석에 반대한다' 이외에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부문 수상작 '사진에 관하여'(1977)와 <전미도서상> 소설부문 수상작 '미국에서'(1999)를 비롯해 4권의 평론모음집, 6권의 소설, 4권의 에세이, 4편의 영화각본, 1편의 희곡 등이 있다. 그녀의 저서들은 현재 전 세계 26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옮긴이 이재원
  중앙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급진적 문화이론에 관심을 두고, 그 연장선상에서 번역에 힘쓰고 있다. 현재 <도서출판 이후>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 1/2'(공저/이후 1997~98), '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공저/문화과학사 1998)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속도와 정치'(그린비 2004),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3), '불복종의 이유'(이후 2003), '하이퍼텍스트 2.0: 현대 비평이론과 테크놀로지의 수렴'(공역/문화과학사 2001), '신좌파의 상상력: 전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공역/이후 1999)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시상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미군의 폭격기들이 한창 바그다드 외곽 지역을 폭격하고 있던 지난 3월 말에 출판된 이 책 '타인의 고통은 그 노력의 결정판이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인의 고통'을 쓰고 있을 때 손택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실 인식이 손상된 걸까?” 손택은 스스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고통의 재현물, 예컨대 전쟁이나 참화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분석해 본다. 손택의 지적에 따르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단지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얘기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즉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 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고. 이 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에도 들어맞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이 책의 특징

   수전 손택이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건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 번째로 현대전은 무기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대규모로 고통을 양산하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포토저널리즘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대 초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즉, 전쟁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타인의 고통'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 때문이다. 손택은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공허한 은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부가 암이나 빈곤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지만, 언제쯤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인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기 맘대로 아무런 일이나 할 수 있도록 직접 자신을 허가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종전 후의 현실은 손택의 염려대로 미국이 ‘제국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타인의 고통' 한국어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의미는 물론이고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보려 했던 손택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살리고자 영어판과는 조금 다르게 편집했다.

  - 한국어판 서문: 손택은 자기 글을 직접 소개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실제로 손택은 (주로 참고문헌이나 원래 출처만을 밝히는) ‘감사의 글’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저서에 ‘서문’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어판에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주는 서문을 써서 보내줬다. 직접 한국어판 서문을 보낸 이유는 출판사의 요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9/11사건 직후부터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이성적 태도 때문에 자신의 주장이 왜곡된 경험을 겪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도판(총 48장): '타인의 고통' 영어판에는 원래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이미지를 다룬 또 다른 책 '사진에 관하여'에도 도판이 실려 있지 않다). 손택은 자신이 본문에서 언급한 이미지들이 서구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것들이기에 굳이 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듯싶은데, 한국어판에서는 서구와는 문화적 풍토가 다른 국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총 48장의 도판을 실었다.

  -네 편의 부록: '타인의 고통' 한국어판에는 이 책이 발간되기 전에 손택이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기고문 (최근에 발표된 순서대로) '문학은 자유이다',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네 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 교육단체 <미국 대학이사/동창회 협의회>가 “미국을 앞장서 비난하는 인사들” 중 한 명으로 손택을 지목하게 만들었던 이 기고문들은 이 책이 왜 현실에 대한 ‘지적 개입’일 수밖에 없는지 국내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컬럼) 당신, 타인의 고통에 어떠한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이후 사람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다

. 2011년 여름 살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서 누군가는 타워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중심 명동상가의 세입자는 용역으로 위장된 조직폭력배들로부터 겁박을 받으면서 생존권을 호소하고 있다. 시급4,580원조차 받지 못하며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은 연간 1,000만 원에 육박하는 등록금을 견딜 수 없다며 비탄에 빠져있다

 
  내 발등의 불과 불씨 
 
  도처에서 아우성이다. 세입자는 치솟는 전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사채를 빌리거나 아이의 교육비를 헐어 월세를 마련해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두려움에 독한 소주로 긴 밤을 지새우기가 예사다. 많은 사람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불은 아무리 끄려 해도 불티가 계속 옮겨 붙는다. 혹독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스펙경쟁이 기다리고 있고, 그것이 지나가면 입사시험이, 그것이 지나가면 등록금 상환이, 그 다음에는 전세금이 기다린다. 아무리 발등의 불을 끄려고 하지만 불티는 계속 날아오고, 왼발로 오른발로, 머리로, 옷으로 옮겨 붙으며 결국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모두가 자신 발등의 불에 급급해하는 동안 전부가 타죽게 생긴 것이다. 
 
  이럴 때는 당장 발등의 불은 뜨겁지만, 양동이에 물을 길어 불티가 날아오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양동이를 그 ‘불씨’에 퍼붓는 것밖에 살 길은 없다. 당장 발등이 뜨겁다고 모두 그것만 끄려 하다가는 모두가 타죽고, 발등이 아닌 불씨를 직시하며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인 셈이다.
 
공분과 연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 
 
 
 
  다른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때, 내가 그를 구해주지 않으면 내가 강물에 빠졌을 때 아무도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 같은 이치로 누군가가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를 위해 분노해주지 않으면 내가 억울한 상황에 빠졌을 때 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것이 ‘공분’이다. 개인의 분노는 다스리는 것이 수양이지만, 사회와 관계된 분노는 표출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지는 이치, 이것은 ‘연대’의 정신이다.
 
