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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금동원(琴東媛) 2016. 4. 26. 07:30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드 니꼴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역/창비

 

 

삶과 죽음에 대한 거장의 통찰
톨스토이의 중단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

톨스토이의 중단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과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묘사하고 그것을 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보편적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판사로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가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간다. 서서히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되묻는다. 죽음 앞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되짚어보며 그 의미를 파고드는 과정을 매우 밀도 있고 설득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인간의 삶과 운명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감동적인 장면을 빼곡하게 담고 있다.

 

책 속으로

 

죽음, 그래 죽음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즐겁게 놀기나 하는구나. (문 저쪽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흩어져 들려왔다) 다 마찬가지다, 저들도 모두 죽을 것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너희들은 좀 나중일지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즐거울까, 짐승 같은 놈들!’―

죽음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

그는 오랫동안 곁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의 공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은 어디에 있지? 죽음이 뭐야? 죽음이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공포도 있을 수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본문에서

 

 

작가 한마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저자 소개:레프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Lev Nikolaevich Tolstoi 러시아의 소설가ㆍ사상가.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로 일컬어지고 있다. 1828년 남러시아 툴라 근처에 있는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을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자퇴했다. 184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장일에 전념했으나 실패하고 1851년에 카프카즈의 군대에 들어갔다. 1852년 처녀작 『유년시대』를 발표하여 투르게니에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 후 러시아 농민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뜬 그는 농민계몽을 위해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세우고 농노해방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후 1869년에 완성한 『전쟁과 평화』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하여 생동감 있게 그려내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1870년대 후반기에 수많은 정신적 갈등과 고뇌를 겪고 난 뒤 홀연히 농부로 변신하였으며 1885년에는 뽀스레드니끄(중개인이라는 뜻) 출판사를 만들어 러시아 민화와 복음서의 진리를 대중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민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1870년대 후반 『안나 카레리나』의 마지막 몇 장을 쓸 무렵 그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죽음에의 공포에 사로잡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삶의 의의는 과학이나 철학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도 해결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태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의 비극은 사회 가치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는 레빈의 행위와 평행을 이루는데, 레빈은 자신의 영지에 있는 농부들 사이에서 해답을 찾는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정신적 위기와 극복이 이른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며 『참회록』 속에 서술된 고백의 내용이다. 여기서부터 톨스토이는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의 생활을 영위했다. 원시 기독교의 소박성을 지닌 포괄적인 비전에 부합된 삶을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예언적인 현자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 않으면 뒤얽혀버렸을 인생에서 자기 책의 핵심을 형성해 주는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도덕적 필연성과 합리적 기독교 윤리에 바탕해 농민적 무정부주의, 악에 대한 무저항 정신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한때 전 서계로 퍼져 톨스토이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침략 사건을 러시아의 여러 가정 문제를 통해 그려낸 거대한 서사시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중요성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두 사람, 즉 안드레이 볼콘스키 왕과 피에르 베주호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톨스토이는 남은 생애를 자신의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한편, 자신의 철학을 책으로 구현하면서 보냈다. 종교적 전향 이후에는 비록 도덕주의자 톨스토이가 인생과 인간 경험의 활력 및 다양성을 뛰어나게 포착해 낸 예술가 톨스토이보다 우세할지라도, 그 시기에 나온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특히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우처 소나타』(1891)가 그렇다.

톨스토이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는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매혹시킨 반면, 아내와 가족으로부터는 그를 소외시켰다. 82살 되던 해 그는 그의 가르침과 그의 개인적 부유함의 부등으로 괴로워하던 중, 그의 아내와 말다툼 한 후 집을 나왔다. 3일 후, 1910년 11월 20일 빈촌의 정거장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러시아 민화에 기반을 둔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과 같은 짧지만 진정한 교훈을 주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작품들을 써내기도 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 『교의신학비판』,『참회록』,『나의 신앙』,『부활』,『유년시대』,『소년시대』,『청년시대』,『세바스토폴 이야기』, 『카자흐 사람들』,『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등 다수가 있다.

 

역자; 이강은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노문학을 전공하고 막심 고리키의『클림 삼긴의 생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 막심 고리키』 『반성과 지향의 러시아 소설론』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청년 고리키』 『세상 속으로』 『이탈리아 이야기』 『대답 없는 사랑』 『레프 톨스토이 1, 2』 등이 있다.

 

 

출판사 리뷰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거장의 통찰

소설은 동료들과 가족 친지들이 이반 일리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동료들에게 통보되자, 이들은 그를 애도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데에 열중한다. 그 다음, 이반 일리치의 삶과 발병,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이반 일리치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삶의 기준대로 살아온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 이르러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거듭 묻는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반 일리치는 무능한 의사들, 이기적이고 무심한 가족들, 그리고 신과 운명을 저주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이반 일리치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눈을 감는다.

톨스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역사적, 사회적 모순성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해낸 예술가로서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근대적 인간의 존재와 존재양식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이반 일리치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조차 넘어선다는 것은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일 뿐만 아니라,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작가 자신,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는 외적인 일상의 모습과 인간 심리의 움직임 사이의 거리를 적나라하게 묘파함으로써 인간 삶의 보편적 모습을 인지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의미에 대한 탐색인 동시에 인간의 일상적 모습과 내면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과 지양의 심리극이다.

