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로 산다는 것』
책 소개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란 누구일까? 미술평론가 박영택이 숨어사는 열명의 미술가들의 작업실을 기행하며 쓴 이 산문집은 그 어려운 질문에 감동적이고 또한 마음 아픈 대답을 내민다. 이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생계를 위해 목수일을 하면서, 배를 타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빠르고 화려하게 돌아가는 미술계와는 하늘과 땅만큼 떨어져 있고, 유행처럼 번지는 탈속적인 제스처로 묶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견뎌낸다. 오직 '그림을 또는 조각을 계속할 수 있다면'으로 귀결되는 그들의 삶은 예술가라는 이름아래 씌워진 가시면류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림을 보러 갔지만 돌아와 책상에 앉아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지구상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의 치열한 삶을 보고 온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그들이 보여주는 절실함과 '예술혼'은 우리 모두가 마음 한구석 계속 그리워하는 진정한 예술가와 인간의 모습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처럼 살 수 없고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에게는 더 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한결 풍요로워지며 삶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목차
-절대고독 : 김근태. 경주 작업실에서 ...31
-최소한의 생계 : 김을. 경기도 광주 작업실에서 ...49
-갑판위의 시인 : 청도. 없는 작업실에서 ...65
-심플라이프. 쥐스킨트 소설의 주인공처럼 : 박정애. 방배동 작업실에서 ...81
-황토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의 기억 : 박문종. 담양 작업실에서 ...99
-그림은 한 개인의 몸에서 나온다 : 염성순. 정릉 작업실에서 ...119
-그토록 서럽고 슬픈 추억 : 정일랑. 양평 작업실에서 ...137
-혼과 육체를 저당잡힌 단식광대 : 김명숙. 청주 작업실에서 ...153
-시간을 간직한 나무들 : 최옥영. 강릉 작업실에서 ...173
-보행명상. 소요하고 명상하며 찍은 사진 : 정동석. 양평 작업실에서 ...189
저자 소개
미술평론가ㆍ경기대 교수.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에서 미술교육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1995년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했다.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2010 아시아프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박수근미술관 자문위원, 한국미술품감정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경영학과 교수로 있다. 50여 개 전시를 기획했으며, 여러 편의 리뷰, 서문, 작가론을 썼다.
책 속으로
언제인가 가물하다. 신림동 관악경찰서 건너편 상가 건물 2층,아이들 보습학원 한 귀퉁이를 막은 그 좁은 방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이강일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던 김을을 처음 보던 때 말이다. 개인적인 감에 의존하긴 하지만 좋은 작가의 작업은 한눈에 다가온다. 거의 직감적으로 느낀다. 우연히 들른 다른 작가의 작업실에서, 혹은 수없이 많은 전시들 틈에서 그것들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아니 보석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기보다는 가슴 아프게, 전율처럼, 충격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많은 작가들 사이에 그들은 거품 속 비수처럼 박혀있다.
캄캄하고 눅눅하며 가난에 물든 썰렁한 작업실 한 벽에 서서 그는 어둡고 축축한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다. 엉겨붙은 동판 조각들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엔 그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막연한 느낌 뿐이었는데 볼수록 달라보이는 그림들이었다. 그렇게 알게 된 후 우리는 이따금씩 만났으며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개인전을 두번 마련했다.
미술관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 내가 작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전시회를 여는 것뿐이다. 그러나 작품은 여전히 팔리지 않고 화단은 무관심하다. 그림을 본 화장주들은 '아! 좋네'라는 말 끝에 '팔리기에는 좀 어둡지 않나' '형상이 너무 강한데' '아직 수상 경력이 없군' '대학에 있나' '어렵게 살겠구먼' 등등의 말만을 늘어놓고 가버린다. 그들은 오직 작가의 화려한 배경과 경력, 팔릴 만한 대중성에만 관심이 있다. 즉 고객의 기호를 만족시킬 수 있고 작가 스스로 자기 작품을 팔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 말이다. 그런 배경이 없다면 그 다음으로는 작품 세계가 얼마나 대중적(상업적)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이유로 인맥과 경제력, 학연이 없는 작가, 미술계 제도권의 권력과 먼 작가들은 제아무리 프로페셔널한 작가의식과 근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작품의 질이란 원래 학력, 경력, 재력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 결과, 관점과 자세에서 드러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술계에선 작품의 질에 관한 논의나 불합리한 구조에 관해서는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략)
냉정히 직시하자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작가의 기쁨과 이들을 선보인다는 나의 성취감은 전시회가 열릴 때 뿐, 전시회가 끝나면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또다시 시작되는 가난과 냉대와 무관심 속에 혹독하게 견디는 수밖에 없고 나 역시 그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현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낀다.
