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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보르헤스의 말-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금동원(琴東媛) 2016. 4. 27. 21:59

 

 

『보르헤스의 말』-원제 Borges at Eighty: Conversation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윌리스 반스톤 공저/ 서창렬 역/마음산책/ 2015년

 

 

  눈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

  1980년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여든의 나이로 대담을 위해 뉴욕, 시카고, 보스턴을 여행했다.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당시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말’은 유일한 소통 방식이었다. 그에게 말하기는 글쓰기 못지않게 내밀한 언어 형식이자 세상과의 통로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를 본 시인이자 철학자 윌리스 반스톤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예전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은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어서 파도 위의 잉크와 마찬가지로 고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남겨진 현자들의 기록은 대부분 그 시대에 우연히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기록하게 된 익명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실제로 반스톤은 보르헤스와 나눈 대화에서 여전히 반짝이는 사유와 정신을 발견했고, 이를 하나의 작품처럼 남겨두고자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받아 적던 플라톤을 자처하며 직접『보르헤스의 말』을 엮었다. 그의 말마따나 “보르헤스의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게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르헤스의 말』은 그가 1976년과 1980년에 한 인터뷰 열한 개를 모은 책이다. 시력을 잃어가던 시기에 대한 담담한 회고뿐 아니라 말년에 이른 보르헤스의 문학, 창작, 죽음에 대한 견해까지 담고 있다. 그는 인터뷰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러면서 유아론과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말이 하나의 주장으로 굳어질까 염려하여 ‘오늘은 그래요’ 라는 식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곤 했다. “아, 그럴지도 몰라요. 오늘은 영지주의자, 내일은 불가지론자이면 어때요? 다 똑같은 거예요.” 이런 식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호성, 사실과 허구 사이의 틈새라는 우주적 수수께끼를 연상시킨다

 

저자소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 1986)

  Jorge Luis Borges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현대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헨리 제임스처럼 거의 정규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먼 성장기를 보냈다. 대신 그는 역시 헨리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영국계인 외할머니와 가정교사인 팅크 양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는 등 개인 교수를 통한 교육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그는 이미 일곱살에 영어로 『그리스 신화』 요약을 썼고, 여덟 살에는 『돈키호테』를 읽고 영감을 받아 「치명적인 모자의 챙」이라는 단편 소설을 썼으며 오스카 와일드의 영어 단편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작가인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꽃피웠으며, '제 2세대' 라틴아메리카 예술가들이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를 벗어나 프랑스의 신소설가들을 비롯 존 바스, 존 허크스, 도널드 바셀미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사실주의 세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경험과 상상의 세계는 문제를 야기하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점에서 사무엘 베게트에 버금간다.

  보르헤스는 1938년 어두운 계단에서 사고로 머리를 다쳐, 이로 인한 패혈증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단편은 자신의 맑은 정신과 판단력을 잃었다는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다.

  1950년대 중반 보르헤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시력 약화 증세로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다. 보르헤스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에게 글도 읽어주고 창작 활동도 도와주었다. 보르헤스는 예순여섯 살에 어릴 적 친구였던 여성과 처음으로 결혼하지만 3년 만에 헤어졌다. 그리고 숨지기 몇 주 전에 자신의 제자이자 비서인 여성과 재혼했다. 보르헤스는 앞을 못 보면서도 강의를 하러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또 20세기의 매우 영향력 있는 국제적 명성도 날로 높아만 갔다.