  이런 공분과 연대는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와 관계가 있다. 누구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가진다. 수단 어린이의 기아나, 소말리아의 참상이 전해진 한 장의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때로는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맺히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연민이 진정한 공감(empathy)이 아닌, 동정(sympathy)일 경우,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소말리아 난민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에 죽어가는 아이의 사진은 그 대상으로서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이 공감이 아닌 동정에 머무르는 한 그것은 광범위한 부조리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해결 불가능한 명제로 치부되는 것이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지도위원이 수십 미터 타워크레인에 몇 달을 매달려 있어도, 그것이 연민의 대상으로 머무르는 한 그녀의 투쟁은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의 문제, 거대한 시스템의 문제 중 하나로 치부되고,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이렇게 독립적이고 파편화된 인식은 내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역시 같은 종류의 시선에 노출된다. 즉 타인의 시선들은 나를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 볼 뿐, 아무도 내 몸에 붙은 불을 꺼주려고 하지 않는다.
 
 
  추상화된 타인의 고통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상이한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
-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중에서
 
 
  『해석에 반대한다』이후의 저자 수전 손택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개별적인 문제를 지나치게 뭉뚱그림으로써 아예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 짓고는 그것을 처음부터 연민의 시선에서 바라볼 뿐,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하지 않게 된다.
 
  물론 이유는 ‘공분(公憤)’을 하지 못하는 탓이다. 분노는 한계를 넘어 극복하려는 동기가 되지만, 연민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우아한 비겁이다. 즉 타인의 문제에 대한 공감은 공분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내 문제가 되지만, 동정심에 기댄 연민은 문제해결의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 채 결국 타인의 문제로 넘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각자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고, 또한 당장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것에 안도할 것인지, 아니면 각자 양동이를 들고 불씨를 끄러 달려가야 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문제제기다.
 
  연민을 넘어서 공분과 연대의 길로

 

 

  이 말처럼 타인의 문제에 있어, 연민이 아닌 공분을 바탕으로 ‘해결 가능 한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함으로써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개선의 요구가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쌍용차의 문제, 유성기업의 문제, 한진중공업의 문제는 각자 다른 문제이고 개별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뭉뚱그려서 강성노조의 극렬한 저항이라는 식으로 체념해 버리거나, 모든 문제에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공분의 동기를 놓아버리는 순간, 언젠가 그것은 다른 괴물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의 목을 조이게 된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과 공분의 바탕에서 개별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연속될 때, 그것은 곧 불씨를 끄는 양동이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바로‘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분은 반드시 공감의 바탕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손택은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 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공분은 관음증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경고다. 그녀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말이다.

 
 
박경철(의사, 경제평론가)
[인문]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 이후
2007.07.10 (초판 2004년01월)
[인문]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 이후
2002.09.09

  박경철의 '독서산책'  현직 외과의사.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주식투자 전문가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겪은 사연을 담은『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주간지, 일간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독자리뷰) 타인의 고통에 무심해지는 순간 나의 고통이 될 수 있다 ,

 -edharris |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시인 보들레르가 1860년초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기록이다. 그러니까 155년전 이미 사람들은 신문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자극을 받으며 무뎌져 갔으며 좀더 센 자극을 찾아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네이버에서 좀더 센 자극들을 찾아 검색창을 헤매듯이...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그녀의 대표작 <사진에 관하여>와 연결선상에 있을 법한,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냉철한 성찰을 시도하는 책이다.

  아래 사진은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타인의 고통' 또는 '타인의 비극'을 다룬 사진이다.

  수전에 의하면 우리는 이런 사진에 드러난 '타인의 고통'을 감상하며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이란 것은, 우리가 타인의 비극에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한다고 한다. 이런 사진들은 '경험을 축소화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사진에 비춰진 '타인의 고통'을 통해 '연민의 늪'에 허우적거리기 딱 좋다는 것. 그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으로 드러나는 실존하는 문제를 추상화시켜 도리어 그 '문제'에서 벗어나 버린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한 세상이야!"라고...

  이런 발언에 대하여 수전은 '매우 놀랄만한 지역성을 띠고 있는' 발언이라 말한다. 현존하는 생사의 문제를 '스펙터클한 사건'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건 오로지 방관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오바마 대통령과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백악관 상황실에 모여 빈 라데 제거 작전을 실황을 지켜보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네이비실 요원이 발사한 총알이 빈 라덴의 왼쪽 눈을 관통하고 확인 사살 총알마저 빈 라덴의 가슴으로 발사되었다. 미국에겐 철천지 원수였지만,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았을 한 죽음이 '스펙터클한 구경거리'가 되어 전세계에 방송되던 순간이었다.

  이쯤되면 타인의 고통이란 게임과 다를 바 없어진다. 폭탄이 터지고, 손발이 날라가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무감각해진 채로 식탁에 앉아 맥주에 치킨을 뜯는다.

  사진과 영상이 타인이 겪었을 경험을 축소화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저 '연민의 바다'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린 사진이라는 프레임 속에 숨겨져 있는 '실제의 세계'를 지켜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정치라는 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설득하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여 그 옳음을 현실화하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닐까? 우린 이제 더이상 타인의 고통에 무관한 외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