---pp. 50~51
바다를 볼때마다 그리고 바다의 이미지들을 접할 때마다 지워지지 않는 '바다 그림' 하나가 떠오른다. 아득한 시간이 경과했지만 그 바다 풍경은 어떤 그림보다 인상적이고 절실하게 내 기억에 머물러 있다. 오래 전 일이다. 미술관에 근무하던 어느 날, 한 통의 낯선 전화를 받았다. 감이 멀 뿐만 아니라 혀 짧은 사투리고 말을 해대는 통에 거의 알아듣지 못했는데, 결론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삼천포에 사는 청도라는 이름의 선원이라면서. 며칠 후 찾아온 그는 인생의 온갖 풍파를 몸소 체득한 자신의 화려한(?) 경력과 고생담을 장황하게 풀어놓았다. 시종일관 말도 안되는 장광설에 다소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어려운 삶 속에서 미술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한편으로는 그 의지가 기이하기까지 했다. 한참 후 신문지에 둘둘 말려 있던 그림들이 몸을 내밀었다. 온통 '바다'였다. 물론 그 그림들은 지극히 소박하고 아마추어 내음이 질펀한 것들이었지만 실제 뱃일을 나가서 겪은 바다 풍경이었기에 절실한 그 무엇이 있었다.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바다 그림에서 그만큼 비껴나 있었다. 순간 내 눈은 긴장했다.(중략)
한 작가의 작품과 삶이 밀접한 연결고리로 지탱되어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울 리 없지만 청도의 경우만큼 자신의 지난한 삶과 그림 그리기의 행위가 밀착된 경우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나 오늘날과 같이 미술이란 것이 협소한 범주의 전문인들 내지 미술계 내에서만 자족되는 상황 속에서 고아 출신에, 극심한 빈곤과 소외 그리고 미술 교육에 대한 어떠한 혜택과도 단절된 삶을 살아오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간직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캔버스와 물감을 구해 그림을 그리는 경우 또한 예외적인 상황이다.
인생의 온갖 쓴맛을 맛본 한 사람으로서 그가 그리고 있는 바다와 파도는 바로 그의 삶과 인생 그 자체로 읽혀진다. 쓰라린 삶을 달래고 버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에게는 그림 그리기와 시를 짓는 일이었다는데, 이러한 낭만적 취향의 예술지상주의가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마 그 그림이 그의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진솔하게 길어올려진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생을 바치는 각오이고 생에 대한 치열함이다. 자신의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얽힌 그 바다 그림은 그런 면에서 그의 자화상일 것이다.
---pp. 68~71
모든 정신과 신경이 손가락 끝으로 몰리는, 그린다기 보다는 차라리 사람을 잡는 그 행위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은밀한 작업이다. 그 행위는 누구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다. (42)
하지만 길들여지지 않은 순박함으로 대상을 보고자 하는 힘, 자신의 어려운 삶을 회피하지 않고 이를 예술행위로 극복하려는 의지는 기존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74)
(그녀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조차 심하게 부끄러워했다. 그림 그리며 산다는 것의 사치와 허영을 극구 경계하면서도 아무런 벌이도 되지 못하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는 자괴감과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폐와 진지함 속에 똬리를 튼, 기묘한 심리의 세계를 지닌 작가를 만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절망과 불안, 상심과 불행 속에서 그녀는 그림만을 구원으로 삼고 진력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자각 속에 수시로 빠져든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그림조차 없다면 더 이상 생을 지탱시킬 하등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런 복잡한 심정의 일단을 언뜻언뜻 내비쳤다.(154)--- p.