  보르헤스의 업적은 일관성과 가능성에 의해 어색해진 소설의 편협한 박진감을, 환상이 섞인 보다 광범위한 마음의 작용으로 대체시키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은 납득할 수 없는 것에도 형태를 만들어준다. 이야기꾼의 책략을 흔쾌히 받아들인 보르헤스는 하나의 일관된 이중 초점을 유지해 가면서, 언어와 독서에서 세계를 반영할 때 나타나는 역설과 함께 경험도 반영한다

 

  책 속으로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도 있고 재앙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두 가지 허깨비를 똑같이 취급해야 해요.--- p.104
  책은 상상력의 연장이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책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일 거예요.--- p.122
  우리에게 금지된 것은 없어요. 그걸 하는 것은, 적어도 시도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답니다.--- p.155
  작가는 순수한 자세로 써야 해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있는 게 자신의 시가 아닌 거예요.--- p.170
  난 미학이라는 게 없어요. 나는 단지 시와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뿐’이에요.--- p.181
  시는 말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말은 단지 상징일 뿐이니까요. 시는 말의 음악성 속에 존재하는 거예요.--- p.183
  궁극적으로 우정이 사랑보다 중요할 거예요. 어쩌면 사랑의 진정한 기능은, 사랑의 의무는 우정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으면 사랑은 도중에 끝나버릴 테니까요.--- p.186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p.212
  나는 시를 매우 사적이고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물론 그걸 느낄 수도 있고 못 느낄 수도 있죠. 만약 느낀다면, 그걸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p.274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 p.303

 

 

  출판사 서평


  세계 시민적인 사고와 개방성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모색한 보르헤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 출신 할머니와 가정교사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스페인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다. 이러한 유년기는 그에게 언어에 대한 개방성과 세계 시민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나는 두 할머니 중 한 분과 얘기할 땐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야 하고, 다른 분과 얘기할 땐 또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 두 가지 방식을 스페인어와 영어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244쪽

  보르헤스는 고대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꾸준히 공부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언어 간의 유의미한 차이뿐 아니라 개별적인 음악성에도 심취했다.

  앵글로색슨인들은 로마(Rome)를 로마버그(Romaburgh)라고 불렀어요. 우린 그 두 단어에 흠뻑 빠졌지요. 그리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어요. “줄리어스 시저는 브리튼 섬을 찾은 최초의 로마인이었다”라는 문장이었어요. 그런데 그 문장을 고대영어로 읽으면 더 멋진 울림이 있답니다. Gaius Iulius se Casere oerest Romana Brytenland gesohte. 그래서 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페루라는 거리를 달리며 소리쳤어요. “이울리우스 세카세르…….”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지만 우린 개의치 않았어요.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니까요! -197쪽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했다. 여기서 그가 쏟은 노력은 자신이 쓴 작품들의 근원을 찾으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르헤스는 언어를 통해 예술을 탐구했던 학자이고, 자신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들을 꾸준히 써낸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얻은 언어학적, 문학적 통찰은 아이러니였다. 좌절 속에서도 지켜야 할 생의 의지였다.

  반스톤 / 당신은 마음 상태나 감정이나 지성에 관한 한 단어를 찾고 있나요? 당신이 이 세상을 뜨기 전에?만약을 가정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찾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요?

  보르헤스 / 참단어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찾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아야 해요. 그러면 나중에 그 단어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도 있어요. 안 주어질 수도 있고요. 우리는 시행착오를 통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우리는 실수를 저질러야 하고, 실수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건 평생 해야 하는 일이지요.  -188쪽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죽음을 앞둔 문학가가 남긴 질문들과 답

 『보르헤스의 말』은 눈멀고 나이든 문학가가 죽음을 앞두고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나는 몸과 영혼, 모두 완전히 죽고 싶어요. 그리고 잊히고 싶어요. -92쪽

  고통스럽게 삶을 유지해온 보르헤스에게 죽음은 “희망이 가득한 것”이었다. 그는 삶을 악몽처럼 견뎌왔기에 죽음을 매 순간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난 사람이 늘 죽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단순히 뭔가를 기계적으로 반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하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에요. 물론 삶은 어느 순간에나 돌아올 수 있어요. -38쪽

  인터뷰 속에서 보르헤스는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삶도 죽음처럼 매 순간 돌아오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삶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보르헤스는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를 통해 언어를, 아름다움을 탐구해나갔다. 말은 시력을 잃은 그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새로운 돌파구로써 작용하기도 했다. 직접적이고 내밀한 소통 방식이라는 점에서 글과 비슷하되 전혀 다른 매체였기에,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바꾸어놓았다. 그러므로 『보르헤스의 말』은 20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친 대가가 남긴,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형식의 ‘작품’일지 모른다.