 

 

독자 리뷰

  다시 삶을 느끼며

-검댕소년 | 2013-12-14 |http;//blog.yes24.com/document/7513575

 

이반 일리치의 삶은 직선과 같았다. 관리의 자식으로 태어나 법률학교에 입학했고, 예심판사를 거쳐 항소법원 판사가 되었다.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비록 두 아이를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지만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권력이 있었으나 그것을 남용하려 들지는 않았고, 언제나 사람들 틈에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 애썼다. 판사 봉이 탕탕탕 판결을 내리면 법은 정해진 대로 실행되어야 하듯, 그의 삶도 대체로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갔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가 기대하는 만큼 살아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병이 그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다. 옆구리에서 원인 모를 통증이 몰려왔고 용하다는 의사 누구도 그 병을 없애지 못한다. 그렇게 이반 일리치의 삶은 점차 죽음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무너졌다. 그리고 이전에 알고 있었던 삶들이 유리 파편처럼 깨어지며 보여주지 않았던 뒷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반 일리치와는 달리 라이언 스톤 박사의 삶에서 방향은 없었다. 우리가 라이언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삶은 이미 무너진 후였다. 하나뿐인 딸 아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것을 잊지 못해 매일 밤 차를 몰았다. 라이언은 그저 정처 없이 방황했다. 그런 와중에 라이언은 우주로 나갔다. 땅의 중력을 벗어나 허공에 매달렸다. 첫 우주유영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사고가 일어났다. 근처 위성이 산산이 폭발하면서 그 잔해가 우주 궤도를 따라 빠른 속도로 떠돌았고, 끝내 라이언이 머물던 우주선을 덮쳤다. 그렇게 순식간에 라이언은 우주에서 미아가 되었다. 그리고 방황하던 삶에 새로운 길 하나가 생겼다. ‘살아야겠다’는 길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톨스토이의 중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 2012)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며, 라이언 스톤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3-D 장편영화 <그래비티>에 나오는 인물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이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가 그려내는 두 삶에 관해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모두 죽음과 생명을 대비시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비슷한 주제를 다루었다고 해서 이 둘을 기계적으로 연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수히 많은 작품이 ‘삶’에 관해 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이끌렸던 지점은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서로 만나는 듯하면서도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한다면 <그래비티>는 삶 그 자체에 큰 방점을 찍는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래비티>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자 첨언처럼 느껴졌고 그것을 말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삶이 의미있고 가치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때때로 삶이 의미 없다 느껴질 때 절망은 찾아온다. 이반 일리치와 라이언 스톤의 삶이 바로 그랬다. 한데 ‘의미 없음’을 느끼는 지점은 이 두 사람에게 사뭇 다르게 드러난다. 이반 일리치는 언제나 ‘공적인’ 장소에 자신의 삶이 있기를 바랐다. 품위있는 그곳에 곧 삶의 의미가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병마의 고통은 그런 믿음을 통째로 뒤흔든다. 더이상 품위를 유지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이 기만이고 위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고통은 삶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며 더 큰 고통을 안긴다. 이반과는 달리 라이언에게는 고통이 무의미한 삶의 원인이었다. 딸의 죽음이 가져다준 고통이 삶의 의미를 무참히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반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이전 삶이 죽어있었음을 깨달았던 반면 라이언은 딸 아이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삶 또한 죽여버린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두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비슷한 태도를 드러낸다. 이반은 거짓된 희망이나 일에 몰두함으로써 죽음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에 눈을 돌린다. 라이언은 끝없이 운전하거나 허공에 몸을 맡김으로써 딸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고통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들의 회피는 언제나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죽음은 전혀 비켜나지 않고 정면으로 버티고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74p)기 때문이다. 


 

한데 더 이상 도망칠 곳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다시 삶을 찾을 수 있는 순간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래비티>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부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반은 죽음의 순간에 진정한 삶을 맛본다. 그리고 라이언은 죽을 것 같은 순간에서 빠져나오면서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진짜 삶을 살겠음을 선언한다. 이반의 죽음이 지연되어 라이언에게 옮겨간 듯하다. 둘은 모두 죽음의 과정을 통과했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을 말한다면, <그래비티>는 어쩔 수 없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 속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죽음의 양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죽음을 철저히 직시하는 순간에 삶은 다시 태어나 움직인다고. 이반은 자신의 신체가 죽고 있음을 인정했고, 다른 이들의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곧 죽음의 암흑 대신 생명의 빛을 느낀다. 라이언은 극한의 공포를 느낀 후 정지된 자신의 삶에 다시 연료를 채워넣는다. 우주복을 벗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다시 삶의 의지가 서서히 다시 태어남을 느낀다. 결국 죽음과 삶은 동시에 일어나는 행위다. 


 

그렇다면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반과 라이언의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기처럼 웅크린 라이언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반 일리치가 그토록 ‘소리내어 울고 싶었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같이 울어주기를 바랐다’(84p)는 것을 상기해보자. 결국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란 우리가 약하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솔직해질 수 있고, 눈물과 두려움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약하기 때문에 서로 아끼고 다가서야 고독을 견딜 수 있으며 세상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약함을 인정한다는 건 바로 그것을 안다는 것 아닐까? 라이언 스톤이 다시 찾아간 중력의 무게 속에 우리는 모두 이반이면서 누군가에게는 이반의 곁을 지켜준 게라심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