매우 추웠던 1994년 1월의 어느날 나는 그 작가를 만나러 청주 근교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청주 시내에 살던 그녀가 마련한 이 작업실은 시골에 위치한 조그마한 초등학교의 빈 교실이었다. 규칙적인 출퇴근 속에 꼬박 그림만을 그리며 살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조차 심하게 부끄러워 했다. 그림 그리며 산다는 것의 사치와 허영을 극구 경계하면서도 아무런 벌이도 되지 못하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는 자괴감과 두려움이 혼재된 착잡한 마을을 숨기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폐와 진지함 속에 똬리를 튼, 기묘한 심리의 세계를 지닌 작가를 만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절망과 불안, 상심과 불행 속에서 그녀는 그림만을 구원으로 삼고 진력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자각 속에 수시로 빠져든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그림조차 없다면 더이상 생을 지탱시킬 하등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런 복잡한 심정을 언뜻언뜻 내비쳤다(중략)
피륙을 짜듯이 촘촘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녀의 태도와 삶은 이 부박하고 가벼운 세속의 시늉뿐인 껍데기 그림, 그리고 몰염치, 자기 현시와 세속적 욕망으로 썩어가고 있는 오늘 우리 화단에 비추어 봤을 때, 소중한 성과이자 성찰과 반성의 거울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또 두렵다. 거짓 세상에 맞서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친친 동여매는 이 자기치유적, 자폐적 그림 그리기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 받기 쉬운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자신을 소멸시키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다른 무엇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하여 충만될 수 밖에 없다면, 제 몸을 매질하여 또 다른 연안을 꿈꾸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행위 또한 그녀에게는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림 속으로 더욱 깊이 밀어넣으면 넣을 수록 분명 두려움 또한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녀의 운명인 것을. ---pp. 154~170
그림판에 머물면서 전시회를 기획하고 글을 쓰고 그림에 관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가를 만나고 그들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성실하고 진지하며 깊이 있는 대화, 시대의 움직임에 대한 천착과 그 속에서 미술의 올바른 위상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담긴 대화는 사실 버겁다. 그러나 그 버거움에서 쉽사리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걸 근자에 들어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그림보기가 두렵고 어렵다. 그 두려움은 그림 앞에 설수록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잘 모르겠다는 시각의 불투명함과 인식의 몽매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삶이 작가들의 삶에 육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 화단의 미술관행에서 느끼는 절망과 쓰라린 마찰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림 앞에 서서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다시 일상의 진부하고 나른한 틀로 무장되어 굳어져간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pp.20-21, ---머리말 중에서
출판사 서평
이 책은 10년 가까이 <금호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현재 경기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이자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영택이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그에게 상처와도 같은 기억을 남긴 예술가 열 명의 작업실을 기행하며 쓴 전작산문집이다.
작가와 작품들을 끊임없이 만나고, 작업실을 방문하고, 그중에서 좋은 작가를 선별해서 선보이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그에게 숨어 있는 예술가들의 존재를 보다 빨리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였으며,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은 그들의 삶과 작품의 맥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해주고 있다. 항상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큐레이터로서의 두 다리와 미술미평가로서의 예리한 안목을 두루 갖춘 그는, 이 책을 통해 숨어사는 예술가들의 작업실 기행이라는 색다른 공간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만 건져올릴 수 있는 생생한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몇 가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진정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시대에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들의 존재는 과연 필요한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러한가? 그들의 절실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등등. 그리고 그 물음들은 '그림을 보러 갔지만 돌아와 책상에 앉아 생각해보면 그것은 결국 지구상에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의 치열한 삶을 보고 온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예술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보편적인 삶의 문제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세상을 등에 업고서 세상과 만나는 자유
저자가 만난 작가들은 모두 열 명이다. 김근태(드로잉, 조각), 김을(서양화), 청도(서양화), 박정애(조각), 박문종(동양화), 염성순(서양화), 정일랑(서양화), 김명숙(서양화), 최옥영(조각), 정동석(사진) 이들 모두는 저자에게 '거품 속의 비수' 같은 존재들이다.
거품 같은 현실, 거품 같은 화단, 거품 같은 작가와 작품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변방에 숨어 살며 작업에만 몰두하는 그들의 존재는 미미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작품만으로 거품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안쓰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이 닻을 내린 그 지점이 바로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지점이며 그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그가 만난 작가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이력을 담고서 각자 개성이 강한 작품세계를 일구고 있다. 작업과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목수 일을 배운 작가가 있는가 하면, 선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갑판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도 있고, 또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작업하는 이도 있다. 이렇듯 이들이 삶을 바라보는 각도와 삶의 방식, 작품들은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만의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 하나의 정점을 향해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람들이라는 점, 그리고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라는 점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이다.
이들은 마치 예술이라는 종교에 귀의한 수행자처럼 자신의 삶을 혹독하게 단련시킨다. 얼핏 보면 그들은 세상과 절연하고 세상과 무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단순한 현실도피나 유행 같은 탈속적인 제스처와는 명확히 구분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세상을 등에 짊어진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삶에서 거리를 두는 것은 일상적인 삶을 업고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또다른 세상과 만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싸움이자 극복의 나날이지만, 벽이라도 뚫을 듯한 몰입과 집중으로 예술가 본연의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벼랑 끝, 그 극한 위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불후하고 절박한 현실을 지복의 자리로 탈바꿈시킨다.
이 땅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
모든 사람들이 이들처럼 살 수는 없다.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더없이 귀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한결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갖는 가치는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우리 문화의 단단한 지반을 형성하는 무형의 자산이며, 이들의 삶의 태도는 안일하게 일상을 이어나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반성의 거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금을 채취하듯 그들의 작품과 삶 속에서 빛나는 결정들만을 곱게 걸러내어 우리 앞에 내놓는 저자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정확한 시선으로 작품을 투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꼭꼭 씹어 되새김질하듯 꼼꼼하고도 따뜻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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