  나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 나의 모든 시도가 쓸데없으리란 것을 알지만,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 -303쪽

추천사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뚫려 있는 정신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르헤스 본인은 정신이 늘 메말라 있었다고 말한다. 뚫려 있는 길의 끝까지 갔다는 말이 되겠다. 대화록인 이 책에서 그는 그 뚫린 길을 어떻게 만났고, 또 그 길에서 무엇을 만나고 무엇을 만들었는지 가볍고도 명석한 언어로 말한다. 그가 시력을 잃고 모든 글을 구술해서 쓰던 시절에 이루어진 이 대화는 구어가 문어의 논리성을 확보하고 문어가 구어의 구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신기한 문체의 한 기적을 보여준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재미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더 재미있다.---황현산(문학평론가)

 

 

  미디어 리뷰

 

 보르헤스, 수수께끼와 맞서는 숙명을 말하다

 -한겨레 | 한겨레 최원형 기자 | 2015-08-27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 1986)는 말년에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도처에 있는 청중들을 만났다. 보르헤스는 중년 무렵 눈이 먼 뒤론 입으로 압축적인 단편소설과 시를 풀어내고 비서로 하여금 이를 받아쓰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문학을 세상에 내놨다. 이를 두고 작가 윌리스 반스톤은 “그에게 인쇄된 글과 입으로 한 말은 하나의 복합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말년의 보르헤스가 뛰어난 대화술로 동료, 청중들과 주고받는 말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기로 했다. [보르헤스의 말]은 보르헤스가 1976년과 1980년에 했던 인터뷰 열한 꼭지를 모은 책이다.
  보르헤스의 말들 속에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것들이 대부분 녹아들어 되풀이된다. 수수께끼와 같은 세계, 악몽, 죽음, 기억과 망각, 지옥 등의 주제들이 대표적이다. 예컨대 한 물리학자가 우주의 복잡성을 강조하는 그의 경향성을 지적하며 “당신의 세계관은 어떤 것이냐” 묻자, 그는 “나는 세계를 수수께끼로 생각한다. 그에 관한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결코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인 세계는 악몽과 다름없다. 죽음과 망각을 구원으로 인식하는 보르헤스는 “우리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꾼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코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푸느라 애써야 하는 자신의 숙명을 말한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동원하는 도구는 언어와 상상력이다. 그는 “우리의 과제는, 거의 밤마다 주어지는 실수와 악몽을 시로 녹여내는 것”이라며 “나는 항상 꿈을 꾸어야 하고, 그 꿈들은 말이 되어야 하고, 나는 말과 씨름해서 최선의 것이든 최악의 것이든 그걸 형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꿈이란 것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는” 경지이기 때문에 ‘창조’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자전적 작품인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얻었지만 망각하지 못하는 비극을 겪는 푸네스가 나온다. 그에 빗대어 보르헤스는 “상상력이란 것은 기억과 망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 두 가지를 섞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원래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인터뷰집에 나오는 그의 말들도 잠언처럼 심오하지만, 그의 진솔한 입말 자체는 의외로 쉽게 다가온다. 국내에서 간혹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와 엮여서 소개되곤 했던 보르헤스가 “나는 나 자신을 현대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도 재미있다. 그는 스스로 버나드 쇼, 헨리 제임스의 애독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나의 새로움은 19세기의 새로움이고, 나는 19세기 작가”라고 말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에드거 앨런 포 등 자신이 영향을 받은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는 것도 인상적이다. 특히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을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휘트먼의 역작 [풀잎]에 대해 “작가 스스로 모든 인간이 되고자 했던 비범한 시도”라는 찬사를 보낸다.